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 가꾸기 사업은 대부분이 육체노동이다. 서울교육인생이모작지원센터의 사업 가운데 규모와 조직이 가장 크다. 상대적으로 기대와 각광을 받고 있지만, 어느 정도는 신체적 고초를 감내해야 한다. 사시사철 교실 밖, 교정에서 풀과 나무와 흙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서울 마포구에 있는 용강초교로 간다. 39년생, 42년생, 48년생 등 남자 세 분, 그리고 53년생인 나와 갑장인 여자 한 분, 이렇게 퇴직 교사 다섯이 한 팀이다.

‘밥보샘, 아무래도 오늘은 연로한 형님들 모시고 힘 좀 쓰시겠다!’

 

아침 8시 좀 못 미쳐 집을 나선다.
기차를 타려면 왕복 2차로인 이면도로와, 왕복 6차로인 일반도로를 가로질러야 한다. 각각 두 개의 횡단보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서면 풍산역이다. 계단이 보이면 괜히 맘이 더 급해진다. 날마다 지원 대상 학교가 다르기 때문에 타야 할 차량이 정해지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메모해 둔 운행 시간표를 곧잘 잊는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뛰면 덩달아 쫓아간다. 집에서부터 빠른 걸음으로 십이삼 분 거리다. 숨을 헐떡이며 개찰구에 다다르니 제법 많은 사람이 나오고 있다. 너나없이 맘이 급한 출근 시간, 앞에서 뛰어가던 이도 허탈한가 보다. 바람을 가르며 떠나는 차량을 바라본다.

 

용청덕팔용지서!
용산•청량리•덕소•팔당•용문•지평•서울역 등 풍산역을 경유하는 하행선의 행선지이다. 평일에 가장 많이 배차하는 시간은 06~07시대로, 시간당 7~8회 운행한다. 그만큼 가장 붐비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주로 08시대 차량을 이용한다. 모두 5대로 06, 16, 33, 46, 54분에 출발하는데 목적지가 다르다. 다행히 나는 어느 차를 타도 괜찮다. 갈아타면 어디든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전광판을 보니 기차는 금촌역에서 대기 중이다. 15분쯤을 더 기다려야 한다. 홈 대합실에 앉아 있다가 빠른 환승을 위해 8-4 자리를 찾아간다. 가다 말고 벽면에 게시된 액자 글을 본다. 두 편이다.

 

모든 것은 분리된 것이 아니기에
나와 너 가운데 한 사람이 잘못되면
우리는 함께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 풍경소리 -

 

아버지에게 당신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내가 무엇을 했다고’라고 했다.
‘아버지가 하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내가 응수하자 아버지는 한숨을 쉬듯 내뱉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살아냈을 뿐이다.’ - 교통문화선교협의회 -

 

스님 글과 목사님 글이 나란히 걸려 있다. 여기에도 인위적인 안배가? 순간적으로 액자를 건 단체와 글을 쓴 의도를 떠올린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글의 참맛을 느끼고 가슴에 담으면 그만인 것을. 서울 나가면 역사마다 몇 편의 공모 시를 안전문에 게시하고 있다. 꾸밈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아름답고 간절하다. 짧은 시간, 삶을 되돌아보는 넉넉함이 있다. 풍산역은 그런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변방이다. 그러려니 하고 지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참 좋다! 고맙다. 기왕이면 귀퉁이 벽면 말고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두면 좋겠다.

 

10여 분 기다려서 다음 차를 탄다. 감히 앉을 자리를 바라는 건 탐욕이다. 문간이든 칸막이든 기댈 수 있는 벽 가까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다. 20여 분 뒤에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서 내린다. 다시 기다리기를 몇 분, 6호선 봉화산행으로 갈아탄다. 10여 분 뒤에 대흥역에서 내린다.

