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만화경!!

어렴풋이 정신이 들고 있었지만 귀에서 굿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수방은 한숨 잘 자고 깨어났다. 길고도 질긴 꿈을 꾸었는데 피곤하지 않았다. 몸은 이상하게 날아 갈 것 같고 상쾌하기까지 했다.

그러고도 5 년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 전화는 끊기고 친정 식구가 피난을 가셨는지 어떤신지 궁금해 친정, 시골집을 다시 갔었지. 그날도 골방에는 만수향 냄새가 진동을 했어. 밥그릇이 따뜻한 것이 그 아침에도 상식을 올렸던 거야. 피난을 떠나면서도, 그 경황 중에도......세상에 그러니 오 년이나 상청을 차려놓고 죽지 않은 작은 딸, 작은 시누이, 막내 여동생의 제사밥을 날마다 올렸던 거야.

늙은 수방의 눈에서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열심히 살아내느라고 찬찬히 음미해 볼 새도 없이 한세상이 떠나갔네! 한바탕 울고 난 그녀는 휴우 -한숨을 쉬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언제 점심상을 보아 놓고 사라졌는지 아침은 더욱 아니고 점심 때도 지난 모양이다. 아이들 소리가 없잖아. 두 다리가 묶였어도 수방은 비로소 양어깨 죽지에 날개가 돋아난 듯 자유를 느꼈다.

왜 한 번도 어머니께, 아니면 새 언니를 붙들고 아니면 원술 언니를 앉혀놓고 따질 생각을 못했을까, 대체 왜? 왜? 갑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치는 그녀의 주글거리는 양 볼로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그래서 재수가 옴붙어 지지리도 집안은 안 풀리고 평생을 병을 달고 살았을 게야. 당하고  당하고 또 당하고 끝없이 당하고만 끝나는 인생! 여태 아뭇소리 안 하고 잘도 살더니 왜 이제 와서 억장이 무너지는지 모르겠다. 쉴 새 없이 눈물을 쏟으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집에서 알까 봐 그렇게  조심했건만 아랫것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시어머니 귀에 들어가 어느 날 물고 있던 장죽을  빼어 문지방을 두드리며 대노하시던 시어머니의 모습이 잠깐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깥사랑에라도 알리고 친정으로 연통을 하여 결혼을 물릴까, 혹은 친정 오라비든 부모님을 불러다가 불호령을 하신다는 것을 얼마나 빌고 빌어서 만류했던가. 

  "최소한 토박이는 되는 줄 알고 혼인을 성사했건만 아주 상놈의 집안인 게야!. 뭔 할 짓이 없어 귀신을 섬기고 무당을 상대하느냐! 죽지도 않는 제 여식의 씻김굿을 하다니 에흐- 무엄하고 상스럽고 상서로운지고. 너도 배운 것이 그러하여 혹시 점집 출입이나 하고 귀신이나 섬기는 아녀자는 아니렷다!!"

한 번도 듣지 못한 시어머니의 높은 목소리가 수십년의 세월을 건너 수방의  귓전을 다시 때렸다.

이제는 절대로 멀거니 앉아서 당하지 않을 거야. 또 다시 나 모르게 내 가슴에 칼을 꽂게 할 수는 없어. 저것들로부터 또 언제 당할지 몰라. 어떻게 멀쩡히 살아있는 딸 상식을 올리는 것을 방치할 수 있었느냔 말야. 이 세상 누구를 믿겠어. 어머니도 믿을 수 없는 세상 딸년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완전히 합세한 거야. 혹시 오늘밤이라도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중 누군가 내 가슴에 비수를 꽂으러 올지 몰라. 빨리 실행해야 한다. 빠를수록 좋아.

그런 줄도 모르고 영감이 죽은 후에는 왠지 무서워 방문을 꼭 닫지 못하게 했는데,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이야, 나라는 인간! 영감이 뻔히 나를 생각해서 같이 죽자고 한 것을 혼자 죽기 싫어 그러는 줄 알았으니 못나고 못난 인간! 하지만 이렇게 넋두리하고 있을 시간이 없지.

