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金龍柱 (김용주) 이원 출신

고향 마을에 발품을 팔고 계신 김용주 선생님. 일흔이 넘은 김 선생님의 새벽을 깨우는 건 텃밭의 갈증 난 고추들 숨소리다. 6시에 아침을 열고 대전으로 다시 나오신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시며 향토사에 깊은 관심을 두고 역사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 있는 학교 선생님들에게 숨겨진 역사를 강의하고 계신다. 고향마을에 꿈을 심고 노년에 친구들과 같이 모여 옛이야기 하면서 살 집의 터를 개간하고 계신다. 그렇게 선생님의 장년은 하루하루 농익어간다. 단순한 소일거리가 아닌 결과를 내는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윤기 나는 노년을 준비하고 계신 선생님은 굵직한 농협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주인공이셨다.


■ 유년의 결핍이 성장의 발판이 되다.

눈 내리는 밤

이렇게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이면
등불 밑의 나는 또 하나 다른
로댕의 사람이 되어 버린다.

눈 덮인 아득한 마을이여!
포근한 숲속을 나는 예쁜 산새들이여!
산토끼 잘 쫓는 내 동무들이여!
모두 잘들 있었느냐?

이 밤도 또
눈 내리는 창가에 나만 남겨두고
그리운 내 생각은 훨훨 날아
정든 내 고향 집에 가 버렸다.


강소천님의 ‘눈 내리는 밤’이다. 요즘 부쩍 그 시가 내 가슴에 폭 안겼다. 고향마을의 정경이, 유리처럼 들여다보이는 그 시가 지금의 나를 크게 위로한다. 나이 들고 있다는 반증이다.

시골아이 용주는 여름이면 개심저수지 수로에서 친구들과 자맥질하느라 땅거미 내려앉는 줄도 모르기 십상이었다. 겨울이면 저수지에 키가 크고 뻣뻣한, 말이라고 부르는 수초를 한 움큼씩 뜯어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다. 어린 시절 엄니의 손은 마술사의 손과 다름없었다. 뻣뻣한 수초가 엄니 손안에서 참기름 한 방울에 식초 한 숟가락으로 조물조물 버무려지면 어느새 꼴깍 숨이 죽었다. 무를 채 썰어 곁들이면 폼 나는 반찬이 밥상에 올려졌다. 뾰족한 먹거리가 없던 우리 5남매는 젓가락 들락거리느라 분주했다.

6학년 때 여느 개구쟁이들처럼 재미 삼아 불장난하다 불씨가 산불로 이어져 지정리 우봉이씨 선산으로 옮겨붙어 온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겨우 불을 껐지만 저녁 내내 흠씬 두들겨 맞았다. 장난으로 시작한 불씨가 화마로 둔갑해서 번져나갈 때는 숨이 멎을 듯이 두려웠다. 뒷일을 생각하면 화마보다 두려운 건 아버님의 회초리였다. 봄에 찔레순 대가 촉촉한 이슬 머금고 있으면 우리는 뱀이 도사리고 있는 걸 바로 알아차리고 냅다 도망을 쳤다. 습기가 있다는 건 뱀이 지나는 자리라는 것을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자연의 섭리로 알아갔다. 손길이 닿고 발길이 머무는 곳에서 자연의 이치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시골아이들에게 축복 같은 일이었다. 유년의 기억은 그렇게 결핍 가운데서도 추억으로 남아 내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성장통을 호되게 앓지 않고 발판이 되었다. 그래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으로 매일 고향마을에서 발품을 팔고 있다.

나는 원고향이 이원이다. 개심저수지 뒤 동쪽으로 가면 고향 마을 수묵리가 있다. 버스 종점이라 지나는 동네가 아닌 머무는 동네가 되었다. 마음까지 머무는 마을이다. 그 옛날에는 먹뱅이라고 불렀고 근방에 숯막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숯을 구워서 생계를 있던 곳 까막동네, 마을 이름만으로도 과거를 짐작할 수 있다. 사연은 얼마나 많을지…. 역사적 유적이 많다. 안타깝게 기록된 건 없지만 그래서 향토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크다. 내가 향토사에 관심 두는 이유기도 하다.

■ 인생의 무대, 조연에서 주연으로 올라서다

이원에서 중학교를 졸업하며 따뜻한 아랫목에서 빠져나왔다. 부모님 슬하를 벗어나 내 인생을 개척하는 시기였다. 충남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성적으로 앞머리에 이름을 올렸던 나는 연세대학교 상대를 넣었다가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담임선생님도 내 성적이면 가능하다고 추천하셨는데 아쉬운 결과를 낳아서 선생님도 나도 못내 속상한 마음이 빨리 거둬지지 않았다. 나는 심기일전하여 외대 스페인어과에 합격했다. 내키지 않은 출발이었다.

고향 문중에서 일류대에 가면 장학금을 보태주지만, 그 여건이 안 돼서 벼 한가마니가 4천원 할 때 50가마니 값을 등록금으로 썼다. 50년 전 시골에서 서울로 학교를 보낸다는 건 지금 외국 유학과 맞먹는 부담이었다. 아버지는 가정경제나 살림에 큰 관심이 없으셔서, 어머니께서 우리 5남매를 키우고 집안일이며 농사일을 도맡아 하셨다. 어머니 이야기는 책으로 써도 열 권도 더 나올법한 구구절절 애환이 서렸다. 그런 어머니에게 내 욕심만 차리는 학교 공부를 계속하자니, 죄스러운 마음이 많았다. 50년 전의 스페인어과는 장래도 불투명한 전공이라 학업을 이어가는 것을 포기하려고 했던 시점에 최 선생님이 연락을 주셨다.

