내가 쓰고 싶은 이 시대의 신화

미국과 한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통일운동 시민단체인 AOK(Action for One Korea)가 5년 전 페북에 올린 이야기 한 토막이다. 평화의 소녀상이 있는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시에서 새해의 결의를 같이한 시간ㅡ<우리 생애 내에 원코리아 실현>ㅡ이라는 제목이 달린 커다란 한반도 지도에 각자의 생각을 써서 붙이는데 1.5세인 할머니, 2세인 엄마를 따라온 여섯 살짜리 하나가 “평화하자 말하기”, “싸우자 하지 말기"라고 또박또박 쓴 한글 문구를 붙여서 참가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2016년 1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평화의 소녀상이 있는 글렌데일시에서 AOL 통일운동 단체에서 새해의 결의를 같이한 시간 (정연진 대표가 찍은 사진)
2016년 1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평화의 소녀상이 있는 글렌데일시에서 AOL 통일운동 단체에서 새해의 결의를 같이한 시간 (정연진 대표가 찍은 사진)

2021년에 열두 살이 되는 하나는 엄마와 미국에서 계속 살고 있고 할머니인 나는 지난 8월 미국에서 심각해지는 코로나 사태를 피해 혼자 귀국했다. 나는 기저 호흡기질환이 있는 75세로 조심해야 한다는 구실에서다.

하나는 작년 초부터 코로나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은 후, 온라인 수업을 일 년 가까이 했고, 지금은 Pasadena Community College(지역전문대학)에서 온라인 수업을 받고 있다. 캘리포니아주는 초·중·고 학생들이 대학 과목을 이수하면 대학 수업료가 면제된다. 또한 필수과목을 모두 이수하면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할 수만 있다면 연소자들이 무료로 대학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가 지난 학기에 택한 과목 중 하나는 스페인어인데 자기 반의  25세 동급생과 한 조를 짜서 숙제하고 발표도 했다. 3년 전에 아르헨티나 정부의 인가를 받은 아르헨티안 주말 학교에서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해서 이제는 책을 읽고, 작문도 하고 웬만한 대화는 쉽게 할 수 있다. 하나는 아빠가 프랑스인으로 한국어, 프랑스어,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5개 국어를 구사한다.

작년 여름방학에 아빠 쪽 할머니·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프랑스 북부의 Britany에 가서 열 명의 사촌들이 모여서 각본을 쓰고 무대를 꾸미고 연극을 하는 가족 공연을 했는데 각본 쓰는 일은 글을 잘 쓰는 하나가 맡아서 프랑스어로 써서 했단다. 딸 식구는 중국에서 수년간 살다가 미국으로 이주해 와서 지난 6년간 나는 그들이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도록 함께 살면서 손자와 손녀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쳤다.

정신없이 매일 닥치는 새로운 융합문화의 용광로 속에서 어떻게 키웠는지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가 나와 함께 한국 통일운동가들 모임에 가서 테이블 한 귀퉁이에 서서 다른 사람들 하는 동작을 보고 자기도 post-up(끈적이 사각종이) 한 장을 받아서 끌쩍 끌쩍하더니 “평화하자 말하기”, “싸우자 하지 말기”라는 글을 적어서 앞에 준비해 놓은 큰 파란색 통일코리아 지도 위에 붙인 것이다. 

하나가 한반도의 분단과 남북의 평화통일에 대한 생생한 체험을 크게 한 적이 한 번 있었다. 2015년 Women Cross DMZ 국제행사에 할머니와 엄마가 참석하기 위해 북경을 경유 평양과 개성에서 북녘 여성들과 종전협정을 촉구하는 행진을 하고 남으로 내려오느라 일주일 이상 집을 비웠다. 

