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수 어르신 (1935~ )

대문을 들어서니, 헛간 가득 빼곡하게 쟁여진 장작들이 동그랗게 잘려진 단면에 자랑스럽게 제 나이를 내보인다. 헛간에 쟁이고도 남은 장작은 포대 자루로 잘 덮어 놨다. 아침 소제 후 얹어 두셨을까. 그 위에 놓인 싸리 빗자루 하나. 정겹지만 쓸쓸함도 묻었다. 마당에는 가을걷이 한 토란이 껍질 벗겨진 채 얼기설기 널려 있었다. 가을바람이 와 살살 간질이며 잘도 말렸고 집안 곳곳 부지런한 손길을 탄 흔적이 엿보였다.

 

“어르신!” 불러보니 영화배우처럼 훤한 인물의 어르신이 함박웃음을 짓고 나오신다. 삶의 험난한 배역을 잘 연기하고 한산해진 멋진 배우 같은 얼굴이셨다.


■ 해방과 전쟁을 지나며 맏형이 짊어지는 짐

형제들은 맏형인 나를 보면 미안해 한다. ‘형이 우리 때문에 희생했다. 총명하고 부지런한데 형만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라고. 

나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초등 4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때문에 일본어로 교육을 받다 한국어로 전환해 공부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 진학을 못하고 가사를 돌봐야 했다. 친구들이 눌러쓴 교복모자가 너무 부러워서 옆을 지날 때는 속울음 삼키느라 목젖이 팽팽해졌다. 

18살 때 6.25가 났다. 전방에서는 살벌한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후방에서는 인민군 공비들이 출몰해 주민들의 곡식을 탈취하고 짐승도 잡아먹었다. 나는 옥천군 군서면 지서 전투경찰로 들어갔다. 서대산 공비 토벌 작전에 투입됐고 고리산 등지에서 공비 야간침투 대비 잠복근무를 섰다. 전방에서 전투하다 죽은 군인의 시체를 수거·보관하고 유족에게 전달해야 했다. 솜털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로 전사한 아들, 오열하다 실신하는 어머니, 전쟁의 처참한 현실에 몸을 떨었던 시절이다. 전투경찰 2년 하며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 인민군 공비들은 숙달되고 훈련된 현역군인이었는데 우리는 훈련을 한 번도 받아보지도 않은 민간 지원병이었다. 하지만 총과 실탄을 장전해 완전무장하고 살육의 현장에 뛰어들어야 했다. 우리 경찰들은 맥을 못 추고 도망 다니다시피 할 수 밖에 없었다.

휴전 후 집에 머물다 다시 군 백골부대에 들어갔고 하사관 학교도 나왔다. 21살에 현역 제대했는데 어머니가 병중이셨다. 제대하고 15일 만에 돌아가셨다. 그동안 모자지간의 정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는데 돌아가셔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오로지 자식을 위해 굶주리고 못 입고 일만 하시던 어머니였다. 맏이로서 옛이야기 하며 잘 모시려 했는데… 저승에 가셔서는 그저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것 밖에 해드릴게 없어 탄식이 절로 나왔다.

나는 4남 2녀 중 맏이였다. 여동생에게 안살림을 맡기고. 어린 남동생은 둘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아버지는 만년선비였다. 가정은 뒷전이며 옷만 깨끗이 차려입고 점잖게 노닐기만 할 뿐 집안 대소사에 관심이 없으셨다. 결국 맏이 인 내가 그 중심에 서 있어야 했다.


■ 곤궁한 집안에 혼삿길도 막혔던 시절, 고마운 아내·잘 자라준 동생과 자녀

나는 27살 때 옥천읍 삼양리 처자인 21살 아내 이정자와 결혼했다. 남자 집이 잘살고 양가 부모가 있어야 장가를 잘 가는데 나는 홀시아버지에 동생은 줄줄이, 아무도 시집을 안 올라 했다. 아내도 열한 살에 어미 일찍 잃고 어려서 고생 많이 한 사람이다. 우리는 마음벗이 필요한 사람끼리 만나 서로 아껴 주며 살기로 했다. 아내는 시동생들에게 갖은 뒷바라지를 다 해주었다. 처음 아내가 시집왔을 때 막내 동생 친구들이 일곱 살 동생에게 ‘니 어머니다’고 했다. 실제로 막내 동생은 내 아내를 어머니라 부르며 자랐다. 아내는 걷어야 할 남자들이 넘쳐나서 이리저리 손가는 데가 많아 밥 한술도 편히 앉아 떠 본적이 없다. 

