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산

어릴 적에 겨울방학 때면 둥구리(등걸)와 삭다리(삭정이)를 캐기 위해서 괭이와 톱을 망태에 넣고 아홉재를 넘곤 했다. 여름방학 때는 매일같이 산골짝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동네 아이들과 함께 소를 쳤다.

마을 앞 강은 고기 잡고 멱감고 얼음 지치며 노는 놀이터이기도 했지만, 산에서도 그 못지않은 놀이터였다. 산토끼도 몰고 진달래도 꺾고 칡도 캤다. 산과 강이 추억이 깃든 같은 놀이터였는데도 지금 고향의 강은 너무도 많이 변해있다.

강바닥은 하천 정비를 구실로 한 모래와 자갈 채취로 암반이 훤히 드러나 있다. 그래서 강물이 머물 곳이 없어져 조그만 실개천처럼 변해 있다. 강가 모래와 자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물이 흐르던 자리에는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성한 잡풀이 넓게 자리 잡고 있다. 강은 사람들에게 이용가치가 있어서인지 너무나 쉽게 훼손됐다.

그래서 강가에서 뛰어놀던 추억은 머릿속에만 있을 뿐 그 어디에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미루어 짐작해보면 앞으로도 강은 사람들 때문에 계속 훼손되고 변화할 것같다.

그러고 보면 산 만큼 변하지 않고 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이 또 있을까? 항상 거기에 그대로 우뚝 서 있다. 우리가 사는 집도 나름 변하지 않고 견고하다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수리를 해야 하거나 세월이 지나면 결국 무너져 사라진다.

바위나 돌도 마찬가지다. 비바람에 씻겨 모양이 변하고 낮은 곳으로 끊임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도 생로병사를 피할 길 없다. 얼마나 오랫동안 저 산은 저렇게 서 있었을까? 몇 세대를 걸쳐 사람들은 저 산을 쳐다보고 또 오르내렸을까?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산을 증언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자기 자신 외에는. 아마도 생명이 탄생하기 한참 이전부터 산은 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지 않았을까? 인간에게 있어서 산은 무엇일까? 지금 당장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존재일지도 모르겠지만 만일 지구상에 산이 없고 평지만 있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진다. 해는 멀리 지평선을 넘어 천천히 지고, 일조량은 많아져서 농사는 더 잘 될 것 같다. 도로는 적은 비용으로 일직선으로 만들어져 더 편리해지고 개발은 더 빨라져 물질적으로는 더 풍요로운 세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환경은 더 빠르게 파괴될 것이다. 평지에 양쪽으로 비탈과 계곡을 이루고 우뚝 솟아 있는 산의 면적과 그렇지 않은 평지 면적을 비교해 보면 거기에서 자라나는 나무나 거기에 깃든 생명의 규모는 서로 비교 대상이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생존에 필요하다고 당장 지리산, 한라산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천만 다행히도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과 산의 인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닌가? 한때는 맹수들을 피해서 나무 위에 집을 짓고 나뭇잎과 열매를 따 먹으면서 살았을 것이다. 이미 그때부터 인간의 핏속에는 산을 고향처럼 여기는 DNA가 새겨져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힘들 때면 산에 올라가서 고함도 질러보고 산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마음의 안정을 얻는지도 모른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산은 항상 그 자리에서 인간세계를 내려다보고 서 있을 것이다. 나는 자석에 이끌리는 무쇠처럼 산에 이끌리어 산 어디쯤엔가에 항상 머물고 있기를 바래 본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이강근 주주통신원  lplove1993@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