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냉이골>을 찾아 속냉이골 무장대 무덤의 사연 등을 알게 되다

4.3 때 무장대와 국방경비대의 전투에서 수십 명의 무장대가 전사하여 그 시신이 방치되었던 <속냉이골>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
4.3 때 무장대와 국방경비대의 전투에서 수십 명의 무장대가 전사하여 그 시신이 방치되었던 <속냉이골>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 있는 속냉이골은 1949112일 의귀국민학교 전투에서 사망한 무장대의 시신이 집단 매장된 곳이다. 때마침 4.3,  73주년을 맞이하여 문정현 신부 등 강정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하는 분들이 <속냉이골>을 찾아 참배했다는 SNS 소식도 들려온다.

한국작가회의 소속 작가 4인과 고성농민회 간부 등 6명의 제주 4.3 기행팀이 둘째 날 찾은 곳은 4.3 학살지인 정방폭포 인근의 <소남머리>를 거쳐 남원읍 의귀리에 있다는 <속냉이골>(송령이골 등으로 불리기도 함)을 찾았다. 그 위치를 정확히 몰라서 인터넷 검색을 하고 현지에 가서는 지역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갔다. 찾기가 쉽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2004년 5월 14일 도법 스님 등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이 세워놓은 안내판
2004년 5월 14일 도법 스님 등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이 세워놓은 안내판

남원읍 의귀리 1931-1번지 일대의 지역이다. 현장을 찾아 도착해 보니 산담을 두르지도 않은 초라한 무덤 두 개가 몇 그루의 소나무 밑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무덤 앞에는 도법 스님의 <생명평화 탁발 순례단>이 이곳을 찾아 성묘를 했다는 안내판 등이 있다. 이곳은 <속냉이골>로서 4.3 때 국방경비대와 무장대가 치열한 교전을 벌이다 죽어간 무장대들의 시신이 방치되었던 곳이다. 군인들은 그들의 주검을 "빨갱이다"라며 주민들을 시켜 인근의 밭에 던지고 몇 줌 흙으로 대충 덮었다고 한다.

제주4·3 당시 각 급 학교는 군부대 혹은 응원경찰의 주둔지로 많이 이용됐다. 1941년 간이학교로 출발해 1943년 정식 학교로 승격한 의귀국민학교에도 19481226일부터 1949120일까지 제2연대 1대대 2중대가 주둔했다고 한다.

실제 2중대원으로 이곳에 근무했었던 이윤의 진중일기에 따르면 1대대 2중대는 19481216일 제주에 들어와 1226일 이 곳 의귀리에 주둔을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2중대는 학교 주변에 4개의 초소를 세우고 옥상에는 기관포를 설치했으며 주위에는 모래 가마니로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토벌이 본격화되면서 이들은 매일같이 주변 수색에 나섰고 마을 주변의 숲이나 궤에 숨어 있는 주민들을 발견하면 즉시 총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거나 사로잡힌 주민들을 붙들어와 학교 건물에 수용했다. 또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소문을 들은 이 일대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2중대로 귀순하여 수용됐다.

이들 주민을 구출하려고 했는지 몰라도 1949112일 무장대로부터 습격을 받아 4명의 전사자를 내기도 했다. 무장대는 이보다 훨씬 많은 피해를 입었다. 주둔부대 군인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국민학교에 수용됐던 주민 수십 명을 집단 총살했다(출처; 다음 카페, <담양전씨 운경가족>)

<속냉이골>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
 <속냉이골>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

제주환경일보 2019415일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흥분한 군인들이 수감자들을 끌어내 같은 장소에서 80여명을 총살한 참혹한 학살극이 벌어졌다. (제주의 소리 200458)이윤의 {진중일기}에는 "오늘, 이 전투에서 우리 중대는 안중사 이하 4명이 전사했고(실제 사망자-일등상사 문석춘, 일등중사 이범팔, 이등중사 안성혁, 이등중사 임찬수 4-역자 주) 5명이 부상하는 피해를 본 반면, 반도들은 사살 96, 생포 14, 소총 60정과 도검류 다수와 놈들의 기밀문서 등을 노획했다"라고 밝히고 있다여기서 밝히고 있는 사살 숫자는 의귀국민학교에 수용했다가 총살한 일반주민과 무장대의 숫자를 합친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정확치는 않다. 어쨌든 무장대 측의 피해가 컸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소나무 숲 속에 방치되어 있던 무장대의 시신들이 묻혀 있는 산담도 없는 무덤이 도법 스님 등이 벌초를 하고 안내판을 세우는 등 수습을 한 이후 4.3 관련 단체 등이 벌초와 참배 등을 하고 있다고 한다.
소나무 숲 속에 방치되어 있던 무장대의 시신들이 묻혀 있는 산담도 없는 무덤이 도법 스님 등이 벌초를 하고 안내판을 세우는 등 수습을 한 이후 4.3 관련 단체 등이 벌초와 참배 등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에서도 추모하는 비석을 세워놓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에서도 추모하는 비석을 세워놓고 있다.