휴전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와 임진각에서 30명의 국제여성평화운동가들이 버스에서 내렸을 때, 당시 상하이에서 살고 있던 하나는 아빠와 세 살 위인 오빠와 함께 할머니와 엄마를 만나러 비행기를 타고 온 것이다. 그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엄마와 할머니가 그때 이북과 이남에 가서 무엇을 했는가, 왜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려있고 DMZ 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양과 개성에서 북한 여성들 5천 명, 2천 명들과 행진을 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임진각을 향해서 행진 (우쪽부터) 노벨평화상 수상자 Mairead Maguire (북아일란드)와 Leymah Gbowee (리베리아), 정현경, 크리스틴 안, 김운아, 김반아
평양과 개성에서 북한 여성들 5천 명, 2천 명들과 행진을 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임진각을 향해서 행진 (우쪽부터) 노벨평화상 수상자 Mairead Maguire (북아일란드)와 Leymah Gbowee (리베리아), 정현경, 크리스틴 안, 김운아, 김반아

다인종 다문화 가정의 틀에는 남모르는 어려움이 많이 일어난다. 같은 유교권인 베트남-한국  가정에는 있지 않을 것이, 프랑스-미국계 한국인 가정에는 있을 수 있다. 특히, 프랑스혁명 이전의 봉건시대 가치관을 고수하고 있는 집안과 자유-평등-통합정신-감성치유-영성계발을 실천하며 그 위에 한반도의 평화통일까지 곁들인 의식구조를 가지고 사는 집안이 만났을 때는 별별 문제가 다 발생한다. 이런 경우는 어떤 등댓불을 바라보고 검푸른 삶의 대양을 노 저어가야 할까 망막한 순간들이 수없이 일어난다.

이렇게 구체적이고 실존주의적인 의문이 엄습할 때면 유연하면서도 강인한 주관을 가지고 브라질, 캐나다에서 반세기의 이민 생활을 하시다가 한국으로 역 이민하여 독거생활을 90세까지 하신 나의 어머니 일선님의 일생이 떠오른다.

제주도 서귀포 아파트에서 혼자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즉시 발견하지 못해서 뇌에 염증이 생겨 좌 뇌의 3분지 일을 잘라내고, 나머지 2년을 24시간 간병인의 도움과 휠체어에서 보내시면서 마비된 줄 알았던 손으로 일기장에 비틀비틀하게 “각성”이라는 두 글자를 써놓으셨다. 독립투사에서 연꽃이 되어 생을 마친 어머니는 우리 4남매의 정신적 주축이셨다. 그리고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이 있다. 제주도 신화 이야기, 장성한 아들들을 먹이기 위해 음식을 만들다가 자기 몸이 희생된 설문대할망 신화 이야기다.

어머니는 1962년 서울서 승마를 했다. 1964년에 우리 가족은 브라질에 이민을 갔고 단돈 500불을 가지고 떠나서 경제적으로 무지막지하게 힘든 이민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 사진은 우리 4남매로 하여금 그런 황량한 선택을 자청하신 우리 어머니의 리더십에 대해 무조건적 확신을 갖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1962년 서울서 승마를 했다. 1964년에 우리 가족은 브라질에 이민을 갔고 단돈 500불을 가지고 떠나서 경제적으로 무지막지하게 힘든 이민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 사진은 우리 4남매로 하여금 그런 황량한 선택을 자청하신 우리 어머니의 리더십에 대해 무조건적 확신을 갖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설문대할망에게는 500명의 아들이 있었다. “식구는 많고 가난한 데다 마침 흉년까지 겹쳐 끼니를 이어갈 수 없었다. 할망은 아들들에게 밖으로 나가 양식을 구해오라고 했다. 오백 형제들은 모두 양식을 구하러 나가고, 할머니는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백록담에 큰 가마솥을 걸고 불을 지핀 다음, 솥전 위를 걸어 돌아다니며 죽을 저었다. 그러다가 그만 발을 잘못 디디어 어머니는 죽 솥에 빠져 죽어버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아들들은 돌아와서 죽을 먹기 시작했다. 여느 때보다 죽 맛이 좋았다. 맨 마지막에 돌아온 막내가 죽을 뜨려고 솥을 젓다가 이상한 뼈다귀를 발견했다. 다시 살펴보니 어머니의 뼈가 틀림없었다. 동생은 어머니의 고기를 먹은 불효한 형들과 같이 있을 수 없다고 통탄하며 멀리 한경면 고산리 차귀섬으로 달려가 한없이 울다가 그만 바위가 되어 버렸다.

이것을 본 형들도 여기저기 늘어서서 한없이 통곡하다가 모두 바위로 굳어졌다. 그래서 영실(靈室)에는 499장군이 있고, 차귀섬에 막내 하나가 외롭게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참조)

내가 이 시대의 신화를 써본다면 어떤 내용일까?  ‘한반도 할미‘ 라고 이름 지어 본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김반아 주주통신원  vanak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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