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항암치료와 수술 과정에서 어머니는 돌아가실 뻔 했다. 여동생은 "상태가 심각하다"고 했다. 의료진도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고 앞으로 지켜 보자고만 했다. 남동생도 "형님, 제가 전화하면 바로 내려오세요!"라고 문자를 남겼다. 한동안 복수가 차올라 눕지도 못했고 앉아서 주무셨다. 다리는 코끼리 다리만큼 퉁퉁 부어올랐고 하루하루가 위급상황이었다. 그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5월과 6월을 보냈다.
그런 불안한 날들 속에서 틈을 내 7월에 서울지방 보훈청 앞에서 독립유공 서훈 관련 1인 시위를 했다. 그리고 공수처의 진보교육감 탄압에 항의하는 1인 시위도 광화문에서 힘들게 실천했다. 그날은 무척 더운데다 4시 학교수업을 모두 마치고 1시간 30분을 거리에 서 있다 보니 서 있을 힘이 없었다.
다행히 제자가 시원한 음료수도 갖다 주고 사진도 찍어주어 버틴 하루였다. 그리곤 7월 14일 방학을 하자마자 곧장 부산으로 내려왔다.
어머니는 한 달 만에 6월 고신대 복음병원에서 퇴원해 '영도' 동생 집에 머무르고 계셨다. 고신대 복음병원은 장기려 박사가 세운 병원이다. 우리나라 의사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의사가 누구인지를 물으면 맨 처음 나오는 답변이 성산 장기려 박사이다. 그분은 「부산 생명의 전화」 설립자이자 의료보험, 바로 건강보험의 효시인 「청십자 의료협동조합」을 처음 조직해 실천한 분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들도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소명으로 알고 평생 인술을 베풀며 검소하게 살았다.
1951년 고신복음병원을 처음 설립할 때 장기려 박사는 미군부대에서 건네받은 천막 3개동으로 '천막병원'을 꾸려 진료를 보았다. 그리고 나무판자로 만든 수술대에서 수술을 집도했다. 그럼에도 행려병자를 비롯해 하루에 200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했다. 병원비가 없는 입원환자가 찾아 왔을 땐 병원장이었던 장기려 박사는 "오늘 밤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그리로 나가시오"라고 할 정도로 휴머니즘 가득한 분이었다. 그분의 향기로운 삶을 기리기 위해 2013년 동구 초량동에 「장기려 박사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고신 복음병원 설립 당시 한상동 목사는 장기려 박사를 찾아가 5,000$을 건네주었다. 일제강점기 주기철 목사와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규정해 거부했다. 주기철, 한상동, 주남선, 이인재, 손명복, 최덕지, 손양원, 최봉석, 최상림 목사, 박관준 장로를 비롯해 수십 명이 일제로부터 투옥돼 고문을 받는 등 탄압을 심하게 받았다.
주기철 목사와 한상동 목사는 일제강점기 평양신학교 졸업생으로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 그리고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활동했던 공통된 전력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순교로써 거부하고자 했다. 그분들이 국가로부터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은 성직자들인 이유이다. 주기철 목사는 원통하게도 해방을 맞지 못하고 일제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렇지만 한상동 목사는 해방과 동시에 출옥했다.
그러나 자신이 목회했던 초량교회가 신사참배 문제 등 친일청산 문제로 분란에 휩싸이면서 배제되었다. 이유인즉 해방 후 교계 권력을 장악한 친일목회자들에 의해 쫓겨난 것이다. 그러자 초량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초량동에 삼일교회를 세우고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다. 교단의 역사정의가 무너진 속에서 예수교 장로교 고신파로 분리돼 소속 노회를 달리했다. 한상동 목사는 초대 고려신학대학 학장을 역임하며 예장 - 고려신학파의 부흥을 꾀하였다. 예장 고신 측이 예장 합동 측이나 통합 측과 달리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경남지역에서 교세가 크게 번창한 이유 중 하나이다.
다시 어머니 이야기로 돌아가자. 고신대 복음병원에서 생사를 넘나들던 어머니는 그렇게 동생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퇴원 후 '영도' 남동생 집에서 한 달을 보내고 조금 기운을 차리셨다. 특히 사업으로 바쁜 여동생은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자 했지만 어머니가 '영도' 당신의 집으로 가고 싶어하셔서 반찬을 해나르느라, 그리고 병원을 모시고 가느라 정신 없이 바빴다. 정성을 다한 효녀 여동생이 기특할 뿐이다.
