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군 항일독립항쟁사적지 화암동굴 답사기 -

 

[사진1] 사북 철도건널목 풍경
[사진1] 사북 철도건널목 풍경

 정암사를 뒤로 하고 화암동굴로 가는 길에서 만난 사북 철도건널목을 보고 있으니 어릴 적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것 같다. 땡그랑 땡그랑 종이 울리면서 차단봉이 내려지고 태백선 화물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에 주마등처럼 남도 전라선 기차 종착점에서 느꼈던 추억들이 스쳐간다.
사북읍 지나 소금강로를 타고 두 번째 탐방지 화암동굴까지 가는 길에서 만난 굽이굽이 풍경은 새로운 볼거리다.

 

[사진2] 박춘금 단죄비
[사진2] 박춘금 단죄비

 화암면  화암동굴에 도착하여 박춘금 ‘단죄비’를 찾기 위해서 관람안내도를 찾아 보아도 위치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면서 찾아보고 안내소 직원에게 물어보아도 알지 못한다고 하니 난감한 일이다. 강기희 작가에게 전화로 도움을 요청하여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단죄비는 매표소 뒤쪽 모노레일 철로와 나란히 가는 언덕 길을 걸어서 200m 올라가니 화암동굴 출구 쪽에 서 있었다. 드디어 ‘반민족 악질 친일파 박춘금 단죄비’를 만났다.
단죄비는 2020년 3.1절 101주년을 맞아 ‘정선평화의소녀상건립추진위원회’(대표 강기희)에서 천포광산(현 화암동굴)을 운영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에 부역한 행위 등 박춘금 친일반민족행위를 잊지 않기 위해서 철과 동, 대리석으로 만든 조형물이다. 앞면은 화암동굴을 빠져나오는 박쥐와 세월을 상징하는 거미줄을 통해서 잔혹한 친일의 흔적을 상징하고, 사각 큐브는 황금을 채취하여 일본으로 가져간 ‘금’ 상자를 표현하고 있다. ‘반민족 악질 친일파 박춘금 단죄비’ 글자를 새겨서 지워지지 않을 부끄러운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뒷면은 단죄비(작가 이재욱) 작품 설명문이 스테인레스에 판각되어 부착되어 있고 사각 큐브가 돌출되어 있어서 입체감을 느낄 수 있는 예술 감각이 뛰어난 작품이다. 측면에는 박춘금의 친일 행위가 동판에 새겨서 부착되어 있다. 국내에 설치된 최초의 박춘금 단죄비로써 위상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진3] 화암동굴 관광지 풍경
[사진3] 화암동굴 관광지 풍경

 정선의 자랑인 화암동굴(강원도 지방기념물 제33호, 옛 이름 천포광산)의 역사와 악질 친일파 박춘금에 대해서 살펴보자. 관람안내도와 단죄비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친일인명사전’ 내용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화암동굴은 1922년부터 1945년까지 금을 깼던 천포광산으로, 당시 연간 순금 22,904g을 생산하는 국내 5위 금광이다.(중략)... 국내 유일의 테마형 동굴이다. 천연 종유굴은 2,800㎡ 규모의 광장이고 전체 관람구간은 5개 장으로 1,803m이다.  ‘역사의 장~금맥따라 365~동화의 나라~금의 세계~대자연의 신비’로 구분되어 있다.”(관람안내도 참고)

박춘금은 1891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밀양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청소년기에 대구의 일본군 병영에서 잡일을 하다 1908년(18세) 일본으로 건너 가 도쿄, 고베에서 고용살이, 노무자, 탄광 갱부 등 막노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다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세 번의 만남을 통해서 폭력조직 깡패와 친일 반역의 길로 들어선다. 첫번째, 1917년(27세) 폭력조직 흑룡회 거두 고야마 미쓰루(頭山滿)를 만나면서 폭력조직 깡패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두번째, 1920년(30세)에 도쿄에서 이기동(36세,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박열(영화 ‘박열’), 김약수(제헌의원 국회부의장) 등 회원-회장, 친일진상규명위. 친일인명사전 수록된 친일파)과 함께 일선융화와 상애를 표방한 노동조직 ‘상구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고, 다음해에 ‘상애회’로 개편하여 부회장으로서 일본 내 조선인 노무자 사상 통제 등 일본인 기업주를 대변하는 폭력 착취조직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세번째,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발생한 조선인 대학살 사건을 무마 처리하는데 협조한 공로를 인정받아 1928년 상애회를 재단법인으로 확대하고, 총독부 경무국장(전) 마루야마 츠루키치(丸山鶴吉)를 재단이사장을 영입하면서 본격적인 친일반역의 길로 들어선다.
조선에는 마루야마의 밀정 배정자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마루야마의 수족 박춘금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의열단과 광복군 지대장 약산 김원봉 장군과 조선의용대 석정 윤세주 열사가 탄생한 충의의 본향 밀양에서 박춘금 같은 악질 친일파가 나올 수 있었는지...

