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채복선이란 전복을 채취하여 임금에게 진상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배다.

1875년의 기록을 보면 진상 채복선(進上採鰒船)이 47척이 되었고, 침복선(沈鰒船)이 1척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침복선은 각 군영마다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먼 곳까지 가지고 가야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침복선이란 잡아 올린 전복을 살리기 위해 배에 물이 차도록 하여 전복을 살리려고 만든 배를 말한다.

당시에는 전복이 자연산 밖에 없었고 단가마저 높아서 서민들은 먹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금에게 진상을 하려고 전복이 많이 생산되는 완도 같은 지역의 수군에게 명령을 하여 진상을 했다.

살아있는 전복으로는 부족했던지 1864년 7월 24일자 기록을 보면 8월에 반건복(半乾鰒), 숙복(熟鰒, 삶아서 익힌 전복), 건복(乾鰒), 전복젓(全鰒鮓), 소금에 절인 전복 등을 보내라는 기록들도 있다. 전복으로 참 다양한 요리를 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때도 적조가 있었던 것 같다. “바닷물이 갑자기 흐려져서, 채취하여 살아있는 채로 둔 전복(全鰒)이 모조리 죽어서 물에 떴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별도로 군관(軍官)을 보내어 상세히 조사하였더니, 물의 색깔이 붉고 흐린 것과 산 채로 둔 전복이 모조리 죽은 것이 정말로 적실(的實)하였고, 추후에 도착한 울산 부사(蔚山府使) 김준근(金俊根)의 첩정(牒呈)에, “본부(本府)의 각 포(浦)에 이달 22일부터 바닷물이 붉게 흐리고 어산(魚産)이 죽어나왔으니 틀림없이 해독(海毒)입니다.”라고 보고했던 것을 보면 당시에도 적조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고 하겠으나 전복이 죽어서 모두 물에 떠올랐다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전복이 죽으면 가라앉는데 어떻게 떠올랐다는 표현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전복사진
전복사진

연산군 11년 7월 24일의 기록에는 “왜전복(倭全鰒)이 있다 하니, 사서 바치도록 하라. 이 물건 뿐 아니라 모든 특이하게 맛난 것은 널리 구해서 바치라.”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기록도 있다.

왜의 전복 맛은 어떤지 보려고 그랬을 것이지만 어민들의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했던 군주가 지금은 없는지 모르겠다.

선조21년 11월 17일의 기록에는 참으로 황당한 일이 있었다.

전라도 좌수영 진무(全羅道左水營鎭撫) 김개동(金介同)과 이언세(李彦世) 등이 지난해 봄 손죽도(損竹島) 싸움에서 왜노(倭奴)에게 잡혀가 남번국(南蕃國)에 전매(轉賣)되었다가 중국 지역으로 도망쳐 조사를 받고 북경(北京)으로 이송(移送)되었는데, 이번에 사은사 유전(柳㙉)이 돌아오는 길에 딸려 보내왔다. 김개동 등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했다.

사화동(沙火同)이란 자는 우리나라 진도(珍島) 사람으로 왜노에게 잡혀가 온갖 충성을 다한 자라고 했다.

저에게 이르기를 "이곳은 풍속과 인심이 매우 좋아서 거주(居住)할만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조선은 부역(賦役)이 매우 고되고 대소(大小)의 전복(全鰒)을 한정 없이 징수(徵收)하여 감당할 길이 없으니, 이곳에 그대로 거주하라고 했다.

지난 연초(年初)에 마도(馬島) 가리포(加里浦)를 침범하려다가 바람이 불순하여 손죽도(損竹島)에 정박하였는데, 이는 내가 인도해 준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가 거주하는 섬 이름은 오도(五島)로 둘레가 며칠 길이 되고 인구가 꽉 들어차 하나의 큰 고을[州]과 같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생포된 자들이 많았고 배 5백여 척이 있었는데 전라우도(全羅右道)의 복병선(伏兵船) 전부를 나포하였기 때문에 궁전(弓箭)과 총통(銃筒)까지 다 가져갔으나 쌓아 두기만 하고 사용할 줄을 알지 못하여 아이들의 장남감이 될 뿐이었습니다.”

이 기록으로 본다면 사화동(沙火同)이란 사람은 친일 중 친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다만 당시에 전복을 진상하려고 얼마나 힘이 들어서 그런 말을 하였는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정조는 정조 22년(1798) 7월 7일의 기록에서 진상하는 전복(全鰒)을 다른 지역에서 사서 바치는 폐단은 즉시 바로잡고 나머지 각 고을의 이와 같은 폐단은 일체 바로잡으라고 명하였다.

진상하는 날자를 마추지 못하면 혼이 날 것 같아 다른 지역의 전복을 사다가 바치는 일도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전복이 이제 양식을 한다.

전복은 지금도 고가의 식품으로 국민들이 선호하는 것 중 하나다. 좀 비싸기는 하지만.....,

완도가 한 때는 김으로 국가의 경제초석이 되었었으나 이제 전복이 2020년 말 기준 총 생산량이 14,411톤이고, 금액으로는 5천 4십 4억 원이나 된다.

다른 해조류 양식까지 합한다면 소득이 아주 높아 전국 제일의 수산군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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