그렇게 어머니는 7월 초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나셔서 혼자 화장실도 조심조심 다니기 시작했다. 7월 14일, 부산에 내려오기 며칠 전에 어머니는 자신의 '영도' 집으로 와 계셨다. 그리고 큰아들이 내려왔다며 큰아들이 차려준 소박한 저녁상을 맞았다. 힘이 없으셨지만 오랜 만에 많이 드셨다고 했다. 아내가 만들어준 멸치볶음과 소고기 장조림으로 겨우 작은 공기 밥, 반 그릇을 천천히 비우시고 조용히 웃으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큰아들이 내려왔다'고 좋아서, 그저 마냥 좋아서 오랜 만에 그렇게 많이 드신 것이다.
내려온 날로부터 일주일은 거의 매일 집안 청소와 정리를 했다. 두 달 동안 집을 비웠기에 냉장고까지 죄다 음식을 버리고 정리했다. 간간이 튀어나오는 벌레들을 죽이고 귀엽게 생긴 작은 거미들은 창문 밖으로 조용히 내보내주었다. 그리고 간암 환자에게 좋다는 전복을 삶고 연어를 구워 올리브기름을 더해 다슬기 국과 함께 드렸다. 처음엔 잘 드시다가 입맛이 없는지 억지로 드셨다. 그래서 참조기를 구워드리고 갈치도 냉동실에 있으니 언제든 말씀만 하시라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갈치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아범아! 너 모르지? 문영이 엄마는 절대로 갈치 먹지 않는다."
"왜요? 갈치조림도 맛있고 바싹 구운 갈치도 일품인데요. 무슨 지병이 있나 보네요!"
"그게 아니고! 6・25 때 해양대학 3기생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인 뒤에 군인들이 바로 이 영도 앞바다에 수장시켰대! 그때 학살된 시체들을 뜯어 먹는 갈치 떼가 몇날며칠을 바다 위에 파닥거릴 정도였으니까! 그 장면을 해양대 2기생들이 목격했대! 문영이 아빠가 해대2기생이잖니. 그래서 문영이 아빠도 갈치를 절대 먹지 않아! 유독 해대 3기생들 숫자도 적잖니!"
2005년 췌장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해양대 6기생이었다. 6・25때 인민군 의용군 소대장으로 차출돼 낙동강 전선으로 가던 전날 아버지는 꿈을 꾸셨다. 할아버지가 꿈에 보이고 아침에 훈련소에서 일어나니 양쪽 눈이 충혈 돼 있었다. 그러자 같은 전주 북중학교 동기이자 의용군 중대장이었던 친구가 병원에 가보라고 외출을 허락해 주었다. 그 길로 아버지는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 맞은 편 <전동성당> 담벼락을 넘어 숨어 지냈다. 20살 나이에 목숨을 그렇게 보존했다. 어쩌다 전주 한옥마을 <전동성당>에 갈 때면 붉은 벽돌 너머 성당 어느 구석진 곳에서 아버지의 옛 자취를 더듬곤 했다.
어머니로부터 갈치 떼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전쟁 발발 직후 국군이 후퇴하면서 자행한 「보도연맹 학살」 만행이 떠올랐다. 전국에 걸쳐 20만 ~ 30만 명을 집단 학살한 것이다. 학살 기간은 1950년 7월 ~ 8월 두 달 동안 집중되었다. 경상북도에서만 학살당한 사람이 3만 명에 이른다고 유족회는 주장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3,500명을 학살한 후 지하 150m 광산에 암매장했다. 전쟁 발발 직후 7월에 발생한 잔혹한 만행이었다.
대전형무소 정치범 1,800명을 포함해 충남 대덕군 산내면 골령골(현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에서 10일 동안 4,000명을 집단 학살한 것도 7월이었다.
경남 통영에선 민간인 남녀 800명을 총살한 후 골짜기에 파묻거나 바다에 수장시켰다. 경북 칠곡군에서도 12-13세 소녀를 포함해 200-300명을 총살한 뒤에 산골짜기에 암매장했다. 경남 마산에서도 360명을 총살한 후 그대로 바다에 수장했다.
부산 역시 부산형무소에 수감 중인 정치범 4,800명과 보도연맹원 5,000명 등 총 10,000명가량을 집단 학살했다. 우리가 잘 아는 「수라도」, 「모래톱이야기」의 작가 김정한 선생도 그때 보도연맹원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서울에서도 보도연맹원으로 피검된 국문학자 양주동, '향수'의 시인 정지용, 김기림, 박영희,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 등이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가 죽을 고비를 넘겼듯이...