온 가족은 내가 책임지고 동생들 공부도 시켜야 했다. 안 해본 것이 없이 다 해봤다. 나무장사, 건설 인부, 막노동을 가리지 않았다. KS물산 옥천 벽지공장에서 9년 근무했는데 부도가 나는 바람에 나와, 대전 법동 아파트 경비를 하기도 했다. 비번인 날은 막노동도 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몸이 부서지고 손톱이 다 닳도록 치열하게 살았다. 우리는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인줄 알았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가족을 책임지는 게 사나이 자존심이었다. 열심히 일 했지만 아이들 대학 보낼 때는 논, 밭을 팔아야 했다. 농촌에서 자식 대학 보내려면 그리 했어야 했다. 자식한테는 다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동생들은 머리가 좋았다. 남동생 셋은 중학교까지 내가 시켰다. 그 후론 각자 장학금을 받아 고등학교에 갔고 대학을 다 마쳤다. 큰 동생은 공무원으로 서울대학교 행정과장, 둘째 동생은 은행 지점장으로 퇴직했으며 막내동생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근무했다. 못난 형을 잘 따라준 동생들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내 자식들을 가르칠 때는 동생들이 등록금을 보태고 해서 내가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나는 아들 둘. 딸 셋을 뒀는데 큰아들은 문교부에 근무했다. 작은아들은 옥천군에 전기기술자로 꽃집을 운영하는 며느리와 살고 있고, 딸들도 다 출가해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별 걱정 없이 잘 살고 있다. 그동안 아버지 잘 모시고 동생들 뒷바라지 잘 했다고 노인회, 옥천군수로부터 효자상을 받기도 했다. 할 도리를 했기에 상 자체보다는 지나온 시간이 헛일이 아니어서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 월전리의 새마을지도자 …‘봉사는 체질, 상은 덤’

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을 반장 일을 물려받아 5년 했다. 반장제도가 없어져서 새마을 지도자 10년, 통장을 5년 했다. 새마을 지도자를 하던 시절 옥천군은 농로 사정이 안 좋아 논두렁 밭두렁으로 지게를 지어 짐을 날랐다. 리어카 하나 제대로 다닐 길이 없었다. 나는 발로 뛰어 5키로 정도 농로확장도 시켰다. 

또 지금의 회관 앞은 좁아 차가 진입하기도 힘들고 차를 돌릴 공간이 없었다. 당시 옥천군 공화당 부총재인 정복규 씨가 이 동네 사람이었다. 하루는 내가 옥천시내를 나갔는데 그가 자기 집으로 나를 불렀다. ‘회관 앞에 내 논이 있으니 그 논을 채워 회관 앞을 광장으로 만들겠냐’고 내게 제안했다. 그 말을 듣고 부리나케 마을로 돌아와 주민들에게 알렸다. 온 주민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부 나와 지게질을 해 땅을 채운 결과 2개월 만에 광장이 만들어 졌다. 내 집 마당 만들듯이 다들 손을 보탰다. 지금은 그곳에 주차도 하고 버스가 와서 차를 돌리기도 한다. 버스가 들어온 첫날은 마을 잔칫날 같았다. 다들 차에 올라 그 기쁨을 누렸다. 고마워서 잊지 못할 일이다. 

이후 1976년도 정도 됐을 것이다. 마을 주민들이 회의할 장소가 없어서 좁은 우리 집을 이용하다, 내가 방법을 모색했다. 외부로 나간 고향민에게 직접 편지를 써 찬조를 모으고 최규하 대통령 하사금도 확보해 25평 마을회관을 건립했다. 그때 돈으로 330만 원으로 지었다. 그때는 새마을 사업을 한다고 하면 각 기관에서 밀어주는 시기였다. 

나는 옥천신문에 ‘보고 싶은 그분들’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활동하던 그 시절 고마웠던 분들과 일에 대해 글을 써 기고하기도 했다. 은혜를 모르면 금수만도 못한 것이다. 

수돗물이 들어오기 전에는 마을에 간이 상수도도 개설했다. 마을 안길 농수로 덮개 공사를 했으며 부녀들을 위해 월전 빨래터도 두 곳 만들었다. 지금은 세탁기가 그 역할을 하지만 그때는 또 그것이 유용했다. 새마을 지도자 할 때 마을의 모든 일을 잘 이끌어 간다고 상도 많이 받았다. 도지사 상. 경찰청장 상, 경찰서장 상, 군수 상 등으로 격려와 박수를 받았고 동네에서는 감사패도 수여했다. 부모 같은 어른들이 애썼다고 칭찬하며 등을 두드려 줄 때 가장 기쁘고 일할 맛이 났다. 

