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제목은 저자와 출판사가 심사숙고하는 고민거리이다. 여러 물건을 싼 보따리에 이름을 잘 붙여야 한다. 그 이름은 보따리의 내용물을 압축하여 드러내야 한다. 호리지차(毫釐之差), 즉 아주 근소한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점 하나 차이로 ‘님’이 ‘남’이 된다. 책 제목은 독자의 눈길을 잡아야 한다.

내가 참여하는 매주 ‘토요일 행복한 독서’(이하 ‘토행독’) 모임에서는 미리 20권의 책을 선정한 후 회원 각자는 모임 때 사회자로서 진행하고 싶은 책을 고른다. 나는 <관계의 과학>을 잡았다. 책의 제목이 내 눈에 확 들어왔다. 우리의 삶은 여러 관계(Relation)의 집합이다. 좁게는 인간관계의 집합이다. 집합 기호로 나타내면, 삶 = { Ri }, i=1, ···, n. <관계의 과학>은 그러한 관계와 그 집합의 이면에 작동하는 심리에 대하여 과학을 원용하여 해석한 책인 줄 알았다. 웬걸, 그렇지는 않았다. 촛불 집회에 참여한 사람의 수,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성씨(姓氏)의 수가 증가하는 모양 등과 비슷한 문제를 설명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측정하고자 하나 그러하기가 어려워 보이는 여러 현상을 통계물리학을 활용해 수량화하여 측정하고 그 확률분포와 사회적 의미를 설명한 책이다. 사회현상은 관계의 표출이다. 따라서 책 제목 <관계의 과학>은 책의 내용을 잘 포괄한 셈이다.

올해 초인 2월4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제14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추위도 잊은 채 박근혜 당시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 출처: 한겨레신문, 2017-12-28.
올해 초인 2월4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제14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추위도 잊은 채 박근혜 당시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 출처: 한겨레신문, 2017-12-28.

목차를 보니, 책은 다섯 덩어리다. 덩어리 제목은 각각 연결, 관계, 시선, 흐름, 미래 등이다. 이러한 배열은 저자의 의식이 무엇을 지향하고 어떻게 흐르는지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연결하여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 시선을 집중하여 흐름을 파악하면서 미래로 나아간다.

첫 번째 덩어리는 연결이 변화의 순간을 발견하는 일과 밀접함을 보여준다. 주요 개념은 문턱값(Threshold Value; 역치), 때맞음, 상전이(相轉移), 링크(link; 사람들로 이뤄진 네트워크인 사회연결망에서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누적확률분포 등이다. 문턱값에 도달했을 때, 그때가 적절할 때 물질의 상태는 변한다. 그 지점에서 링크가 형성된다. 또한 누적은 변화를 추동한다. 이른바 양질전화(量質轉化)이다. 양의 누적은 질의 변화를 일으킨다. 자극이 문턱값에 못 미치면 반응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당발이 없는 연결망. 김범준 제공 /출처: 한겨레신문, 2017-12-01.
마당발이 없는 연결망. 김범준 제공 /출처: 한겨레신문, 2017-12-01.

두 번째 덩어리는 관계의 속성을 잘 나타내는 우정의 측정 가능성을 보여준다. 주요 개념은 벡터(Vector), 허브(Hub), 커뮤니티(Community), 팃포탯(tit-for-tat), 창발(emergence; 다수의 단순한 요소가 복잡한 전체의 특징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 등이다. 과학적으로 절친(切親)을 찾는 방법에는 벡터 개념이, 우정의 개수를 측정하는 방법에는 허브 개념이 적용되었다. 나의 눈을 붙잡은 대목은 ‘개미들에게 배운다.’이다. 개미는 서로 몸을 이어 다리를 만들기도 하고, 몸을 엮어 뗏목을 만들어 집단으로 이주한다. 개미 집단이 보여주는 창발 현상이다.