그녀는 이부자리 옆에 대기해 있는 세숫물로 말끔하게 세수를 했다. 짧게 깎인 머리지만 떨리는 왼손으로 가지런히 쓰다듬었다. 주춤주춤 엉덩이로 밀어 뭉기적거리며 장롱 앞으로 갔다. 고리를 가까스로 잡아 빼고 장롱문을 열었다. 그중 희고 깨끗한 블라우스를 찾아 입었다. 속곳을 꺼내어 아랫도리를 갈아입었다. 치마는 어제 갈아입힌 것이니 아직 쓸만하다. 수방은 새삼스럽게 자신이 기거하던 방을 둘러본다.

영감! 당신과 내가 말년에 기거하던 방이유. 저 창 밑에 있는 고리짝은 내가 시집올 때 갖고 온 혼수 중 하나인데 이젠 다 낡았구랴! 피난 통에 다 잃어버리고 이사 다니며 간수를 못하고 저거 하나 남았구랴! 나도 이제 떠나고 나면 내 명이 다하거든 저승에서나 봅시다. 저승에 가면 그래도 거기 당신이 있겠거니 생각하면 그리 무섭지 않더군요. 그때 거기서 만나거든 또 못난이라구 구박하지 말구랴! 그러게 신식 교육받은 여자와 혼인할 일이지 나 같은 촌무지랭이를 누가 데려다 놓으래요.

난 아직 안 죽어요. 발톱의 때꺼정 양반인 당신 집에 들어와 가도 하나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자식 잘 못 가르친 죄 내가 알아요. 여하튼 난 오늘부로 여기를 빠져나가기루 했수!

수방은 덜렁거리는 오른팔을 책상다리 한가운데 끼우고 왼손으로 방바닥을 밀며 거실을 향해 출발했다. 손자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가까워졌는지 모른다. 마음이 조급하여 수방은 전신이 후들후들 떨렸다. 마음을 다시금 다잡아 먹고 엉덩이를 밀어 전진한다. 넋 놓고 또 당할 수는 없어! 땀방울이 흐르는 그녀의 얼굴에 결기가 서린다. 그동안 전화벨이 두 번인가 울렸다. 햇빛의 강도로 봐서 아이들이 당도할 시간은 아직 아니!

수방은 기진맥진하여 거실 유리문에 한참을 기대어 쉬었다.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가야지. 거긴 어디쯤일까? 괘씸한 인사들! 인사돌을 주문한 지가 열흘은 넘었어. 수방은 베란다로 나왔다. 마침 베란다의 샷시문이 잠기지 않고 열려 있었다. 너무나 다행이다. 10 층이 가까우니 열어 놓고 다녀도 도둑이 들 리 만무하지.

시원한 바람이 가슴 속 깊은 곳까지 거슬러 들어간다. 여기만 나와도 이렇게 좋은 세상이 있는 것을. 그녀는 꽃내음이 섞인 상큼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울긋불긋한 상가의 간판이 화려했다. 살아서 꿈틀대는 것 같았다.

나도 여기서 빠져나가서 살아나야지.

방충망을 밀치고 이사 올 때부터 건들대던 쇠난간을 발로 차보았다. 난간이 힘없이 덜렁 밑으로 쳐진다. 내려앉은 쇠난간을 보자 그녀는 자신의 몸이 부웅 솟구치는 희열을 느꼈다. 저 환한 세상으로 날아내리는 거야. 9 층 위에서 수방은 바람을 타고 아래로 몸을 날렸다.

아파트 스피커에서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연막소독이 있을 예정이오니 입주자 여러분께서는 베란다 또는 각 세대의 문을 닫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간  구독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편집 , 사진 :  양성숙 편집위원

김승원 주주통신원  heajo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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