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강변 걷고 들어왔네. 비 온 뒤라 그런지 둔덕에 버들이 더욱 푸르르더군! 칭칭 늘어진 가지, 그리고 잎새!

옛날 문인들은 미녀의 허리를 늘어진 버들가지에 견주어 '柳腰'라 했고, 미녀의 눈썹을 잎에 견주어 '柳眉'라 했다네.

문득 자네가 보내준 3편의 시 떠올리며 吟詠했네.

첫 편, <送元二使之安西>(안서 땅으로 사신 가는 벗 원이를 송별하며), 이 시는 바로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西浦漫筆>에서 정지상(鄭知常, ?-1135)의 시 <送人>을 읽고, "우리나라의 '陽關三疊'이다"라 했다는 왕유(王維, 669?-759)의 바로 그 시네.

渭城朝雨浥輕塵!
위성의 아침 비가 가벼운 먼지를 적신다!

법송, 여기 '渭城'은 당나라 때 수도인 長安의 서쪽,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함양시(咸陽市) 동쪽 일대에 위치한 곳으로 실크로드의 시발점이라네.

당나라 때 장안 동쪽엔 파교(灞橋), 서쪽엔 위교(渭橋)가 있었는데, 이 서쪽의 위교는 서역으로 가는 다리였네.

양관(陽關)은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돈황현(敦煌縣)에 있는 곳으로 이 위교를 반드시 건너야 갈 수 있네.

따라서 "위성에 아침 비 가벼운 먼지 적신다"한 것으로 보아 지금 왕유(王維)는 그의 벗 원이(元二)를 송별하기 위해 위성에 와 있음을 알 수 있네. 그런데 비가 내린다 했네. 여기 비는 바로 이별의 눈물을 상징하네.

이때 내리는 비에 객사(客舍)의 버들 빛(柳色)이 파릇파릇 새롭다고 했군.
客舍靑靑柳色新!

법송, 당나라 때 벗과 헤어질 때는 버들가지를 꺾어 이별의 정표로 주는 풍습이 있었네. 그게 바로 '折柳'(버들가지를 꺾는다)일세.

비에 버들가지가 파릇파릇 잎새를 내고 있네. 이제 헤어질 시간을 재촉이라도 하듯. 그러니 어찌 권하지 않겠나!?

勸君更進一杯酒!
그대에게 다시금 한 잔 술 권하노라!

여기 '更進'이라 했으니 이미 두 사람 사이에 거나해질 만큼 대작이 오고 갔음을 알 수 있네.

양관 땅을 나서고 보면 이제 다시는 한잔 술을 권해 줄 벗이 없을 것일세.
西出陽關無故人!

법송, 그러고 보니 붙잡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이나 두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네.

말은 가자 울고, 님은 잡고 아니 놓네/
석양은 재를 넘고, 갈 길은 천 리로다/
저 님아, 가는 날 잡지 말고 지는 해를 잡아라!

바로 그 정경일세! 법송, '한잔 더!'(更進), 두 사람의 석별하는 모습을 잘 그렸군!

둘째 편, "折楊柳寄千里人,..."은 원래 홍랑(洪娘)의 시조,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밧괴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어기소서"를 최경창(崔慶昌)이 한역(漢譯)한 것이네.

법송 자네도 잘 알겠지만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은 조선 중기 때 삼당시인(三唐詩人; 당풍의 시를 잘했던 3사람으로 백광훈, 이달, 최경창을 말함), 또한 '팔 문장'(八文章;조선 중기에 널리 문명을 날리던 문장가로 옥봉 백광훈, 중호 윤탁현, 아계 이산해, 고담 이순인, 고죽 최경창, 간이 최립, 청천 하응림을 말함)의 한 사람으로써, 그는 1573년(선조 6) 가을에 북도평사(北道評事)로 경성(境城)에 가게 됐네. 그때 안변, 원산을 거쳐 홍원(洪原)에 이르러 그곳에서 얼마간 머물다 그해 겨울 경성으로 떠났네.

그때 그곳 관기 홍랑(洪娘)을 만나 떠날 때 그녀를 경성(境城)으로 함께 데리고 갔지. 아니 데리고 간 게 아니라 홍랑이 따라간 거겠지?! ㅎㅎㅎ^^^

그 뒤 두 사람의 사랑은 무르 익었네. 한데, 이듬해 봄에 최경창이 서울로 올라오게 되자 홍랑이 쌍성(雙城)까지 따라와 작별했네. 이때 저 멀리 사라지는 홍랑을 바라보며 최경창은 이렇게 읊었네.

玉頰雙啼出鳳城
曉鶯天澱爲離情
羅衫寶馬河關外
草色迢迢送獨行

고운 뺨 양쪽에 눈물 흘리며 성을 나왔는데,
고운 목소리가 천릿길 가라앉으니 이별하는 마음이네.
비단 적삼 실은 말은 하천 관문 밖에 있는데,
풀빛이 멀어지고 멀어지며 혼잣길을 보내네.