부산에서 집단학살을 자행할 당시 일부 정치범들을 영도 동삼동 절벽으로 끌고 가 총살 후 절벽 아래 바다로 던져버렸다. 빨갱이로 몰리거나 좌익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군인과 경찰은 학살 후 수장시킨 것이다. 해양대 3기생의 집단 학살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자행된 학살만행이었다. 영도 학살 장소는 지금 '미니공원'으로 변신했다.
바로 그 '미니 공원'으로 가는 동삼동 삼거리엔 <천리교 원남성 교회>가 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특전사 정치군인들에게 사살된 김오랑 소령의 부인 백영옥 님이 1991년 6월 28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공간이다. 당시 전교조 해직 시절이라 어린 아들 두 명을 데리고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영도' 부모님 집에 더부살이하던 어느 날 그 소식을 접하고 크게 놀랐다.
경찰은 실족사로 발표했지만 서른다섯 살 남편 김오랑 소령의 죽음은 아내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으리라! 그 충격으로 아내 백영옥은 두 눈을 완전히 실명했다. 그리고 10년이 훌쩍 지난 1990년 전두환과 현직 대통령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를 형사고발했다. 그 중 최세창은 남편을 죽인 3공수 여단장이었고 박종규는 3공수여단 15대대장으로 부하 10명을 거느리고 김오랑 소령과 총격전을 벌인 인물이다. 백영옥 님의 형사고발은 외압으로 무산됐다. 그리고 1년 뒤 백영옥 님은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이승을 떠났다.
총격전이 있기 직전 최세창은 자신의 직속상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사령관실에서 회유했다. 그러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오히려 고함을 치며 거부했다. 박정희 5・16 군사쿠데타 때도 정치군인들의 행태를 비판하며 쿠데타에 합류하지 않았던 정병주 중령이었다. 당시 박정희 쿠데타군에 저항했던 정병주 중령은 경회루 기둥에 포박당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3개월을 군 영창에 감금된 뒤 풀려나기도 했었다. 그는 철저하게 '정치군인'들을 경멸한 인물이었다. 불행하게도 89년 정병주 장군은 서울 북쪽 송추 계곡 야산에서 의문사했다. 그런 사령관을 보좌했던 김오랑 소령은 사령관을 체포하러 온 반란군 측 특전사 장교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결국 가슴과 복부, 그리고 허벅지에 총탄 7발을 맞고 현장에서 순국했다.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쏜 총에 특전사 대위 두 명도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김오랑 소령과 같은 육사 25기 동기들은 그의 원통한 죽음에 대해 신원하고자 하질 않았다. 오히려 전두환 쿠데타 군에 적극 가담해 국회의장(강창희), 한나라당 국회의원(황진하), 한나라당 국회의원(권경석), 민주당 국회의원(서종표)으로 승승장구했다. 사람들은 김오랑 소령을 '바보 군인', '어리석은 군인'이라고 했다. 더구나 같은 군인아파트에 살았고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기 며칠 전 부부동반으로 식사까지 같이 했던 박종규 중령(육사 23기)은 "대세의 흐름을 모르고 반항했기 때문에 그 같은 변을 당한 것"이라며 황당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는 김오랑 소령을 '참군인'으로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누가 선한 사람이고 누가 '악인'(惡人)인지 분명하게 기록할 것이다.
같은 군인아파트에서 육사 선후배로 호형호제했던 박종규 중령은 12・12 군사반란 당시 특전사령관실에서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러 간 책임자였다. 그러나 '정치군인'들이 어떠한 궤변을 늘어놓았든 김오랑 소령은 <참군인>으로서 단호했다. 김오랑 소령이야말로 가장 군인다운 군인이며 <참군인>의 길을 걸었다. 앞으로 육사 후배들에게 김오랑 소령은 '참군인의 표본'으로 기억될 것이다. 더불어 정훈 교육 자료로 김오랑 소령의 의로운 삶과 죽음이 기록돼 영원히 살아 빛날 것이다!
