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순 1938년

어르신 댁 대문을 들어서자 바로 눈에 띄는 건 처마 밑에 나란히 걸린 호미 세 자루였다. 티끌 하나도 묻지 않은 호미는 반짝반짝 윤이 났다. 어르신의 애정이 담긴 말씀이 이어져서 뭉클했다.
“365일 내내 새벽부터 텃밭 가꾸느라 수고한 녀석들인데 세수를 깨끗하게 시켜줘야지.”

소리 없는 미물들까지 살뜰히 보살피시는 어르신, 그 마음 하나로도 어르신이 풀어주실 추억 보따리, 애틋한 기억들이 기대됐다.


■ 딸 부잣집, 흑백사진 속에서는 허물, 컬러사진 속에서는 자랑거리

죽향국민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집안 농사를 돕다가 열아홉 살에 동이면으로 시집을 갔다. 고생문이 훤한 집으로 시집을 간 것도 부족해서 나는 줄줄이 딸만 낳았다. 첫딸을 낳고 살림 밑천이라 좋았다. 둘째 딸은 서운했지만 셋째는 아들을 낳고 싶었다. 아, 하지만 셋째도 딸을 낳았다. 6촌 동서랑 비슷한 시기에 출산했는데 동서는 아들만 쑥쑥 낳고 있었다. 딸 낳는 게 내 죄도 아니건만 죄인처럼 몸 둘 바를 몰랐다. 밖에서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면 모여서 내가 또 딸을 낳았다고 숭(흉)보는 건 아닐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넷째 출산, 온몸의 뼈마디가 다 부서지는 고통이 지난 후에 기진맥진한 내 귓가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째 울음소리가 딸들보다 더 우렁찬 거 같기도 하고, 남편이 손 하나를 못 쓰니 우리 집은 더더군다나 아들이 많아야 농사라도 지어서 먹고살 텐데 …

“동서 아들이야 아들 아들이라고”

눈물은 그칠 줄 몰랐고 나는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죄인처럼 지내온 시간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것 같았다. 우리 아들 영욱이는 그렇게 내 애를 태우다가 우리 집 넷째로 태어났다. 큰딸 영신이도 남동생 본 날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착한 것이 내가 줄줄이 여동생을 낳았더니 지도 괜히 기가 죽어서 속을 끓이고 있었다. 영자 영숙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영욱이는 그렇게 온 식구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남편도 점잖은 양반이라 아들을 언제 보게 될까 내내 마음만 졸였을 텐데 영욱이가 태어나면서 한시름 놓았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남편은 딸들한테는 천하 없이 자상했다. 그 시절이야 아버지들이 술 한 잔 들이켜면 딸들한테 이년 저년 소리 내지르는 건 흉도 되지 않았다. 그 틈에 남편은 딸들한테 지지배 소리를 한번 안 했으니 다정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남편 회갑 때, 딸 부잣집 풍경
남편 회갑 때, 딸 부잣집 풍경

■ 고단한 시골 아낙, 밤새 누에 밑 가리고 물옴 잡히다

1953년 휴전 이후 전쟁이 할퀴고 간 우리 땅은 끼니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 시점에 집마다 누에고치 농사를 시작했다. 우리 부부도 누에고치 농사를 지어서 아이들 학교에 보내고 살림을 꾸려나갔다. 밤새 누에 밑 가리고 새벽에는 텃밭 일구고 낮에는 모심느라 24시간의 8할은 일하느라 몸이 고단했다. 365일 내내, 쉴 틈에 살림하고 아이들 돌보느라 쪽잠을 청하기 일쑤였다. 앉으면 꾸벅꾸벅 졸고. 고생 안 시킨다고 첫날밤에 약속한 남편의 호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큰 동서는 내가 졸고 있으면 간간이 지청구했는데 누에 치고 모 심느라 몸을 가누기 힘들 때가 다반사였다.

