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스러운 분위기가 잘 보존되어 있는 애월읍 상귀리 '황다리 궤당'을 찾다

제주시 애월읍 상귀리에 있는 <황다리 궤당>의 모습, 당의 안쪽 '보름 웃도'는 송 씨 할망을 모시는 신당이고, 바깥쪽 '보름알도'는 '강 씨 영감'을 모시는 신당이다.
제주시 애월읍 상귀리에 있는 <황다리 궤당>의 모습, 당의 안쪽 '보름 웃도'는 송 씨 할망을 모시는 신당이고, 바깥쪽 '보름알도'는 '강 씨 영감'을 모시는 신당이다.

11월 9일 밀양에서 온 배 선생과 함께 창희 친구의 차를 이용하여 제주시 애월읍에 있는 수산리를 찾아 나섰다. 수산리를 찾은 것은 고교 동창이면서 제주 향토사학자로 유명한 문영택 전직 고교 교장이 제주일보에 지역의 역사, 문화 등을 소개하는 칼럼을 ‘기획’ 기사로 계속 쓰고 있어서다. 그 기사들 중 ‘애월읍 수산리’에 대한 글이 몇 차례 올라와 직접 탐방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산리'라는 지명은 일제 이전에는 ‘물메’ 또는 ‘물뫼’라는 제주어로 불렀다. 제주도의 많은 지명과 오름 등은 과거에 이런 식으로 대부분 지역에서 부르는 순수한 우리말 지명이었다. 그런 좋은 이름을 일제강점기 때 억지로 한자말로 바꾸면서 ‘水山里’라는 마을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그렇지만 이곳에 있는 초등학교 명칭은 그대로 남아있어 ‘물메초등학교’라고 부르고 있었다. ‘물뫼’라는 뜻은 <물의 산>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수산리>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9일 아침에 갑자기 문 교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수산리를 찾아가 보고 싶은데, 어디를 어떻게 찾아가면 좋은가?”

내심으로야 문 교장이 시간이 되어 우리를 안내해 주면 최고이지만 워낙 바쁜 친구라서 갑자기 전화하는 것 자체가 염치없는 일이라서 거기까지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랬더니,“수산리가 영수네 고향인데, 오늘 거기에 가 있을지 몰라. 전화 좀 해 봐라.” 는 것이다. 영수 역시 고등학교 동창인데, 이 친구도 제주의 모 사립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친구다. 헛일 삼아 영수한테 전화했더니 통화가 되었다. 마을 일 때문에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는 없고, 낮 시간에 예원동의 포제단과 상귀리‘소앵동’에 있는 <황다리 궤당>을 안내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애월읍 구엄리에 있는 돌 염전인 '소금빌레'에 대한 안내판
애월읍 구엄리에 있는 돌 염전인 '소금빌레'에 대한 안내판

제주 바닷가의 빌레(너럭바위) 위에서 바닷물을 올려 소금을 만들던 돌 염전에서

이런 얘기를 창희 친구에게 했더니 자신도 예전에 아는 사람이 그 동네 살아서 수산리를 두어 번 가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왕에 수산리를 찾을 것이면 인근에 있는 구엄리의 ‘돌 염전’을 둘러보고 가자고 하여 수산리를 방문하기 전에 ‘돌 염전’을 찾았다.

돌 염전 <소금빌레>는 과거 소금이 귀하던 시절 넓은 너럭바위에 바닷물을 올려 말려서 소금을 만들던 곳이다. 빌레 위를 둘러가면서 찰흙으로 막아 바닷물이 세어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돌 염전 <소금빌레>는 과거 소금이 귀하던 시절 넓은 너럭바위에 바닷물을 올려 말려서 소금을 만들던 곳이다. 빌레 위를 둘러가면서 찰흙으로 막아 바닷물이 세어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돌 염전’은 예전에 소금이 귀하던 시절 바닷가의 평평한 빌레(평평하고 넓은 돌 바위) 위에 찰흙으로 주변을 둘러막아서 그 위에 바닷물을 퍼 올려 말려 소금을 만들던 곳이라는 것이다. 물론 중간에 육지에서 소금을 많이 생산하면서 제주의 이런 소금밭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지만 요즘은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구엄리 돌 염전을 찾고 나서 영수 친구가 기다리는 수산리 마을회관을 찾아갔다. 처음 가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며 직접 안내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점심까지 얻어먹고 보니 더욱 그랬다.   