65세가 넘어서는 노인회 총무를 10년간 하다 나중에는 노인회장이 됐다. 어려운 시절에 나서 못 배운 노인들의 한을 풀기 위해 2011년 경로당에 노인대학을 개설했다. 32명 머리 허연 학생들이 1년 과정을 마치고 사각모를 쓰고 졸업가를 부를 때는 그 감격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메었다. 마을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그 날의 감동이 유독 오랜 시간 동안 머물렀다.


나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유공자들에게 조금 더 관심을

6.25 때 전투경찰로 참전해 국가 유공자가 됐다. 나는 군서면 유공자회 총무를 맡고 있다. 현재‘옥천군 유공자회’에는 90살 넘은 회원도 있고, 회원 수는 대략 300여 명 된다. 옥천 다목적 회관 내 6.25 유공자회 사무실이 있다. 1년에 몇 번 모이는데 모인 사람들과 점심식사라도 나누려면 여윳돈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돌려보내자니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유공자들에게 한 달에 한 30만 원 정도 유공자 수당이 나온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임에 가면 한목소리로 요구한다. 나이 많은 유공자들이 살면 얼마나 살겠나. 안타깝지만 10년 이상 살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유공자들이 부자로 넉넉하게 사는 게 아니라서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데 마음 놓고 돈을 쓰지 못한다. 수당 좀 올려 줬으면 좋겠다. 영세민들도 나라에서 지원하고 있는데 나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유공자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가져주어야지. 우리 세대는 국민연금이 안 나온다. 그 시절은 연금을 내는 제도가 없었다. 노령연금과 유공자 수당이 전부다. 여윳돈 있으면 지금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나라에 없는 돈 자꾸 달라 조르기가 안 됐지만 내가 대표로 발언 좀 해야겠다.


■ 옛날이야기를 하려 해도, 젊은이들은 귀담아 안 들어

나는 10여 년 전 심장판막 수술을 받았다. 하루 두 번 약을 먹고 두 달에 한 번씩 진찰을 받는다. 심장판막을 떼 내고 새 인공 판막을 넣었다. 내가 병원에 가면 병원 원장님이 ‘할아버님은 인공판막 새것을 몸에 넣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정정하게 젊게 사신다’라고 농담을 한다. 나는 마음껏 밖으로 활동하고 다니는데 안사람은 그렇게 못해서 항상 미안하다. 다리만 안 아프면 같이 여러 곳을 다닐 텐데. 안사람은 허리 수술을 네 차례나 해서 걸음을 잘 못 걷는다. 보고 있으면 나 때문에 고생하느라 저리 된 거 같아 미안하고 안쓰럽다.

전에는 마을에 집집마다 친구들이 있었고, 마을 발전을 위해 고락을 함께 나눈 사람도 많았는데…이제 그 사람들 다 저세상으로 떠났다. 동네에 혼자 남아 쓸쓸하다. 외롭고 대화할 데가 없다. 어디 가서 옛날이야기를 하려 해도 젊은 사람들이라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그래서 나이 먹을수록 내가 원하는 삶의 희망보다 이제 후손들 가정이나 화목하게 살았으면 싶다. 지금껏 남한테 해 안 끼치고 마을 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고 미움 받을 짓 안 하고 정직하게 잘 살았다. 이만하면 ‘이은수’ 이름값 했고 자존심도 지켰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촬영을 하겠다고 말씀 드렸다. 어르신은 방에 급히 들어가시더니 윗 저고리를 찾아 들고 나오셨다. 옷을 갖춰 입고 매무새를 만지며 한참을 고르셨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 흰 피부에 사려 깊은 눈빛, 조심스러운 몸짓. 그 연세에도 명철함을 잃지 않고 꼿꼿하시다. 격변기의 험난한 고비마다 용사로서, 지역의 지도자로서, 집안의 맏형으로서 언제나 어르신의 자리를 지키셨다. 때마다 제 몫을 단단히 해내셨을 어르신의 일생이 반듯한 얼굴에 되살아나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큰 형님’을 만난 감동이 차올라 배웅하고 돌아가시는 어르신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 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관련기사 :  http://www.okcheoni.com/news/articleView.html?idxno=4563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김경희 작가  minho@okinews.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키워드

#은빛자서전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