'영도'(影島)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말을 길렀던 공간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영도'를 '목도'(牧島)라 불렀다. '말을 기르는 공간'으로 '영도'를 군사기지화 했다. 실제로 '영도'에서 기른 말은 매우 튼튼하고 우수해 1930년대 대륙침략시기 병참물자 운반용이나 장교들 군마로 적극 활용했다.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의 경우 말의 그림자가 천리마의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다는 뜻으로 영도(影島)의 본명은 '절영도'(絶影島)였다고 한다. "말의 그림자가 끊어지는 섬"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영도는 조선시대 국가 차원에서 말을 길렀던 '국마장(國馬場)'으로 기량이 뛰어난 준마들이 많았다.
태종대 전망대에서 날씨가 쾌청한 날에는 56km 떨어진 쓰시마섬이 보인다. '영도'(影島)는 역사적으로 쓰시마섬을 정벌하려고 말을 의도적으로 길렀던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영도는 조선 통신사 조엄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고구마 종자를 가져왔을 때 처음으로 영도 동삼동에 심은 공간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시절엔 영도 고구마가 '목도'(牧島) 고구마로 전국에 이름이 자자했다. 영도 고구마 가운데 '일산'배기 고구마가 가장 뛰어났다. '일산'은 바로 천리교 원남성 교회 위쪽 산등성이를 가리킨다.
실제로 영도는 선사시대 우리 선조들이 부산에까지 내려왔을 때 가장 먼저 정착한 공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풍부한 어장과 조개들이 있어서 삶을 영위하기에 최적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선사시대인 신석기 시대 패총이 다량으로 발굴되는 공간이 영도이다.
또한 영도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와 절영도에 정박해 있던 일본군 전함 100척을 쳐부수어 「부산포 해전」을 승리로 이끈 자랑스러운 공간이기도 하다. 「부산포 해전」을 승리로 이끈 뒤에 일본군은 보급수송이 차단돼 애를 먹었다. 바로 남해 바다를 이순신 휘하 조선 수군이 통제하게 된 때문이었다.
2000년대 들어 송도와 영도를 잇는 남항대교가 들어서고 다시 영도에서 광안리를 잇는 북항대교까지 건설되면서 영도는 관광지역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일본 정벌을 위해 태종무열왕이나 조선시대 태종이 머물렀다는 태종대는 일찌감치 관광지로 주목을 받았다. 매년 7월 즈음 태종대 사찰 태종사 안에서 열리는 수국 축제는 단아하게 핀 수국 천국을 연출하곤 한다.
한국전쟁 시기 도심 변두리에서 더욱 밀려난 서민들이 살았던 영도구 영선동 <흰여울 문화마을> 또한 영화 『변호인』(2013)을 비롯해 각종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흰여울 문화마을>과 함께 박창수-김주익-곽재규의 죽음을 가져온 영도구 봉래동 <한진중공업>을 둘러보는 것도 권하고 싶다.
2003년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 지회장은 600명 정리해고에 맞서 죽음으로써 해고자 복직 문제를 해결하였다. 눈에 어렸을 어린 삼남매를 남겨두고 마흔의 나이로 잔인한 노동현실에 저항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주익 열사의 죽음이 가슴 아픈 이유이다.
2011년 김진숙 역시 김주익 노동동지가 올랐던 85호 크레인에서 309일 동안 고공농성을 벌였다. 2003년처럼 김진숙 자신만 빼고 20년 넘게 해고된 노동자들이 일거에 복직되었다. 당시 김진숙의 고공농성 투쟁은 <희망버스>를 낳았고 이는 우리사회 연대의식과 연대정신의 모범을 창출해 내었다.
부산 기행을 할 때 '영도'(影島) 둘레길을 통해 송도케이블카까지 영도 기행도 권하고 싶다. 특히 영도 동쪽 3개 마을인 동삼동(東三洞) 상리, 중리, 하리를 둘러보길 권하고 싶다. 아직도 60~70대 이상 해녀들이 물질을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2012년에 조성된 아미르 공원을 강추하고 싶다.
아미르 공원은 해외 유명 관광지에 온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한다. 아미르 공원 양쪽 길가에 핀 수국 풍경 또한 일품이다.
멀리 오륙도와 이기대 아파트가 보이며 시원한 바닷바람과 탁 트인 바다를 배경으로 가끔 오가는 국제크루즈선이 항해하는 이국적인 풍경을 볼 수 있기도 하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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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선생님의 글 또한 하나의 작은 편린이겠지만,
사특한 자들이 오도한 거짓을 밝히기 위해
참을 찾아 기록하고 파헤치는 일은 참으로 거룩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하 선생님의 글마다 가슴이 저립니다.
값진 글을 연재해서 제 눈을 맑히는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