황다리 궤당을 가는 길에 예원동에 있는 포제단을 들렀다.  무속신앙이 여성 중심의 문화라면 포제는 남성 중심의 유교적 문화로서 19세기에 들어와서 제주도의 여러 마을에서 주로 정월과 유월에 행해졌는데, 요즘은 주로 정월에만 지낸다.

예원동에 있는 포제단이 있는 정자인데, 마침 우리가 갔을 때는 포제단 정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예원동에 있는 포제단이 있는 정자인데, 마침 우리가 갔을 때는 포제단 정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체널제주의 의하면, "정월에 지내는 제사는 객신제(客神祭), 유월에 지내는 제사는 농포제(農酺祭)라고 한다. 객신제는 주로 그 마을 사람들에게 그해의 천연두를 비롯한 모든 악신의 침입을 방지하게 하는 제사요, 농포제는 그해의 마을사람들의 농사에 지장이 없도록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로서 각각 그 목적이 다르다. 제일(祭日)은 대개 첫 정일(丁日)이다. 정월의 포제는 입춘이 지난 뒤에 날을 택하여 벌이는 것이 보통이다. 입춘이 지나야 비로소 새해가 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출처 : 채널제주(http://www.channeljeju.com)>

우리 동네인 서귀포시 호근동에도 마을 뒤 학수바위에 가면 포제를 지내는 곳이 있다. 우리 마을에서도 음력 정월에 포제를 지낸다. 유월제는 지내지 않는다. 포제 날짜가 정해지면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및 집사 등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약 1주일 정도 합숙을 하면서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유지한 다음 포제에 참석한다.

<황다리 궤당>을 들어가는 농노길
<황다리 궤당>을 들어가는 농노길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상귀리 '황다리 궤당'을 찾다

영수 친구는 함께 점심을 먹은 후 우리를 데리고 예원동의 포제단을 거쳐 상귀리 638-1에 위치한 <황다리 궤당>으로 안내했다. 예원동의 포제단을 지나 상귀리길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약 500m쯤 가다가 소왕천의 소앵교 다리에 이르기 직전 왼쪽으로 난 농로를 따라 들어갔다. <황다리 궤당>은 소왕천가의  커다란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위 위와 냇가 주변에는 구실잣밤나무, 참식나무, 종가시나무, 동백나무 등의 상록수와 팽나무 등의 숲이 우거져 있었다. 그 바위 밑에는 움푹하게 파인 궤(‘굴’의 제주어)가 있다. 그 궤는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곳이 ‘송 씨 할망’을 모시는 곳이고, 그 궤를 바라보면서 입구 쪽인 왼쪽에는 자그마한 궤가 자리 잡고 있다. 그 궤는 강 씨 할르방을 모시는 곳이라고 한다.

<황다리 궤당>은 높이 4~5m  정도의 바위가 병품처럼 둘러쳐져 있다 그 바위 밑에 움푹하게 패여들어가 있는 곳이 궤(굴)인데, 그곳에 신당을 모셨다.
<황다리 궤당>은 높이 4~5m 정도의 바위가 병품처럼 둘러쳐져 있다 그 바위 밑에 움푹하게 패여들어가 있는 곳이 궤(굴)인데, 그곳에 신당을 모셨다.

높이 4∼5m정도의 용암 바위벽 앞 공간은의 면적은 350㎡정도이다. 당의 입구는 돌담을 쌓아놓고 있었다. 송 씨 할망당과 강 씨 할르방 당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주변 청소를 끼끗이 해 놓고 있어서 다른 곳의 본향당보다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주변 분위기가  신당으로서 신령스러운 느낌이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필자는 전에 송당 본향당도 가보고 몇 군데 본향당을 찾아가 보았지만 그 어떤 본향당보다도 더 신당으로서의 분위기와 느낌이 좋은 곳이었다. 만약 제주에서 본향당을 찾는다면 이곳을 꼭 한 번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전설에 의하면 바위 틈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을 하고자 하는데 송 씨 할망이나 강 씨 할으방 붕에 제물을 바치면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가져다 주겠다고 하자 두 부부가 기도를 하다 송 씨 할망과 강 씨 할으방은 순절을 하였다 고 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신당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안 쪽은 송 씨 할망당이고 바깥 쪽은 강 씨 할르방 당인데, 중간의 돌담으로 경계를 해 놓았다. 넓이는 100 평 정도 된다.
전설에 의하면 바위 틈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을 하고자 하는데 송 씨 할망이나 강 씨 할으방 붕에 제물을 바치면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가져다 주겠다고 하자 두 부부가 기도를 하다 송 씨 할망과 강 씨 할으방은 순절을 하였다 고 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신당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안 쪽은 송 씨 할망당이고 바깥 쪽은 강 씨 할르방 당인데, 중간의 돌담으로 경계를 해 놓았다. 넓이는 100 평 정도 된다.

