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리 이두표 회장(1937년~)

휴일 어르신 댁 마당은 차들이 한 가득 이었다. 어르신을 닮은 네 명의 남자들이 이방 저방에서 나와 마루가 삐거덕 거렸다. 아들이 모두 총출동을 했다. 휴일 날 아버님 혼자 계시는  집에 다들 모였다. 아마도 형제들 단체 톡 방에 큰 아들 충하씨가 ‘옥천 집으로 다 모여’ 하지 않았을까, 효자들이다. 그 청명한 날 아버지를 보러 다 집합했다. 어르신은 둘째아들이 바지락 칼국수를 끓여서 같이 먹었다고 자랑하셨다. 어르신은 밥 안 먹어도 배부를 것이며 보기 드문 효자들이다. 며느리들이 그 마음에 동조해주니 충하 충근 충호 충환, 아들들도 운신의 폭이 자유롭겠지. 그래서 딸 같은 며느리라고 하셨나보다 행복한 어르신, 이두표 회장님.

“7년 전에 떠난 집 사람 보고 싶지. 날이 갈수록 더 보고 싶어. 동네가 작아서 빈집도 많아 20호 있었는데 지금은 다들 죽고 외지로 나가고 열댓 호 남았어. 내가 동네를 지키네 그랴 여기서 나서 자랐어. 여기서 죽을 거여”

7년 전, 먼 길 배웅할 때 가슴이 무너졌다. 지금도 아침이면 일어나 내가 누웠던 옆자리를 손으로 한 번 씩 쓸어본다. 온기 없는 아내의 자리가 아직도 허전하다.

 

■ 여덟 살이 맞았던 해방의 날 

1937년생 84살 정축생인 나는 200년 된 집에 살고 있다. 고조부가 지은 집이다. 내가 어릴 때 120년 됐다는 말을 들었다. 석가래와 기둥은 손을 보고 그리그리 버텨오고 있다. 우리 형제는 3형제에 누이동생 하나 4남매였다. 나는 장남으로 두표, 옥례, 성표, 진표 그렇게 아들들은 '표'자 돌림을 썼다. 동생들 이름만 불러 봐도 목젖이 뜨끈하다. 바로 혈육의 정이다. 

1학년 때 해방을 맞았는데 죽향국민학교 다니다가 8월에 해방되면서 삼양으로 분리됐다.  

어른들이 삼양학교로 가라니 우리는 그 해 여름부터 삼양국민학교에 다녔다. 해방이 뭔지도 모를 만큼 어리버리한 그 때 학교를 옮기며 세상 변화의 현장에 처음 서보았다. 죽향초등학교 40회로 입학했고 삼양국민학교로는 6회로 졸업했다. 옥천 중학교 옥천농고를 다녔다. 

중학교 때부터 위가 안 좋아서 몸이 약했는데 아마도 젖배를 곯았던 까닭이 아닐까. 삼촌이 나랑 한동갑이라 할머니도 연세 많으셔서, 삼촌과 나는 어머니 젖을 나눠먹었다는 후문을 들었다. 갓난쟁이가 기억할리 만무한 일이지만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쌀이 없어 암죽도 못 끓여 먹고 엄마 젖 한쪽씩 나눠먹었다. 형제들은 많지, 삼촌들도 많지, 때 거리 걱정하고 사는 건 불 보듯 훤하다. 그 시절에 60살 됐다고 환갑잔치 하던 이유가 뭘까. 젖배를 곯았으니 다들 골골하면서 나이들은 게다. 60까지 살아낸 것도 기특하다고 잔치까지 벌여줬다. 지금은 환갑에 잔치한다면 뒤통수 따가운 시절이 됐고 칠순잔치도 망설이게 된다.

20년 전 가족사진, 어머니와 아내가 떠난 자리를 손주들이 위로하고 있다.
20년 전 가족사진, 어머니와 아내가 떠난 자리를 손주들이 위로하고 있다.

 


■ 1964년 옥천 우체국에서 사회 초년생으로 첫 걸음을 시작하다.