1949114일자 미군정 정보보고서(G-2보고서)에는 "200여명의 폭도가 112일 새벽 630분에 제주도 의귀리에 주둔하고 있는 제2연대 2중대를 기습했다가 패배했다. 2시간의 접전 끝에 폭도는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퇴각했다반면 한국군은 2명 사망, 10명이 부상했다. 폭도로부터 M-1소총 4, 99식 총 10, 카빈총 3정을 노획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이들의 시신은 학교 옆에 아무렇게나 방치됐다가 이곳 속령골에 집단 매장되었다. 부패로 악취가 심해져 가자 군인들이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처리했던 것이다. 이후 돌보는 사람이 없이 최근(2004)까지 방치되어 있었다.“(출처; 제주환경일보, 2019415일 기사)

우리 일행 중에 한 사람이 무덤 앞에 앉아서 처연했던 4.3의 아픔을 더듬고 있다.
우리 일행 중에 한 사람이 무덤 앞에 앉아서 처연했던 4.3의 아픔을 더듬고 있다.

이렇게 방치되던 이 무덤은 2004514'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이 이 지역을 지나면서 표지판과 자그마한 방사탑을 세워 놓았다. 그날 생명평화탁발순례단(단장 도법 스님)은 제주4.3연구소, 현의합장유족회 등과 더불어 이곳을 벌초하여 표지판을 세우고 천도재를 지냈다 한다. 지금은 매년 815일에 4.3 관련 단체 등이 벌초와 성묘를 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도법 스님 등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이 이곳을 찾아 벌초를 하고 천도재를 올리고 세운 푯말의 내용이다.

모든 생명은 존엄한 것이다.

옛말에 '적의 무덤 앞을 지나더라도 먼저 큰절부터 올리고 가라'고 했다.

바로 이 곳은 제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43사건'의 와중에 국방경비대에 의해 희생된 영령들의 유골이 방치된 곳이다.

당시 국방경비대 2연대 1대대 2중대는 남원읍 중산간 마을 일대의 수많은 주민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의귀초등학교에 수용하고 있었다. 1949112(음력 481214) 새벽 무장대들이 내습, 주민피해를 막아보려 했지만 주둔군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희생되고 말았다. 이 때 희생된 십수 명의 무장대들은 근처 밭에 버려져 썩어가다가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곳에 묻혔지만, 내내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덤불 속에 방치돼왔다.

우리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은 우익과 좌익 모두를 이념대립의 희생자로 규정한다. 학살된 민간인뿐만 아니라 군인·경찰과 무장대 등 그 모두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때 희생된 내 형제 내 부모였다.

'평화의 섬'을 꿈꾸는 제주도. 바로 이곳에서부터 대립과 갈등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우리 순례단은 생명평화의 통일시대를 간절히 염원하며, 모성의 산인 지리산과 한라산의 이름으로 방치된 묘역을 다듬고 천도재를 올리며 이 푯말을 세운다.

2004513

생명평화 탁발순례단 일동

<속냉이 골>을 둘러본 다음 인근에 있는 <현의합장묘>를 찾았다. 이곳 역시 '백조일손지묘'와 같이 4.3 때 희생당한 분들 여럿이 한 곳에 시신이 묻혀있는 곳이다.
<속냉이 골>을 둘러본 다음 인근에 있는 <현의합장묘>를 찾았다. 이곳 역시 '백조일손지묘'와 같이 4.3 때 희생당한 분들 여럿이 한 곳에 시신이 묻혀있는 곳이다.

우리 4.3기행팀은 제주 4.3 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무장대들이 많이 희생이 되었지만, 그의 보복으로 의귀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많은 민간인들이 토벌대에 의하여 학살되었다는 사실에 무거운 마음을 안고 <현의 합장묘>로 향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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