 

전설에 의하면 바위 틈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고자 하는데 송 씨 할망이나 강 씨 할으방 붕에 제물을 바치면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가져다 주겠다고 하자 두 부부가 기도하다 송 씨 할망과 강 씨 할으방은 순절하였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신당을 차리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안쪽은 송 씨 할망당이고 바깥쪽은 강 씨 할르방 당인데, 중간의 돌담으로 경계를 해 놓았다. 넓이는 100 평 정도 된다.
전설에 의하면 바위 틈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고자 하는데 송 씨 할망이나 강 씨 할으방 붕에 제물을 바치면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가져다 주겠다고 하자 두 부부가 기도하다 송 씨 할망과 강 씨 할으방은 순절하였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신당을 차리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안쪽은 송 씨 할망당이고 바깥쪽은 강 씨 할르방 당인데, 중간의 돌담으로 경계를 해 놓았다. 넓이는 100 평 정도 된다.

<고대경의 신당기행>에는 이곳 '황다리 궤당'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신(堂神)은 <보롬웃또 송씨부인 보롬알또 강씨 영감>으로 상귀리 사람들의 생산, 물고, 호적을 담당하고 제일은 1월 7일이다. (필자 해석; ‘보롬웃또’는 ‘바람의 위 출입구’라는 뜻이고, ‘보름알또’는 ‘바람의 아래 출입구’라는 뜻의 제주어)

전설에 의하면 지금부터 450여 년 전 마음씨 착하고 정성이 갸륵한 송 씨 할망(‘할머니’의 제주어)과 강 씨 하르방(‘할아버지’의 제주어) 부부가 평화롭게 살과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강 씨 하르방 자신이 하는 말이 "나는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야 하는데 지금 당장 배가 고파서 날아 갈 수 없으니 당신 내외 중 아무도 좋으니 두 분이 의논해서 나에게 제물로 바친다면 그 보답으로 이 마을에 자손의 번영과 번축하게 하며 모든 재난을 막아주마" 하고 사라져 버렸다. 잠에서 깨어난 강 씨 하르방은 이상하게 여겨 어젯밤 꿈에 있었던 일을 송 씨 할망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이 말을 들은 송 씨 할망은 "아이고 이 노릇을 어떻게 호랴. 하르방이 죽어도 나 혼자 못 살고, 내가 죽어도 하르방 혼자 어떵 살코(어떻게 살것인가?)" 하면서 고민 끝에 천지 신령님께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하여 매일 같이 기도를 올리는데 갑자기 음력 정월 초이렛날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지가 요란하게 진동하며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용이 하늘로 날아가면서 용암구가 생겨 그 자리에 송 씨 할망이 절규했고, 뒤이어 강 씨 하르방도 애석하게도 희생된 할망 곁으로 가다가 채 못 미쳐 옆 바위틈에 끼여 순화하셨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후부터 이 마을 사람들은 그 두 분의 애절한 넋을 달래주기 위하여 제단을 차리고 '지신이 있는 자리'다 하여 매년 음력 정월 초이렛날을 제일로 정하고 무당을 초청하여 큰 굿을 해오다 1960년 초 정부시책에 의해 무당을 배격하는 과정에 굿은 중단하고 최근에는 미풍양속 전통을 살려 이장님을 중심으로 전 주민이 동참하는 가운데 마을의 화합과 안녕을, 그리고 무병장수 번농번축을 기원하고 각종 재해를 예방하는데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소앵동에서 상귀리 길을 가다가 소왕천 소앵교가 나오기 직전 농노를 따라 찾아 들어갈 수 있다. 상귀리 길 옆에는 마늘밭이 펼쳐져 있고 멀리 한라산의 모습도 보인다.
소앵동에서 상귀리 길을 가다가 소왕천 소앵교가 나오기 직전 농노를 따라 찾아 들어갈 수 있다. 상귀리 길 옆에는 마늘밭이 펼쳐져 있고 멀리 한라산의 모습도 보인다.

