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은 추억과 함께 한다.

옛 집터를 돌아보면 무척 작았다. 아니 무척 작다고 느낀다.
 
'좁다'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공간은 풍요로웠다. 마당에는 우물이 있어 여름마다 등목을 했고 처마끝 떨어지는 빗물을 앉아 볼 수 있는 쪽마루도 있었다. 

 아버지는 겨울마다 땅을 파고 독을 묻었다. 어렸던 나는 엄마가 언제 동치미를 담그는지 알 수 없었다. 한 번쯤은 '학교 다녀왔습니다'라고 외치며 엄마를 찾다가 김치담는 광경을 구경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다 이내 코를 쏘는 양념향에 질려 방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다.

옹기뚜껑을 편하게 들 수 있을만큼 묻어둔 김장독, 엄마는 날 검은 무쇠 식칼로 배추를 베어내고 무우를 몇 개 얹어 밥상에 새로 동치미 그릇을 내어오셨다. 잘게 썰은 배, 실처럼 가느다란 빨간 고추, 목을 타고 넘어가는 국물은 몹시 시원해서 뜨거운 국을 마실때처럼 숟갈로 떠서 호로록 거렸다. 무우도, 배추도 독이 빌 때까지 아삭한 맛을 잃지 않았다. 
몹시 추운 날이면 살얼음이 국물 속을 떠다닐 때도 있었는데 아이스크림 같은 간식거리가 아쉬웠던 때라 숟가락에 얼음을 올리기 위해 삼남매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곤 했었다. 

그 동치미의 맛은 찬바람을 견뎌낸 밭의 배추, 무우들과 산 아래를 흐르던 물들이 지나던 우물, 그리고 엄마가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아파트로 이사하고 나서도 엄마는 동치미를 담그셨지만 흙구덩이도, 뺨을 때리는 추위도 없어 엄마조차도 그 맛을 내지는 못하셨다. 나 또한 이내 그 맛을 포기했다.

사진의 동치미는 내 기억의 그것과는 무척 다르다. 그저 사라져가는 추억을 붙잡을 수 있을 뿐이다.
사진의 동치미는 내 기억의 그것과는 무척 다르다. 그저 사라져가는 추억을 붙잡을 수 있을 뿐이다.

맛은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은 살아갈 힘이 된다. 

엄마는 오래 전부터 요양원에 계신다. 우물은 말라서 덮어진지 오래되었고, 옛 집터에는 홍시가 되기 전에 따먹었다가 쓴 맛을 실컷 본 감나무만이 부러진 허리를 한 채 남아있었다. 집터에는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옛 나무 , 머리속에만 남은 골목길, 밤새 짖던 개 때문에 싸웠던 이웃집들 대신  튼튼한 시멘트, 번쩍거리는 센서등, 깔끔한 차량이 풍경을 대신할 것이다.  동치미 또한 옛 자리를 떠나 가성비 있는 가격, 국산 재료와 유명 브랜드를 강조하는 앱, 혹은 쇼호스트의 손으로 옮겨갈 것이다.

그 맛, 추억,  그 기쁨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함을 안다. 추억은 사라지고 새로운 추억이 그 위에 돋아난다. 변화하지 않는 전승이란 없다. 세상이 이어진다는 것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인간사가 계속되는 한 추억들은 탄생과 소멸을 계속하며 변화하고, 맛을 창조한다. 그 맛은 살고 있는 나 자신을 다른 세대와 구별할 수 있도록 하며 고유한 내 자신의 정체성까지 만들어낸다. 내가 사라지면 그 맛 또한 사라진다는 점에서 맛의 추억은 나와 일심동체가 된다.

매일의 식탁을 감사히 대하지만, 그 맛을 다시 보았으면 하는 욕구는 가시지 않는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세상은 발전하지만 모든 것이 그러하지는 않다는 것. 이 마음 한 구석의 허전함은 끝내 이어질 것이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김해인 주주통신원  logca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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