누에는 깨끗한 뽕잎만 먹고 자라는 애들이라 고추밭에서 농약이라도 날아와 우리 뽕밭을 스치기만 해도 금세 누에들이 알아차린다. 잘 자라지도 않고 애를 먹인다. 우리 애들이 학교 다녀와서 잠실에 들어가서 누에도 치고 먹이도 챙겨주느라 다들 애썼다. 간간이 잠실에서 잠들어 있는 딸내미들을 보고 있으면 자는 걸 깨우자니 안쓰러워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에똥이 잔뜩 있어도 너무 졸려서 그 방에서 잠들어 있는 딸내미 보면 어린 거까지 고생시키니 애미 속은 다 타들어 갔다. 그래도 군말 안 하고 엄마 일손 돕는 우리 애들은 참말로 착했다. 우리 친정어머니도 뽕도 잘 따고 일도 많이 하셨다. 뽕잎을 딸 때도 내가 반 포대 하는 동안 어머니는 한 포대씩 땄다. 뽕 농사는 둘째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했으니까 근 20년은 농사를 지었다. 온 가족이 십시일반 일손을 보태면서 누에 농사를 짓느라 다들 애 많이 썼다.

정작 힘든 건 누에 치는 것 보다 모심고 다리에 물옴이 생길 때였다. 밤이면 다리가 퉁퉁 부어서 걷기도 힘들었다. 그때는 장화도 딱히 없어서 시원찮은 양말 신고 들어가면 거머리에는 안 물리지만 물에 젖은 양말은 물옴이란 녀석한테는 못 당했다. 살가죽이 부풀어 올라 속에 물이 잡힌다. 추측해 보건대 외양간 오물이며 농약들이 물 댄 논으로 흘러올 수밖에 없다.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독소가 만들어졌을 거다. 그래서 우리는 모내기 철에 물옴으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살이 얇아서 물옴이 올라 밤마다 퉁퉁 부은 다리를 달래느라 힘들었다. 피부는 울긋불긋, 간지럽고 긁기라도 하면 더 부어올라 종아리가 허벅지만 해졌다. 그 시절 고생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참으로 사는 게 고역이었는데 딱히 방도가 없어 미련하게 또 그렇게 하루하루 보냈다.

누에고치 치던 방(잠실)에서 남편과 함께
누에고치 치던 방(잠실)에서 남편과 함께
누에고치 치던 방(잠실)에서 남편과 함께
누에고치 치던 방(잠실)에서 남편과 함께


■ 남편의 그림자, 달빛 아래 숨기 놀이 하는 8남매 그리고 아버지

누에를 치던 우리 집 뒤꼍은 뽕나무밭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김치에 된장찌개 한 그릇으로 밥 한 공기 뚝딱 비우며 저녁상을 물렸다. 8남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쪼르르 달려나갔다. 어느새 남편도 막내를 업고 아이들 무리에 끼어 신이 났다. 그날도 숨바꼭질하느라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뒤꼍으로 나가자마자 깔깔대는 웃음소리에 같이 살던 친정어머니는 ‘’딸만 잔뜩 낳아놓고 뭐가 좋다고 저리 신이 났냐 망신스럽다“ 며 혀를 끌끌 차셨다. 내심은 사위가 든든하고 고마웠을 게다. 어머니 입가의 미소가 이미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천하의 호인이던 남편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슬며시 올라가 보면 아이들은 달빛이 드리운 그림자 뒤로 요리조리 잘도 숨었다. 꼭꼭 숨은들 남편 손바닥 안이지만 그래도 숨어보겠다고 뽕나무 잎 사이로, 언덕배기 수풀 속으로 … 한 녀석 한 녀석 남편 손에 붙들려 나올 때마다 까르르까르르 다들 더 신났다.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소리가 저 멀리 안동네까지 넘어갔다.

■ 희로애락의 올가미, 세월의 나이테를 쌓다

공짜도 싫어하고 대충하는 것도 싫어하는 나는 살아오는 내내 야무지고 똑소리 난다는 말을 듣고 살았다. 40년 전쯤인가 이웃 아낙들이랑 포도밭에 가서 포도송이 한 아름씩 사 들고 왔었다. 과수원은 타과들이 많아서 이웃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가지를 잘 못 만나 떨어지기도 하고 이런저런 사연으로 타과가 된다. 타과가 단맛도 더 있고 먹는 데는 지장이 없다. 과수원 주인장들은 덤으로 타과를 얹어주기도 한다. 그날도 포도 사러 갔다가 타과가 된 포도들을 굳이 주인이 가져가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챙기고 있었다. 다들 가져갈 만큼씩 거두고 있었는데 나는 남의 일인 양손도 대지 않았다.

