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에 관해 공부하고, 족보 서문을 번역하고 풀이하면서 족보를 수정하여 만드는 작업을 주도하신 분들의 정성과 노고에 저절로 감사한 마음이 일어난다. 진주형씨 족보별 서문의 지은이 중에서 유독 고생이 많으셨으리라 짐작되는 분은 형사열(邢思烈; 18351902) 선생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1899년은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을미사변 직후의 시기이다. 을미사변은 1895108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조선왕후 명성황후를 살해한 사변이다. 일본이 청일전쟁 승리 후 약 6개월 만에 잔인무도하게 자행한 참변이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018년 시행)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1894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이다. 청일전쟁(淸日戰爭)은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725일부터 1895417일까지 벌인 전쟁이다.

전쟁터는 청나라도 일본도 아닌 우리나라 땅이었다.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KBS 다큐, <광복70년 기획 한반도 운명의 격전>, 2015.7.)에 따르면, ‘최소 3만 명에서 5만 명이 학살당했다.’, ‘수백 명을 죽여 (시신이) 길을 가로막을 정도였다. 수괴를 효수했는데 이 해골이 그중의 하나다.’ ‘보이는 대로 총살한다. 일본군 한 명이 이삼백 명의 적을 상대한다.’(도쿠시마 니치니치 신문, 1895.1.9.).   "1894년 그날"(EBS 역사채널 e)에 따르면, ‘화승총은 무라타 총(村田銃)에 미치지 못해 총기 싸움은 일본군 1이 동학당 100에 필적한다···.’(時事新報, 1894.12.2.). 우리 땅은 피로 물든 산하였다. 강산은 피로 염색됐다. 이처럼 지극히 엄혹한 상황에서 1899년 기해보는 만들어졌다. 기록을 소중히 여겨 족보를 수정하여 만들기를 주도하신 분과 이에 열심히 참여한 종친께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서문의 원문과 음, 번역문은 아래와 같다.

자료: <진주형씨족보>, 1899. 
자료: <진주형씨족보>, 1899. 

<번역문>

무릇 조상의 덕을 경험하고 증명하는 일은 딱 문헌과 같지는 않다. 후손끼리의 화목하려면 어찌 더욱 족보의 기록을 우선 살피지 않겠는가? 선조를 깊이 연구하면, 후대 후손이 비록 천억만 세가 되더라도 어찌 백천만 후손의 질서가 어지럽겠는가? 이는 백대에 걸친 친족끼리의 화목한 정의(情誼)이다. 어느 큰 문중이 나뉘어 흘러오는 원천을 생각함으로써 선조를 알아 나아가면 어찌 자식이나 손자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후손으로서 말하면 이에 아저씨이고 조카이다. 아아! 뜻하지 않은 사이에 갑자기 서로 가벼이 여기게 된다.

아아! 우리의 시조 형옹(邢顒)은 바로 중국 학사이고 또한 학사 홍은열 등과 함께 더불어 여러 명의 학자가 같은 시기에 선발되어 중국의 동쪽에 자리한 우리나라로 왔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는 문헌, 전적(典籍)과 현인(賢人)이 부쩍 늘어났다. 그 후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조상의 이름, 직함(職銜), 조정에서 내린 벼슬의 임명장 등이 많이 누락되어 상세하지 않다. 한탄스럽다.

중시조 형방(邢昉)에 이르러 고려왕조 때 평장사를 역임했고 진양 반성(현 경남 진주시 일원)에 거주하였다. 형승서(邢承緖)는 이부상서를 역임했고 형공미(邢公美)를 낳았다. 충렬왕 때 형공미는 공훈의 위계가 일등 공신이고 진양군으로 봉해졌다. 이런 인연으로 진양이 본관으로 되었다. 형공미는 이부상서 형문궤(邢文軌)를 낳았고, 형문궤는 판도판서 형찬(邢贊)을 낳았다.

형찬은 아들 넷을 낳았다. 형군자(邢君子)와 형군정(邢君正)은 이어짐, 즉 후손이 없다. 세 번째 아들 형군소(邢君紹)는 고려시대 민부(民部)의 으뜸 벼슬인 전서이고, 네 번째 아들 형군철은 충청병사였다. 전서공 형규(邢珪: 형군소의 아들)는 조선왕조 때 호조판서였다. 그의 아들 형인기(邢仁奇)는 좌찬성이었고 아들 네 명을 낳았다. 첫째인 형수(邢琇)는 대사간이었고, 둘째 형근(邢瑾)은 좌승지였다. 형박(邢玉尃)은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생원이었고, 형균(邢玉勻)은 진사이고 승지공이었다.

형근(邢瑾)이 낳은 형계선(邢繼善)은 부사직(5품 무관)이었다. 그가 낳은 형기(邢璣)는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생원이었다. 형기는 아들 네 명을 두었다. 첫째 형우안(邢友顔)은 진사였고, 둘째 형우증(邢友曾)도 진사였다. 형우사(邢友思)는 자헌대부였고, 넷째 형우맹(邢友孟)은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생원이었다.