28살에 이원 대동리 사는 김계순 처자와 혼인했다. 아내는 24살 이었고 제대를 20일 앞둔 때였다. 아내는 우리 결혼 50주년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났다. 더 가슴 아픈 건 금혼식 하는 50년 되는 해에 먼저 떠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만 가득하다. 착한 사람들은 고생 끝에 편히 살려고 하면 먼저 데려가니 한 번씩 애간장이 녹는다. 살아있다는 이유로 무너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배웅하는 아픔을 견뎌내야 한다. 

1964년 1월 제대 하고 그 해 4월에 옥천 우체국 임시직으로 취업을 했다. 그 시절 말로 아는 분이 나를 우체국에 심어주셨다. 시작은 어설펐지만 3년 만에 채용고시가 있어서 통과하고 정식근무를 시작했다. 시작은 남의 손으로 자리를 얻었지만 성실하고 우직하게 근무해서 정식 직원이 되었다. 그게 나의 경쟁력이었다. 

1998년도 6월에 퇴직할 때 까지 30년 근무했다. 30년간 내 인생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우체국의 역사도 무심한 세월 속에서 시류를 탔다. 역사는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 그리고 사회의 바퀴가 맞물려 돌아간다. 그래서 개인도, 나라도 각자의 책임을 소홀히 할 수 없다. 기능직이라고 직무가 완벽하게 분리된 건 아니고 그때만 해도 전문성보다 많은 업무를 적은 인원이 해내서 나또한 여러 가지 업무를 맡아서 했다.

우체국 기능직 인데 1인 10역은 했을 거다. 그 옛날에 업무 분리가 얼마나 이루어졌을 것이며 학교에서도 영어 선생이 음악 미술 다 가르치던 시대를 살아온 우리 아닌가. 

어쩌면 지금 세대보다 더 다방면에 능력 있었는지도 모른다. 맡기면 다 해냈다. 잔머리를 쓰지 않아서 가능했던 게다. 우편물 취급, 보험, 예금, 출납, 시간 지나면서 업무 변화의 물결을 탔다. 우편물이 우체국의 독점사업이라 다른데서 할 수 없어서 우편물 업무가 많았다. 1964년에는 택배라는 용어 자체도 모르던 시절이다. 소포라는 이름으로 물건을 주고받고 상자 안에 뭐가 들었을까 궁금해 하면서 뜯어보던 흑백사진 속 정경 같은 이야기다. 

전보와 전화 사업도 병행했다. 전보는 우리 기억 속에 아득한 이름이다. 전보 왔다면 다들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았던 시절이다. 긴급으로 전할일이 ‘00위독’이 대부분 이지 않았을까.

전보라는 녀석이 우리들에게 긴급한 연락망으로 효자노릇을 하더니 어느새 컴퓨터란 놈이 책상에 떡하니 올려 지면서 전보는 어디론가 종적을 감췄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사라지고 새로 부각되는 것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세상의 운행은 멈추지 않는다. 

업무에 충실했던 시절을 기억해본다.
업무에 충실했던 시절을 기억해본다.

 


■ 주경야독 하던 일상들, 농부로 우체국 직원으로 

나는 주경야독하듯이 하루를 쓰던 때라 새벽에 밭에 나가 밭일을 하고 아침이면 도시락을 챙겨 우체국으로 출근했다.

양은 도시락에 뭐 특별한 반찬도 없다. 점심시간이면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다들 도시락을 꺼낸다. 뚜껑을 열기도 전에 사무실은 김치 냄새로 진동을 한다. 다들 김치에 고추 장아찌, 깻잎 장아찌가 태반이다. 고만고만한 우리 네 삶이 도시락 밥상에 펼쳐졌다. 고추장 된장에 고추를 찍어먹어도 여럿이 먹는 그 맛에 술술 잘 넘겼다. 다들 사는 게 거기서 거기라는 얘기다. 그래도 점심식탁위에서 시름을 달래며 동료들과 어울려 된장에 고추 찍어먹으며 두런두런 밥 먹던 때가 그립다. 간간이 동료들 밥 위에 계란 프라이라도 얹혀있으면 입맛 한 번 다시고 나도 다음 날을 기대해보았다. 

지나간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 없지만 어렵던 시절은 지나고 나면 추억으로 남는다. 

