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초 제주 4.3 기행길에서 맨 처음 찾은 곳은 <제주 4.3 평화공원>이다

제주시 봉개동 <거친오름> 밑에 자리 잡고 있는 <제주 4.3평확공원> 위령탑이 있는 괃장, 건저 쪽에 보이는 건물이 기념관이다.
제주시 봉개동 <거친오름> 밑에 자리 잡고 있는 <제주 4.3평확공원> 위령탑이 있는 괃장, 건저 쪽에 보이는 건물이 기념관이다.

 

오늘이 제주 4.3이 일어난 지 73주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희생된 수만 명의 영령들을 진혼이라도 하듯이 봄비가 종일 추근추근 내리고 있다. 오늘 추념식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또 참석을 하여 추념사를 하였다.  내리 3년을 빠지고 않고 참석하는 것이다.

 

마침 지난번 국회에서 제주4.3특별법이 개정되어 4.3으로 희생된 분들에 대하여 국가가 보상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물론 유족들은 배, 보상을 요구를 하였지만 유족들의 요구를 백퍼센트 수용하지는 못했지만 그나마라도 보상에 준하다는 특별법 조항도 있어 만시지탄 감은 있지만 다행스럽다.  

제주 4.3평화공원에는 14,400여 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실질적인 희생자는 이보다 훨씬 많아 약 3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주 4.3평화공원에는 14,400여 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실질적인 희생자는 이보다 훨씬 많아 약 3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 4.3 기행에 나선 일행은 위패봉안실에 들러 무참히 희생된 4.3 영령들의 명복을 빌었다. 저 안에는 4.3 때 행방불명이 된 나의 막내 삼촌 이름도 찾을 수 있었다.
 우리 4.3 기행에 나선 일행은 위패봉안실에 들러 무참히 희생된 4.3 영령들의 명복을 빌었다. 저 안에는 4.3 때 행방불명이 된 나의 막내 삼촌 이름도 찾을 수 있었다.
이번 4.3 기행에 함께 했던 작가 중 한 사람인 김자현 시인 겸 소솔가가 방명록에 남긴 추모 글
이번 4.3 기행에 함께 했던 작가 중 한 사람인 김자현 시인 겸 소솔가가 방명록에 남긴 추모 글

 

지난해 12월 초 내가 가까이 지내는 한국작가회의 소속 시인 세 사람과 경남 고성 농민회 간부 두 사람과 함께 제주 4.3 기행을 다녀왔다. 그 이야기를 몇 차례 제주 4.3 기행 형식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요즘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 선생이 쓴 <화산도>를 열독 중이다. 500여 쪽 정도 분량의 책이 12권으로 쓰인 소설이다. 김석범 선생은 이 소설을 통하여  아사히신문의 오사로기지로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지만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제주 4.3이 금기어인 시절에 제주 4.3을 알려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현기영 소설가는 <순이 삼촌>을 통하여 제주 4.3을 알려내는데 큰 역할을 하지만 그로 인하여 보안부대 등으로 끌려가서 많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산하 시인은 <한라산>이란 시집을 발간하여 제주 4.3을 알려내었는데, 그 시집으로 인하여 국가보안법으로 구속이 되어 많은 고초를 당했다고 한다. 그 책은 절판이 되었던 것을 이 시인의 제자들이 출판비를 모아 4.3 항쟁 70주년에  복간을 하였다고 한다.  이산하 시인의 시집 <한라산>의 서시를 가져온다.

제주 4.3항쟁에 대해서는 현기영 선생의 <순이 삼촌>을 비롯하여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 선생의 <화산도>, 이산하 시인의 <한라산> 등 많은 문학 작품들이 있다.
제주 4.3항쟁에 대해서는 현기영 선생의 <순이 삼촌>을 비롯하여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 선생의 <화산도>, 이산하 시인의 <한라산> 등 많은 문학 작품들이 있다.

 

한국 현대사 앞에서는 우리는 모두 상주이다.

오늘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

그 아름다운 제주도의 신혼여행지들은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뜬 별들은 여전히 눈부시고

그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별들과 꽃들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행방불명자들의 비석만 세워져 있는 4.3 행방불명자들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행방불명자들의 비석만 세워져 있는 4.3 행방불명자들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행발불명자 묘역에는 약 4300여 개의 묘비들이 세워져 있다.
행발불명자 묘역에는 약 4300여 개의 묘비들이 세워져 있다.

 

우리 일행이  맨 먼저 찾은 곳은 <제주 4.3 평화공원>이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전시되어 있는 4.3 관련 자료들은 찬찬히 훑어보고, 4.3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위령탑 주변을 둘러보면서 내 막내 삼촌의 이름도 확인하였다. 4.3은 제주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피해자들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른들은 4.3 이야기만 나오면 쉬쉬 쉬쉬하면서 입단속을 하였기 때문에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나로서는 4.3은 먼 나라 이야기쯤으로 알 뿐이었다.

제주 4.3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를 보이콧 하면서 도민들이 선거날 산으로 가는 등의 행동으로 제주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는 국회의원을 선출할 수 없었다.
제주 4.3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를 보이콧 하면서 도민들이 선거날 산으로 가는 등의 행동으로 제주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는 국회의원을 선출할 수 없었다.