세 번째 덩어리는 무엇으로, 즉 어떤 시선으로 전체를 읽어야 하는지를 문제로 다룬다. 프랙탈(fractal; 일부 작은 조각이 전체와 비슷한 기하학적 형태; 프랙탈은 자기 유사성을 띰), 암흑물질, 카토그램(Cartogram; 인구비례지도), 중력파, 인공지능이 주요 개념으로 등장한다. 시선은 유연해야 하리.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니, 정확히 알려면 다르게 읽어야 한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어도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는 나무가 산다. 한국에서는 기쁜 일(예컨대, 한자리에서 평생 일하기)이 스웨덴에서 슬픈 일이다. 이처럼 두 나라의 시선은 판이하다.

2018년 지방선거 기초단체장 선거 결과를 실제 지도와 인구비례지도위에 그린 그림. 더불어민주당은 파란색, 자유한국당은 빨간색, 민주평화당은 연두색, 그리고 무소속은 짙은 회색으로 표시했다. 제주도처럼 기초단체장 선거 없이 광역단체장만을 뽑은 곳은 흰색으로 표시했다. 김범준 제공 / 출처: 한겨레신문, 2018-06-29.
2018년 지방선거 기초단체장 선거 결과를 실제 지도와 인구비례지도위에 그린 그림. 더불어민주당은 파란색, 자유한국당은 빨간색, 민주평화당은 연두색, 그리고 무소속은 짙은 회색으로 표시했다. 제주도처럼 기초단체장 선거 없이 광역단체장만을 뽑은 곳은 흰색으로 표시했다. 김범준 제공 / 출처: 한겨레신문, 2018-06-29.

네 번째 덩어리는 ‘흐름’이다. 흐름은 변화의 다른 이름이다. 복잡한 지구를 재미있게 관찰하는 기법으로 ‘잠잠과 후다닥’(burst), ‘고만고만과 다이내믹’(푸아송 분포; Poisson distribution), 마구걷기(Random-Walk), 지수함수 등이 제시됐다. 서로 구분하려면 이름이 달라야 한다. 어디론가 사라진 만취자를 마구걷기 기법으로 찾아낸다. 족보를 상당히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모이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도 그 모임 참여자의 성씨의 수는 매우 느리게 증가한다. 이러한 내용은 나의 갈증을 조금 해소해줬다. 역대 <진주형씨 족보>의 서문을 번역하는 작업을 해온 나로서는 시대별로 성씨의 분포가 상당히 궁금했다.

1500년대부터 현대까지 우리나라 성씨의 분포 꼴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일직선을 따라 줄어드는 지수함수 꼴이다. 우리나라만 이런 가는 꼬리를 보여준다. 김범준 제공  / 출처: 한겨레신문, :2018-10-26.
1500년대부터 현대까지 우리나라 성씨의 분포 꼴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일직선을 따라 줄어드는 지수함수 꼴이다. 우리나라만 이런 가는 꼬리를 보여준다. 김범준 제공 / 출처: 한겨레신문, :2018-10-26.

다섯 번째 덩어리는 ‘미래’이다. 시간은 우리 앞에 어떻게 존재할까. 존재 형태라기보다는 존재 방식에 관한 질문으로 이해된다. 시간은 아직 우리가 가보지 못한 가능성이다. 시간의 다른 이름은 개연성, 즉 확률(Probability)이겠다. 그러한 시간인 미래로 가는 길은 울퉁불퉁하다. 선형(linear)이 아니라 비선형(nonlinear)으로 난 길이다. 기계적으로 접근하다간 탈 난다. 예측하기 어렵다. 우연은 어디에나 있다.

지난 6일 아침 <관계의 과학>을 다룬 토행독에서 진행자 노릇을 했다. 읽기가 쉽지는 않은 책이다. 매주 독서로 단련된 회원들의 관심과 이해의 폭이 넓었다. 지식 축적도가 대단했다. 지식 집약적 활동에 기초한 지식기반경제(knowledge-based economy) 시대의 꽃이 활짝 폈고, 더불어 제4차 산업혁명의 도전에 대한 응전도 탁월하리라 생각했다. 통계물리학으로 복잡한 세상의 연결고리와 회로를 밝힌 <관계의 과학>은 개별 경제주체의 지식기반을 확충하는 데 기여하리라.

 

편집 :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f61255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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