또 하나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강 씨 하르방과 송 씨 할망이 <황다리궤>에 같이 좌정해 계시다가 강 씨 하르방이 육식을 잡수고 비린내를 풍긴다 하여 송 씨 할망이 강 씨 하르방을 문전 밖으로 내몰아 입구 북쪽에 좌정하였다' 한다. 여자가 안 자리를 차지하여 남자를 내쫓은 것은 흔치 않은 경우이다. 부부라도 살림을 가르면 멀찍이 떨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 당의 강씨 하르방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담 바깥쪽의 작은 동굴에 좌정했다. 그래서 정월 초 7일 이 당에서 굿을 할 때는 한 석 친 다음 하르방을 할망 곁으로 청하여서 같이 대접하였다고 한다.“(고대경의 신당기행)

농노길을 지나면 황다리 궤당 입구가 나오는데, 이곳은 다른 본향당과 달리 커다란 상록수와 팽나무 신목 등이 울창하게 우거져 신령스런 느낌이 더욱 돋보인다.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관리하고 있다.
농노길을 지나면 황다리 궤당 입구가 나오는데, 이곳은 다른 본향당과 달리 커다란 상록수와 팽나무 신목 등이 울창하게 우거져 신령스런 느낌이 더욱 돋보인다.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관리하고 있다.

제주는 옛날부터 ‘절 오백, 당 오백’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그만큼 제주는 당과 절이 성행했다는 말이다. 문영택 선생에 의하면 “제주는 옛날부터 1만 8,000여 신이 있는 곳이라 한다. 하지만 문화재로 지정한 곳은 송당 본향당, 새미하로 산당, 와흘 본향당, 수산 본향당, 월평 다리굿당 등 5곳뿐이다. 또 서귀 본향당, 예래 본향당, 강정 본향당 등 3곳이 향토유산으로 지정돼 있지만 다른 신당은 대부분 마을 또는 읍면동 차원에서 관리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본향당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을 모신 신당이다. 송당리 본향당은 당신(堂神)의 조상격인 수렵ㆍ목축신이자 남신인 ‘소로소천국’과 농경신이자 여신인 ‘금백주’가 결혼해 터를 잡은 곳이다. 이들 부부 사이에서 18명의 아들과 28명의 딸이 태어났고, 이들과 그 자손들이 뻗어나가 368개 마을의 당신이 됐다고 전해진다.“

문영택 선생이 제주일보에 기고한 수산리의 포제단과 무속신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수산리에는 경관이 빼어난 곳에 2개의 포제단이 위치하고 있다. 수산저수지를 바라보는 물메 오름 중턱에 기와로 지붕을 올린 포제단과 본동에서 올라간 예원동의 전망 좋은 동산 북쪽에 위치한 노천 포제단이 그곳이다.

조선시대 제주는 무속신앙과 불교가 성행하였던 사회였다. 당굿은 오랜 시간 동안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주 선인들의 제천행사이며 마을 축제였다.

음력 정월에는 마을 수호신에게 인사를 드리는 신과세제, 음력 2월에는 영등신을 모시는 영등제, 한여름에는 우마의 번성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백중제(마불림제), 9월과 10월에는 1년 농사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시만국대제,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비는 칠성제, 바다 수호신에게 비는 용왕제, 산신제, 풀무고사제 등 다양한 형태의 굿과 제의가 행해졌다.

조선 후기 유교 정책이 펼쳐지면서 19세기 전후하여, 유교식 제사인 포제가 남성 중심으로 행해지고, 이때부터 마을제가 여성 중심의 당굿과 남성 중심의 포제로 나누어졌다.“

필자가 어릴 때, 우리 고향 제주 서귀포 호근동에는 여드레당이 있어서 할머니, 어머니 같은 분들이 자주 다녔던 기억이 있다. 제주 전체에는 368개의 본향당이 있을 정도로 무속이 발달되어 있었다.
필자가 어릴 때, 우리 고향 제주 서귀포 호근동에는 여드레당이 있어서 할머니, 어머니 같은 분들이 자주 다녔던 기억이 있다. 제주 전체에는 368개의 본향당이 있을 정도로 무속이 발달되어 있었다.