또한 이 자의 친일행위 중 특이한 것이 두가지가 있다.
첫째, 일제강점기 조선인으로서 유일하게 일제 중의원 국회의원에 두 번(32년, 37년)이나 당선되어 제국의회에서 ‘조선독립을 포기하고 일제의 속국으로 살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조선인 참정권 운동, 지원병제도 도입을 주창, 징병제 시행 등 일본인 보다 더 일제를 위해서 견마지로의 충성을 다했다는 것이다. 둘째, 45년 2월 ‘미영격멸’, ‘내선일체’, ‘생전필승’을 구호로 내걸고 [대의당]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일제 협력단체와 위원회에 가담하여 친일에 부역한 자들은 많지만 정당을 조직하여 악질적으로 조선인을 탄압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천추에 길이 기억되고 그 욕된 이름은 만고에 불망할 것이다. 대의당을 통해서 불령선인, 즉 독립운동가 30만 명을 학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위해서 준비하였다고 하니 등골이 오싹해진다.  “1945년 4월 초 총독부는 전국 175개 경찰서에 극비친전을내려서...(중략) 독립운동가를 예비검속으로 3000여 명을 가두었다.”(밀양신문, 2002.8.31, 최필숙 기고문 참조). 

역사의 아이러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백범 김구 주석이 한탄한 것처럼 일제가 조금만 더 늦게 항복을 선언하여 광복군이 한반도 수복을 위한 국내진공작전에 투입되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지만, 반면에 예비검속으로 구금된 3000여 명의 국내 애국지사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다.

지면상 이 자의 친일행위에 대해서 다 열거할 수 없고, 친일인명사전 2권 139쪽 ~143쪽까지 무려 5쪽에 걸쳐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공공도서관 및 학교도서관에 배치된 친일인명사전을 열람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전에 기록된 박춘금 친일반민족행위와 관련된 친일 단체와 부역자들을 연구하면 개인의 친일 행위를 너머 1920년 이후 열도와 반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친일파들의 면면과 죄상을 파악하는데 길잡이가 되기에 충분하다.

[사진4] 친일인명사전 박춘금 기록
[사진4] 친일인명사전 박춘금 기록

끝으로 박춘금이 33년 5월부터 운영하기 시작한 정선군 천포광산 등 국내의 주요 금광과 광산업자들의 광물채취 행위가 어떻게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배와 만주와 중국 침략, 태평양전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답사기를 마친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광산업자로 기억되고 있는 자들은 조선 최대의 금광왕 최창학, 교동광산 매매금으로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 조선 최대의 광산왕 이종만, 영덕금광 매매금으로 전투기 ‘문명기호’를 일제에 헌납한 문명기, 그리고 박춘금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다.
1929년 미국발 세계대공황의 여파는 30년대 일제와 식민지 조선에도 밀어닥쳤다. 일제는 세계대공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31년 만주를 침략하였고, 이어서 37년에는 중국 본토까지 침략하여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급기야 41년 미국 하와이를 공습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인류사에 유례가 없는 2차대전의 참화로 몰아갔다. 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전쟁물자(철광석, 무연탄, 비철금속 등) 조달과 대외무역 결제 수단으로 ‘금’이 필요하여 33년 광산개발을 위한 탄광장려금까지 내주면서 조선 민중의 불만을 효과적으로 억누르고 식민지배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금광개발을 장려하였다. 그 결과 한반도에 골드러시 광풍이 몰아치는 기현상이 발생하여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1936년 산금액은 6872만원(현시세 약 6조 8720억원, 당시 화폐 1만원은 현재 10억 가치)으로 한반도 광종별 산출액의 63%로 광업 생산물 1위를 차지하였다.” (백과사전 참고)

[사진5] 화암동굴  관광지 향토박물관 전시물
[사진5] 화암동굴 관광지 향토박물관 전시물

국내 유일의 테마형 동굴 화암동굴에 설치된 단죄비를 통해서 한 인간의 친일반민족행위를 마주친다는 것은 유쾌한 기억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화암동굴 관광과 더불어 옛 천포광산에서 벌어진 민족적 차별과 저임금, 학대받으면서 깊은 갱도에서 채굴에 종사했던 조상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비애와 연민이 밀려오고, 반면에 일제의 주구가 되어 침략전쟁에 필요한 전쟁물자 조달을 위해서 민족을 탄압하고 수탈했을 박춘금의 반민족행위를 생각하면서 분노가 발현되는 것은 인지상정의 감정이며 산교육의 현장으로써 충분한 가치가 있다.

~다음 탐방지로 길을 떠나면서 작은 다짐을 해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교훈을 잊지 않고 아직도 잔존한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역사정의를 실천하여 민족정기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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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허익배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김재광 주주통신원  gamkood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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