그 후 후손은 뿔뿔이 흩어져 여러 고을에서 살았다. 그 수효가 많지는 않으나 도덕, 문장, 나라에 대한 충성, 어버이에 대한 효도 등으로 이름난 12명의 현자(賢者)가 계속 나왔다. 혹은 사당을 지어 추모하거나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表彰)하여 선()을 기리는 일이 많았다. 또한 벼슬이 높아 이름난 문벌이기에 훌륭한 문중이라 일컬을 만했다.

나는 비록 조부모나 조상만 못할지라도 모든 종친과 더불어 거듭 족보를 간행하여 이어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후세에 길이길이 빛나는 모범이 어찌 우리 종친의 대의(大義)가 아니겠는가? 힘쓰고 힘쓰자.

                       때는 1899년 기해년 4월 하순 후손 형사열(邢思烈)

제사를 모시는 자세로 삼가 서문을 쓰다.

고려왕조와 조선왕조는 제도와 벼슬의 이름이 다르다. 같은 왕조에서도 그 이름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말하자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정치의 큰 틀은 이른바 ‘1987년 체제로 불리면서도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정부조직법과 정부 조직도는 변했다.

원문 10열과 번역문 세 번째 문단에 이부상서판도판서가 나온다. 이부상서는 고려 시대 이부(吏部)의 으뜸 벼슬이고 공양왕 1(1389)판서로 고쳤다. 판도판서는 고려 후기에 호구(戶口공부(貢賦전량(錢粮)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판도사(版圖司)의 으뜸 벼슬이다.

원문 11열과 번역문 네 번째 문단에 민부전서가 나온다. 고려 시대의 관아는 삼부(三部)로 구성됐다.  ‘전서는 각 부의 으뜸 벼슬이다.  첫째, 선부(選部)는 전조(銓曹), 병조(兵曹), 의조(儀曹)를 합쳐 설치한 관아이다 둘째, 민부(民部)는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량(錢糧)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셋째, 언부(讞部)는 법률ㆍ소송ㆍ형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진주형씨 매헌공파 세수동.  전북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  출처: <진주형씨 대동보>, 제1권, 2003, 31쪽
진주형씨 매헌공파 세수동.  전북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  출처: <진주형씨 대동보>, 제1권, 2003, 31쪽

원문 16열과 번역문 여섯 번째 문단에 ‘12명의 현자가 나온다. 현자가 누군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번 족보에 이어 24년 후에 수정 작업한 1923년 계해보의 서문을 지은 송철헌 선생은 아홉 분의 현자를 말씀했다. 학문과 덕행이 널리 알려진 지지당(형사보), 도곡(형세영), 경암(형부), 임금을 호위한 공로가 큰 제안재(형련), 우락당(형협), 효행이 탁월한 송촌(형률), 백촌(형결), 효은(형세적), 영모당(형국윤) 등이다. 그 이후 36년이 지나 여덟 분이 더 기록에 올랐다. 1899년 기해보와 60년의 시차가 존재하는 1959년 기해보(판서공파보)의 서문을 지은 형광욱 선생은 17명의 현자를 특정했다. 즉 문장과 도덕으로 세상의 사표가 된 지지당, 도곡, 경암, 모재, 서암, 운정, 동헌, 모암 등 8공이다.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이 돋보였던 제안재, 우락당, 두원 등 3공이다. 그리고 효행이 남달랐던 송촌, 백촌, 효은, 영모당, 경담, 진모 등 6공이다.

나는 1899년 기해보의 원본을 아직 보지 못했다. 여기에 제시한 서문의 원자료는 형백우(邢栢宇; 20142017, 진주형씨대종회 회장) 종친이 일본에 거주하는 판서공파 거창(居昌)분파 형종우 종친에게서 받은 사진이다.

특기할 점은 서문의 내용에 병사공파의 후손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언급된 유일한 후손은 도곡(형세영)이다. 이는 판서공파와 병사공파 간에 교류가 여의치 않았을 가능성을 내보인다. 1899년 당시는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등의 여파로 집안끼리의 교류뿐만 아니라 지역 간 교류가 밀접하게 이뤄질 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한 상황 탓인지, 1899년 기해보 서문의 필자는 한 분이다. 서문의 필자가 판서공파와 병사공파의 후손, 다른 가문의 후손으로 이뤄지면 그 그림이 멋지게 보이겠다.

[꾸미기]애국지사 오하 형갑수 기적비. 전북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제1권 42쪽
애국지사 오하 형갑수 기적비.  전북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 출처: <진주형씨 대동보>, 제1권, 2003, 42쪽.

형사열 선생은 판서공 형군소의 14대손이고 자헌대부 형우사의 8대손이다. 우연인지 모르나, 선생의 손자 형갑수 선생(18921969)은 1899년으로부터 60년이 흐른 1주갑(周甲) 후에 간행된 1959년 기해보(판서공파보)의 기()를 짓는다. 조부와 손자가 각각 청일전쟁 직후와 6·25사변 직후라는 엄청나게 힘든 시기에 진주형씨 족보를 수정하여 간행했다. 각고의 노력과 심혈을 기울인 두 분에게 모든 종친이 감사할 일이다. 또한 온 세상이 피로 물들어 엄혹한 시기에도 기록을 남긴 강인한 의지와 인내는 오래도록 영향을 미치리라.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f61255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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