무속신앙에 대한 어릴 적 경험과 기억들

필자는 무속과 관련하여 어릴 때 추억을 많이 갖고 있다. 당시는 병, 의원이 귀한 시절이라 가족 중에 누가 아프면 심방(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였다. 좀 사는 집에서는 집안의 안녕과 무병, 장수, 번영을 위하여 날을 잡아 며칠 큰 굿을 하였다. 그럴 때는 중간에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노래하면서 춤을 추고 즐겼다. 그럴 때 나도 멍석 위에 올라가 춤을 추어 어른들이 돈을 주어 받았던 기억이 있다. 또 사람이 돌아가시면 귀양을 낸다고 하면서 굿을 하였다. 심방이 망자의 혼을 불러들여 망자 대신 부모 형제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일종의 살풀이를 하고 저승길로 편안하게 가게 하였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적인 종교라는 것도 그 뿌리는 이와 같은 샤머니즘적인 무속에서 출발하였다. 나약한 인간이 무엇엔가 의지하고 복을 빌며 안녕을 빌었던 민중의 삶의 방식이었는데,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외면당하는 것이 안타깝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적인 종교라는 것도 그 뿌리는 이와 같은 샤머니즘적인 무속에서 출발하였다. 나약한 인간이 무엇엔가 의지하고 복을 빌며 안녕을 빌었던 민중의 삶의 방식이었는데,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외면당하는 것이 안타깝다.

그런가 하면 우리 동네인 서귀포시 호근동에는 마을 아래 동네에 ‘여드레당’이라는 당굿을 하는 곳이 있다. 커다란 검팽나무 아래에 제단을 마련해 놓고 마을 부녀자들이 '8'로 끝나는 날에 찾던 신당이다. 이곳을 찾아 떡과 음식을 마련하여 올리고 가족들의 무병, 무사, 안녕을 빌었다. 우리 어머니도 1년에 한 번 쯤은 집으로 심방을 불러 작은 굿을 하고 1년에 몇 차례는 여드레당을 찾아 치성을 드렸던 기억을 갖고 있다.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옛날 아낙들의 시집살이 힘든 삶을 누가 있어 보살피고 대변해 주었겠는가? 이런 고달픈 삶 속에서 그들을 조금이라도 품어 안고 위로해 줄 수 있었던 데에는 무속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정신과 의사일 수도 있고, 상담사일 수도 있던 사람들이 바로 무당, 무속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샤머니즘이 발전하여 오늘날 다양한 종교로 발전해 나간 것도 그 뿌리와 무속의 뿌리는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 본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싶은 나약한 우리 인간의 한 단면인 것이다.

2018년에 서울에서 주강현 교수가 주관하여 연 '제주문화학교' 수강을 하면서 제주 무속에 대하여 들을 기회가 있었다. 제주 전통문화연구의 대가인 문무병 이사장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더욱이 제주시 김령리 '성세기 당'을 중심으로 무속활동을 하는 여성 심방(무속인)이 직접 와서 강의를 해주어서 더욱 제주 무속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 후 '제주문화학교'에서는 수강생을 대상으로 현장 답사를 가는 기회를 가졌다. 그때 김녕리에 있는 '성세기당'을 찾았다. 제주문화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던 심방(무속인)이 현장에 나와 여러 가지 사례를 들면서 제주 무속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그 강의도 제주 무속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은 유익한 시간이었다.  

우리 무속은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 등을 거치면서 지금은 크게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우리의 고유한 민중 문화를 무속만큼 잘 간직하고 있는 것도 없는데 참 아쉽다.
우리 무속은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 등을 거치면서 지금은 크게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우리의 고유한 민중 문화를 무속만큼 잘 간직하고 있는 것도 없는데 참 아쉽다.

이러던 것이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정책과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쇠락해 갔다. 지금은 그 여드레당을 찾는 사람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마을에 따라서는 아직도 심방의 계보와 명맥을 이어가는 곳도 있다. 제주 영등굿이 유네스코 유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제주 큰굿' 등 무속이 제주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의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문화라는 것은 민중들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기능보유자를 양성하고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박제된 문화라 생각한다. 이미 생명력을 잃은 기록 속에나 남아있는 문화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여 안타깝다. 가장 확실하고 좋은 방법은 이러한 민속 문화유산들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전수하여 생활 속에서 이어갈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국가나 지자체가 나서서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글로벌 시대라고 하여도 문화를 잃거나 없는 민족은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나중에는 존재 자체가 없어져버릴 수 있다. 유엔 차원에서도 노력하고 있지만 세계인들은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문화 전통을 존속,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길을 여는 노력이 즉 세계화일 것이다.

제주 관광도 자연 유산만을 내놓고 세계인을 오라고 하기에는 콘텐츠가 너무 빈약하다. 따라서 육지와 달리 제주의 이런 독특한 무속 신앙은 세계인의 관심을 가질만한 내용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제주특별자치도는 물론이고 국가에서도 관심을 갖고 문화재  보존과 발굴 정책을 적극 추진해 주었으면 좋겠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김광철 주주통신원  kkc08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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