우체국 다니면서 농사는 계속 지었다. 그래서 아내 고생이 많았다. 나는 아침부터 우체국 출근한다고 폼을 잡지만 아내는 하루 종일 종종 걸음 치며 표시도 안 나는 일들을 하면서 고단했다. 그래서 7년 전 먼 길 배웅할 때 가슴이 무너졌고 지금도 아침이면 일어나 누웠던 옆자리를 손으로 한 번 씩 쓸어본다. 온기 없는 남은 아내의 자리가 허전하다.

나도 퇴직하고 15년 이상 농사를 지었는데 고생한 아내가 일궈놓은 자리에 숟가락 하나 얹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나는 등기를 발송시키고 배달 우편물 갯수를 검토하고 분류해서 집배원들이 각자 배달하게끔 하는 업무를 했다. 당시 1960년대 후반 우표 붙이는 값이 7원 정도, 월급은 임시직으로 갈 때 20만 원 정도 받았다. 한 달이면 30일인데 그때는 일요일도 월급에서 삭감했다. 일요일 빼면 휴일 20만원 받았는데 그래도 그 돈으로 먹고 살았다.  

그 시절 집배원들은 시골길을 걸어서 큰 마대자루 가방을 매고 다녔다. 걸어 다니면서 이집저집 사연들을 알고 이웃처럼 지냈다. 어느 순간 자전거로 바뀌고 오토바이로 바뀌면서 기동력이 생기고 집배원의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반면 발걸음처럼 인정도 조금씩 가벼워지는 아쉬움도 있었다.
 
“우체국은 봉급도 적었어. 업무 성격상 부정이 있을 수도 없는 곳이라 딱 월급만 갖고 사는거야. 돈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지. 나도 그 봉급으로 애들 키우고 할 거 다했어. 아침이면 각 면에 있는 빨간 우체통에서 수거한 우편물 들이 버스에 실려서 도착을 해. 그 시절에는 버스에 다 실어줬지. 내가 나가서 도착한 우편물을 갖고 오는 업무를 보기도 했어. 시골구석에서도 다들 어디론가 사연들을 보내느라 아침마다 우편물들이 꽉 찼어.

하루는 국장실 2층에 올라갔다 왔는데 기분이 이상해. 등기하나가 없어진 거 같은 거야. 구분함을 확인해보니 이런 정말 등기가 사라진 거야. 군서면에서 온 등기였는데 말이야. 만 원짜리 수표를 끊어서 송금 하는 등기였는데 아 눈앞이 캄캄하데. 잘못되면 내 구역이라 내가 죄다 뒤집어 써야 했거든. 범인은 잡았지만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일하면서 그런 일들 겪는 건 통과의례 같은 일이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더라고 열심히 하다보면 예민한 눈썰미가 따로 생기는 모양이다. 어쨌든 범인 잡고 수표는 다시 발행해서 사고를 면하기는 했어.”

가을걷이 끝난 들판 

인생에도 계절이 있듯이 지금 나도 가을걷이 끝난 들판의 때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당신 나이면 겨울이지’ 라고 말한다한들 아니라고 할 명분은 없다. 하지만 아직 내 삶을 내가 좌지우지 하면서 끌어가고 있다. 어느 날 내 인생의 겨울이 찾아온다면 기꺼이 맞이하고 순응할 것이다.  

옥천 농협 근처에 우리가 노는 경로당 있다. 많을 때는 120명 되는데 지금은 코로나 시국이라 예전 같지 않다. 아직은 오토바이로 들판을 달려 읍내에 갈수 있으니 청춘이다. 경로당에는 90세 넘은 형님들이 여럿이다. 

숨을 헐떡거리며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먼 길을 돌아 그 길을 다시 복귀해보니 하루하루 무심하게 살아왔다. 애간장 녹고 슬픔에 젖었던 일들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던 날들도 다 지나갔다. 이젠 한가로이 뒷짐 지고 마을길을 거니는 이 안락함이 마냥 좋다. 

가을걷이 끝난 들판이 쓸쓸하지 않다. 알곡을 남긴 자리가 주는 평안함이 오늘 나의 자화상이다. 됐다. 이만하면 자존심을 지켰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 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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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김경희 작가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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