최 선생님은 당신이 나에게 연세대학을 추천하여 낙방의 고배를 마신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셔서 나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와서 지체 없이 연락을 주셨다.

충남고등학교 최 선생님이 “용주야 내년에 농협대학이 개교한다. 더 한번 지원해볼래? 그 학교를 나오면 농협 간부로 가는 지름길이다.” 학비 면제는 기본이고 농협에서 임원까지 미래가 보장되는 농협대학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연세대학교에 낙방한 것이 나에게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다. 물론 전교 성적이 10% 이내에 들어야 하는 통과의례가 있었지만 성적이 좋았던 나는 농협대학 1기로 당당히 합격했다. 학비 면제 혜택에 한 달에 밥값 4천원만 지불하고 공부에 전념하면 장래를 보장받았다. 당시 충남고등학교 480명 그중 전교 40등 안에 들어야 농협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때 지역 거점에서 활동하는 간부가 되는 전문학교였다.

농협 연수원 근무농협 간부 시절
농협 연수원 근무농협 간부 시절
​​농협 간부 시절
​​농협 간부 시절


■ 굵직한 농협사에 이름을 얹다

어려운 집안의 수재들에게는 최고의 기회였다. 1970년 농협대학 1기로 입학을 했다.

당시 세무대, 체신대, 철도대 등 관비로 공부하는 전문학교들에 이어 농협대학이 개교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라 농촌을 일으키는 사명을 갖고 거점맨을 만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취지였다. 입학해보니 서울의 명문고인 서울고, 경복고, 광주일고 출신들도 있었다. 농협대 1기생들은 다들 농협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2년 동안 기숙사에서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전문학교 시스템의 특수학교였다. 농협의 경영과 정보, 작물학, 축산학, 농업을 가르친다. 졸업할 때 주판 3급까지 마무리하고 우리는 농촌 경제를 살리는 사명을 안고 고향으로 보내졌다.

졸업 후 옥천으로 내려와 청산 지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하숙하면서 사회초년생으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하숙집 마당에서 낯선 처자를 만나게 되었다. 청산 강가로 산보를 나가면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스쳐 가면서 인연의 고리를 맺었다. 그 처자는 바로 하숙집 딸이었다.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던 딸은 고향 집에 내려왔다가 농협 다니는 청년을 만나 결혼이라는 운명의 카테고리에 들어왔다. 아내와 나는 그렇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하숙집 딸과 하숙생으로 결혼행진곡을 울렸다. 그때부터 내 인생은 고속기관차처럼 달리게 되었다.

1973년 10월에 서울 중앙본부로 발령이 났다. 하늘의 별 따기였던 그 자리를 옥천 농협의 ‘김서기’가 거머쥐었다. 실력을 인정받았다. 기획, 판매, 60만 군부대에 군납품 관리 등의 업무를 맡았다. 당시 울진에서 북한 공비가 출몰해서 명주까지 추격전을 벌이느라 군 병력 이동에 맞춰 부식 등 물자를 공급하는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노른자위 자리였다. 일머리가 좋고 성실했던 나는 농협에서 인정받으면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즈음 날아든 입대 영장은 갑자기 인생이 정지된 시간처럼 안타까웠지만 내 능력을 인정받은 후라 나는 농협중앙회로 파견근무를 하며 군 복무를 하게 되었다.

파견 가서 아내는 연년생으로 3남매를 출산하며 육아로 너무 힘든 날들을 보냈다. 나도 정신없이 바쁜 일정의 연속이라 아내 육아를 도울 수가 없어서 아내는 내조하랴 육아하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때였다. 지금의 나는 순전히 아내 덕분이다.

농협 책임자 고시에 합격하고 28세 최연소 상무가 되어 농협에서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영동농협에 내려왔는데 새파랗게 젊은 내가 나이 드신 선배님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책임감도 컸지만 죄송한 마음도 같이 맞물렸다. 장날이면 어르신들이 나를 원숭이처럼 들여다보면서 젊은 녀석이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구경난 듯이 보고 계셨다. 도지부장 할 놈이라면서 눈여겨 봐주셨다. 청춘을 불사르고 역량을 다 바쳐 치열한 농협의 시간을 보냈다.

2007년 농협중앙회 충남 지역본부 부본부장을 퇴임하고 농협에서의 34년을 마감했다
2007년 농협중앙회 충남 지역본부 부본부장을 퇴임하고 농협에서의 34년을 마감했다

 

은퇴 후 소일을 걱정하지 않고 향토사를 연구하면서 뿌리는 내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실천하면서 내가 노년을 보낼 땅을 두텁게 다지고 있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부쩍 서정주님의 시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나이 든 내 마음의 현주소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고향에서 다시 유년의 뜰을 개간해보련다.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은 온기로 가득 차고 흙냄새는 어머니의 살 냄새처럼 살갑게 다가온다. 고향길에 발품을 파는 매일 매일은 노년 마중을 준비하는 나에게 다시 찾아온 설렘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 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 관련 기사  : http://www.okcheoni.com/news/articleView.html?idxno=6165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김경희 작가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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