홍랑은 돌아가다 함관령(咸關嶺)에 이르러 시조 한 수를 지어 꺾은 버들가지(折柳)와 함께 최경창에게 보냈네. 위의 시조가 바로 그 시조이며, 이를 번역한 것이 바로 자네 법송이 올린 그 시네.

이때 최경창이 절유(折柳)와 시 한 수를 받고 다시 난(蘭) 한 포기와 함께 아래와 같이 또 시를 지어 보냈네.

相看泳泳贈幽蘭
此去天涯幾日還
莫唱咸關舊時曲
至今雲雨暗靑山

마주 보며 흐느끼다 유란을 주노라/
이제 가면 하늘 끝 언제 돌아오리/
함관령의 옛날 노래는 부르지 말아라/
지금 운우의 정 가득하니 청산이 어둡다.

그 뒤 3년 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최경창이 병석에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로 떠나 7주야만에 서울에 도착했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 얼마나 반가웠을까! 홍랑이 최경창을 만났다는 소식이 온 장안에 퍼졌네.

한데, 그땐 평안도, 함경도 사람은 서울에 못 들어가는 양계(兩界)의 금(禁)함이 있었고,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뒤라 정적(政敵)들이 이를 문제삼아  최경창은 면직되고 홍랑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네.

이때 고향으로 쓸쓸히 내려가는 홍랑의 뒷모습을 보고 최경창은 이렇게 읊었네.

同心不同車
則離時屢變
車輪尙有跡
相思人不見

마음은 같지만, 수레는 함께 타지 못하네/
이별은 때마다 거듭 바꿔놓겠지/
수레바퀴는 자취라도 있는데/
그리운 사람은 볼 수가 없구나!

법송, 최경창의 호가 뭔지 아나? 孤竹이라고. 그래 맞네! 아래 시에서 연유된 것이네.

孤竹無枝葉
寄生海上山
年年霜雪埋
崖傾根未安
豈是材可用
所貴能傲寒

외로운 대나무 가지와 잎도 없이/
바닷가 산에 붙어서 살고 있구나/
해마다 서리와 눈에 묻히고/
벼랑에 기울어 잔뿌리는 불안해라/
어찌 이것을 재목으로 쓸 수 있을까?/
추위에도 기품을 잃지 않을 수 있음을 귀하게 여길 뿐!

법송, 홍랑은 죽은 뒤 그의 유언대로 고죽의 무덤 아래 묻혔네. 해주최씨 최경창의 묘가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 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하네. 언제 시간내어 한번 찾아볼까 하네.

버들가지 꺾어 천 리 머나먼 곳에 있는 당신께 보냅니다.
折楊柳寄千里人

날 위해 뜨락 앞에 심어 주소서!
爲我試向庭前種

밤새 새잎 나면
須知一夜生新葉

파리한 버들눈썹이 바로 저의 몸이라는 걸 알아주세요.
憔悴愁眉是妾身

법송, 가서 이렇게 읊고 오겠네. ㅎㅎㅎ~~~^^^

셋째 편은 성당(盛唐) 때 문인 시견오(施肩吾, 780-861)의 '버들가지를 꺾다'(折楊柳) 이더군.

법송, 그는 중당(中唐) 때 시인으로 자는 희망(希望, 어떤 곳엔 希聖), 목주(睦州) 사람으로 진사 벼슬에 올랐으나 선도(仙道)를 좋아해 예장서산(豫章西山)에 은거해 있었네.

傷見路傍楊柳春
버들잎 파릇파릇 돋아나는 봄날, 길옆의 버드나무와 마주하고 있네.

여기 '傷見'이라 했으니 서로 헤어지기가 아쉬워 가슴 아파하는 걸 알 수 있네.

一枝折盡一重新
이별의 정표로 버들가지 꺾는데, 한 가지 다 꺾어도 새 가지 거듭 나온다 했네.

今年還折去年處
지난해 꺾은 자리에서 올해도 다시 꺾었네.

不送去年離別人
그러니 지금 떠나는 사람은 작년에 떠나보낸 그 사람이 아니란 뜻이네.

이렇게 버들가지 매년 꺾여 이별이 오고 갔네. 허허~ 會者定離라 했던가!

법송, 그의 시에 이런 시도 있다네.

烏鵲語千回
黃昏不見來
漫敎脂粉匣
閉了又重開

까막까치 수 차례 울건마는 /
해 다 저물어 가도 임은 오지 않네 /
부질없이 지분갑만을, /
닫았다 다시 열었다 하는구나!

법송, 이렇게 세 편의 시 읊다 보니 어느새 해 서산에 기울었네.

파란 하늘, 그리고 뭉게구름!

하늘 바라보며 "아! 하늘이 파아랗다!"했더니 구름이 "인생은 나처럼 덧없이 흘러가는 것이라" 하더군!

그래, 법송 난 구름처럼 바람처럼, 아니 물처럼 그렇게 유유히 살다 가겠네. 법송, 침침한 눈으로 글 쓰자니 예전 같지 않네. 눌러 봐 주시게! 늘 고맙네.
아무쪼록 건승들 하시게! 이만 총총 줄이네.

신축 9월 초3일 밤에
김포 여안당에서 취석 한송이 성주 제자 법송에게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통신원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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