주인장이 “아줌마는 왜 안 챙겨요?”

“가져가라고도 안 했는데 내가 남의 포도를 왜 가져가요?”

“아니 꼭 말을 해야 하나 가져갈 만하면 챙겨가는 거지”

고지식한 건지 유난스러운 건지, 나는 그랬다.

가져가도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지만 공짜는 싫었다. 남의 집 지푸라기도 안 묻히고 다녔다. 우리 아이들도 나를 닮아서 공짜 싫어하고 자기 맡은 건 똑소리 나게 한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는 우리 부부가 넉넉하지 않아 물질로 풍부하게 해줄 것이 없었다. 바른 태도, 정직한 마음 밖에 물려줄 게 없었다.

넉넉하지 않아도 욕심 없었고 삶이 고단해도 인정 많은 남편과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들, 그 맛에 견뎌냈다. 남편은 먼 길 떠난 지 오래지만 40년이 지나 그때 그날처럼 우애 좋은 남매들은 노년의 내가 서글플 겨를을 안 준다. 한숨 쉴 틈을 안 준다.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우리 아이들, 그래서 사랑이 넘쳐 나이 든 내 차지까지 온다. 주말이면 마당은 아이들의 차로 꽉 들어찬다. 아이들은 나를 차에 태우고 꽃놀이를 떠난다. 꽃 대궐 이룬 꽃밭에서 나는 모델이 되어 아이들의 카메라 셔터 앞에서 웃고, 하트를 날려본다. 팔도의 산해진미는 덤이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엄마 얼굴이 뭐 볼 게 있다고 여기서 찰칵 저기서 찰칵!! 나만 행복해서 미안하다고 남편한테 간간이 신호를 보내는데 알아들을 리 만무하다.

부모님 슬하로 태어나서 남편을 만나서 8남매를 얻었다. 8남매와 우리 아이들의 배우자 그리고 손주들 … 송종순으로 태어나서 딸이란 이름을 가장 먼저 얻었고 아내, 엄마, 장모, 할머니로 세월 속에서 내 이름들을 하나씩 늘려나갔다. 나의 식구들이다. 이제 딸 자리 아내 자리는 물리고 엄마로 할머니로 살아가고 있다. 명절이면 방안에 한가득 들어찬 우리 자식들. 70을 바라보는 사위부터 중학생 손녀까지 열 손가락을 두 번이나 꼽아도 모자란다. 나도 투병 생활하던 남편을 20년 전에 먼저 떠나보냈고 사랑하는 자식도 잃어 보았다.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픔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었다. 나에게만 다가온 아픔이라고 하소연할 틈도 없이 누구나 인생의 고비마다 희로애락의 올가미에 갇혀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세월의 나이테를 쌓아간다.

나도 꽃 같은 시절이 있었고 여자로 살고 싶던 나이에 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오래전 그 애끓는 시간의 값을 보상받기라도 하듯이 아이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느라 어질어질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혀를 깨물며 번뇌의 널을 뛰었다. 이제 그날들을 뒤로하고 잔잔한 항구에 닻을 내렸다. 우리 딸 영주가 차려준 된장찌개를 먹고 창가로 스며드는 따뜻한 햇볕을 받고 싶다. 혹여 그 햇살이 한낮의 졸음을 데려온다면 꿈을 꾸고 싶다. 그 졸음을 타고 오래전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달빛 아래서 우리 8남매가 까르르 웃으면서 남편과 숨바꼭질 하던 그 뽕나무 잎 사이로 나도 숨을 것이다. 그 속에서 나도 같이 웃고 마냥 행복해지고 싶다. 그 꿀 같은 단잠이 오늘 찾아오기를 …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 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 관련 기사  : http://www.okcheoni.com/news/articleView.html?idxno=6064
 

김경희 작가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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