 

4.3이 발발하자 희생자를 줄이기 위하여 당시 제주 주둔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왼쪽)과 만나 휴전협정을 맺었으나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의 방해로 휴전은 며칠 못 가서 파기가 되고 무자비한 도별이 이루어지게 된다.
4.3이 발발하자 희생자를 줄이기 위하여 당시 제주 주둔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왼쪽)과 만나 휴전협정을 맺었으나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의 방해로 휴전은 며칠 못 가서 파기가 되고 무자비한 도별이 이루어지게 된다.
김익렬과 김달삼의 휴전협정을 깨기 위하여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이 오라리 방화사건을 일으켜 무장대의 짓이라고 하면서 휴전은 깨지면서 제주도민들은 대대적인 토벌 작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김익렬과 김달삼의 휴전협정을 깨기 위하여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이 오라리 방화사건을 일으켜 무장대의 짓이라고 하면서 휴전은 깨지면서 제주도민들은 대대적인 토벌 작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던 것이 70년 세월이 흘러 이제는 4.3에 대하여 말할 수 있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사과를 하고, 추념일로 지정하여 추념한다는 것은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화산도>를 읽어보면 당시 제주도의 실정을 잘 알 수 있다. 당시 제주사람들은 일제 때 일본 관서지역의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며 많은 제주인들이 진출해 있었다. 그 수가 15만 명 정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렇게 일본에 진출해 있던 제주인들 중에는 공장 노동자에서부터 징용으로 끌려갔던 사람들, 또 그중에는 일본에서 중, 고교를 나오고 대학을 나온 인텔리들도 많았다.

 

이 사람들이 해방이 되어 6만 명 정도가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들이 바라던 해방은 자주적인 남북의 통일 정부였다. 하지만 미군정은 3.8선 이남에서 친미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이런 미국의 의도와 이승만의 집권욕이 맞아떨어지면서 5.10 선거를 통하여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려고 하니 제주 남로당이나  많은 지식인들이 이에 반대를 하였다. 

 

일제 때는 공출을 통하여 제주에서 생산되는 보리 등 곡물들을 공출해 갔는데, 미군정 하에서도 이런 공출이 중단되지 않으면서 미군정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제주도민들 사이에서는 크게 확산되고 있었다. 거기에다 콜레라가 돌아서 제주도민들 4백여 명이 사망을 하는 등 민심이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이 47년 삼일절  날 관덕정과 북국민학교 등에 3만 명이 모인 기념대회에서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밟혀 죽는 사건이 일어나 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경찰서로 몰려가는 도민들을 향해 총을 쏘아 6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제주 전역에서 노동자, 회사원은 물론, 공무원, 교사, 경찰까지도 가세하는 총파업에 들어가면서 미군정과 경찰이 나서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일었다. 제주도 전역은 긴장 상황이 확산되면서 미군정에 대한 저항과 친일 경찰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 등이 끊이질 않았다.

 

더구나 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의 횡포 등 지역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흉흉해졌다. 거기에 남한만의 단독 선거 반대를 위해서 선거 거부 운동이 확산되면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2개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뽑지 못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미군정과 경찰 등에 쫓기는 사람들 중 일부가 한라산으로 들어가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제주 전역에서 봉화불이 오르면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단  간부 집 등을 습격을 하면서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들어간다.

미군정이 브라운 등을 내세워 진두지휘를 하며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면서 제주는 한국판 킬링필드가 되고 만다.
미군정이 브라운 등을 내세워 진두지휘를 하며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면서 제주는 한국판 킬링필드가 되고 만다.

 

이에 대하여 미군정은 강력한 진압 작전에 나선다. 4.3 초기에는 제주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제9연대의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김달삼 사령관 간의 협상에 의하여 며칠간 휴전 상태에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 서북청년단 등이 오라리 방화 사건 등을 일으키면서 협상, 휴전은 결렬이 되었다. 김익렬 연대장은 제주를 떠났고, 박진경 연대장으로 교체되어 강경 일변도의 진압이 이루어진다. 그러자 이를 못마땅히 여긴 문상길 중위 등이 잠자는 박진경 연대장을 사살해 버린다 .

 

육자에서 군인과 경찰들이 내려와 제주 전역으로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이루어지면서 무장대가 아닌 무고한 앙민들까지 무자비하게 학살을 하여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된다.  약 3만 명에 이르는 제주도민들이 희생을 당하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판 킬링필드이며 독가스만 없었지 아우슈비츄나 다름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지금 4.3평화공원에 위패가 모셔진 분들은 14,400여 명이지만 일가족이 몰살이 되어 희생자로 신고를 할 수 있는 가족조차 없는 피해자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서 문형순 경찰서장과 같은 양심적인 경찰서장은 상부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보도연맹 구속자들을 사살하지 않아 많은 인명을 구하기도 하였다. 이런 미담 사례는 몇 가지들이 있다.
이런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서 문형순 경찰서장과 같은 양심적인 경찰서장은 상부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보도연맹 구속자들을 사살하지 않아 많은 인명을 구하기도 하였다. 이런 미담 사례는 몇 가지들이 있다.

 

이런 참살의 현장 속에서도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더 살려보려고 노력했던 경찰 간부, 구장, 심지어 서북청년단원 중에도 있었다는 미담들도 4.3평화공원에는 자료로 남겨져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내 초, 중학교 동창 친구의 아버지가 토벌대가 쏜 총탄에 골반 쪽이 관통을 한 다음 그를 끌어안고 있는 어머니의 종아리에 탄알이 박혔다는 사진 자료를 보면서 4.3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나와 내 이웃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 분들의 명복을 빈다. 다시는 이 땅에 이런 학살의 야만이 일어나지 않도록 전 국민의 뜻을 모아 민주주의 사수하고 4.3 항쟁 당시 이루고자 했던 통일된 자주국가가 하루속히 이루어지길 기대해 마지않는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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