 

20여 분 정도 여유가 있다. 느긋하게 화장실에 들어선다. 소변기 앞에서 바지 지퍼를 내리려다 말고 좌우를 살핀다. 아뿔싸! 집에서부터 이렇게 열어젖히고? 다행이다. 아무도 없다. 무안하다. 화끈화끈 달아오른다. 앞뒤 가리지 못하고 더뻑거리다 보니 그런 망신을 자초하지……. 기차 속에서는 그래도 얼굴만 겨우 빼꼼히 내밀고 왔으니 안심이다. 갈아탈 때도 부리나케 걷느라 누군들 눈여겨보았을 리가 없다. 설령 누가 지나가다 본들, 키는 작지 배는 뽈록하지 이마가 뒤통수까지 이어진 늙은이가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는가. 그저 연민의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겠지. 스스로 위안하며 거울을 본다.

 

“니네 아빠는 모자 하나 똑바로 못 쓴다니까. 어디 가서 아들딸 그만 우세시키고 제발 거울 좀 보고 다녀요.”
그끄러께 봄, 아내가 몇 번을 재다가 큰맘 먹고 사 주면서 내지른 말이다. 듣고 있던 딸이
“우리 아빠, 십 년은 더 젊어졌네.”
하더니 똑바로 씌워 주던 모자다.

밤이나 낮이나 주구장창 쓰고 다녔다. 땀받이 밴드부터 차양까지 땀으로 얼룩덜룩해진 모자가 여전히 빼딱하다. 구조적인 신체 결함 탓인지도 모른다. 똑바로 헤엄을 치는데 나도 모르게 왼쪽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간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중고교 시절, 무거운 책가방을 주로 왼손으로 들고 다녔다. 그래서일까? 겉보기엔 사지백체(四肢百體)가 멀쩡해 보이지만, 나는 사실 척추가 활처럼 휘고 왼쪽 어깨가 상당히 올라간 기형이다. 총각 때 무슨 멋으로 양복을 지어 입었는지 모르지만, 가봉을 할 때마다 꼭 오른쪽 어깨에 뽕을 넣어 주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때꼽짜구 덕지덕지 눌어붙은 모자를 여미고 보니, 난데없는 산신령 눈썹 두 가닥이 나불거지고, 안경 너머 짝눈은 게슴츠레한데, 허연 코털은 서너 개가 삐죽 비져나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제대로 밀지 않은 잔털이 군데군데 더부룩이 드러나고, 목에는 굵고 성긴 핏줄이 도드라진 채 웬 목주름은 그리도 많은지 거미줄처럼 가로세로 자글자글 얽혀 있다. 영락없이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추레한 늙은이다.

 

절로 쓴웃음이 나온다. 허겁지겁 역사를 빠져나왔다. 누구 한 사람 거들떠보는 이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바삐 오가고, 바깥세상은 눈이 부시다. 남이 볼 새라 다시 한번 바지 궤춤 추스르고 당당하게 걸어간다. 누가 날 알아본다고, 나를 알아보는 이는 나밖에 없는걸! 걱정도 팔자라더니 아침부터 괜한 망상에 젖었던 게지. 휘파람을 불며 교문을 들어선다.

 

그린에듀교육지원단은 200여 명의 퇴직 교직원이 함께 교정가꾸기사업을 펼치고 있다. 서울교육인생이모작지원센터(센터장 : 신입철) 산하 최대 조직이다. 2021년 6월 현재 지원 대상 학교는 73교의 초중 학교로, 1인당 평균 주 3회 활동한다. 사진은 지난 5월 27일, 서울발산초교에서 활동하는 모습.
그린에듀교육지원단은 200여 명의 퇴직 교직원이 함께 교정가꾸기사업을 펼치고 있다. 서울교육인생이모작지원센터(센터장 : 신입철) 산하 최대 조직이다. 2021년 6월 현재 지원 대상 학교는 73교의 초중 학교로, 1인당 평균 주 3회 활동한다. 사진은 지난 5월 27일, 서울발산초교에서 활동하는 모습.

 

편집 :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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