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뼛속 깊이 일본제국주의에 충성했던 신문

조선일보가 창간한 것이 1920년이니 작년이 100주년이다. 일제강점기에 친일매국 행각을 벌여왔고 6·25 때는 김일성을 찬양하기도 했으며, 군사독재정권에 철저히 아부하는 등 백 년 동안 민족을 배신하고 기만해온 신문이다. 이 신문이 유럽에 있었다면 벌써 폐간이 되었을 터이다. 일본과 중국의 대학에서 줄곧 일제강점기의 언론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던 필자는, 조선일보의 만행 가운데 일제강점기의 친일매국 행각을 주제로 지난달 언론소비자주권행동에서 강연한 바 있다. 이 글은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충성과 아부 행위에도 자진 폐간한 조선일보

방응모는 총독부의 언론통제가 강화되고 신문 통폐합 정책이 대두되자 1940년 3월 『조광』 발행인으로 취임하고 8월에 『조선일보』를 폐간하였다. 폐간사 내용에, “조선일보는 신문통제의 국책과 총독부 당국의 통제방침에 순응하여 금일로써 폐간한다 … 지나사변(중일전쟁) 발발 이래 본보는 보도 보국의 사명과 임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고 더욱이 동아 신질서 건설의 위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야분려한 것은 사회 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폐간사 내용 중에 ‘순응하여 폐간한다.’라고 적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총독부 정책에 순순히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조선일보에 대해 “새로운 충신이 나타나서” 자신과 경쟁한다면서 … 총독부는 ‘비슷한’ 신문이 셋이나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중략) 충성을 다하는 신문들이니 일본은 기자들을 재취업시키는 수고까지 떠맡았고, 신문사에는 보상금을 주었다고 한다. 전투기 한 대가 10민원이던 때 100만원이니, 거액의 보상금이다.”라고 보도하였다. 조선일보는 일제 충성을 다하는 신문이니 폐간에 따른 기자들의 재취업과 보상을 해 주었다는 기사다. 총독부 기관지조차 조선일보가 <친일 신문>이라 것을 인정한 것이다.

잡지 조광을 통한 방응모의 친일매국행위

방응모는 일찍이 1935년 10월에 잡지 『조광』을 창간했다. 나중에 방응모는 조선일보를 폐간한 후부터는 잡지 『조광』을 통해서 직간접으로 친일 아부 행위를 이어간다. 『조광』을 본격적으로 친일 잡지로 개편하고 그 자신이 직접 친일 논설을 기고하는 등 친일행각을 이어갔다. 
특히 『조광』「창간 5주년사」에서 「國民된 者로서는 누구나 實로 最後의 覺悟를 하지 않으면 안될 때를 當 하였습니다. 안으로는 新體制의 確立, 밖으로는 革新外交政策을 强行하여 하루바삐 東亞新秩序建設을 完成시켜서 世界의 新秩序를 建設하고 한 걸음 나아가서 世界永久平和를 企圖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1940년 10월  조선일보 자매 잡지 『조광』 창간 5주년늘 맞아 방응모는 조선일보를 폐간한 후에도 본 잡지를 통해서 직접 친일 아부의 글을 게재하고 한층 더 조선 젊은이들의 전쟁 참여 독려 기사 및 일왕 찬양 글이 극에 달한다

또한 『조광』은 조선어 잡지임에도 불구하고 일문기사를 게재하는 등 일제의 열렬한 시국선전 잡지로 이끌어 갔다. 1941년에는 친일잡지 『삼천리』의 사장인 김동환의 발기로 전시보국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가 결성되었는데, 방응모는 이 단체의 위원으로 참여하여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전비조달을 위한 채권가두유역대(종로대 : 방응모, 윤치호, 한상룡, 최린, 이광수 외 다수. 황금정대 : 박흥식, 고원훈 외. 남대문대, 본정대, 명치정대, 경성역대, 서대문대, 종로4정목대, 동대문대, 청량리대, 연락본 등에 다수가 참여)를 편성해서 경성 11개 장소에서 채권판매운동을 전개해서 전쟁경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일제가 내놓았던 1원짜리 꼬마 채권을 거리에서 판매했다. 

1935년 10월 조선일보 자매 잡지 『조광』 창간호.방응모는 조선일보을 폐간한 후에도 본 잡지를 통해서 직접 친일 아부의 글을 게재하고 더 한층 조선 젊은이들의 전쟁참여 독려 기사 및 일왕 찬양 글이 극에 달한다
1935년 10월 조선일보 자매 잡지 『조광』 창간호.방응모는 조선일보을 폐간한 후에도 본 잡지를 통해서 직접 친일 아부의 글을 게재하고 더 한층 조선 젊은이들의 전쟁참여 독려 기사 및 일왕 찬양 글이 극에 달한다

1941년 10월에 들어 친일 단체의 총집결장인 「조선임전보국단」으로 해체 · 통합되었다. 「조선임전보국단」은 조선인이 전쟁 협력을 위해 「임전대책협의회」와 「흥아보국단」을 통합시켜 결성한 전시체제기의 최대 민간단체로 방응모는 발기인과 이사로 참여했다. 방응모는 점점 친일 논조가 강해지면서 1942년 2월 호 『조광』에 「대동아전과 우리의 결의」특집에서 「타도 동양의 원구자(怨仇者)」라는 본격적으로 영미(英美)를 규탄하는 논설을 썼다. 이 글은 태평양전쟁 개전 직후에 소식을 들은 뒤 쓴 감상문이었다. 

방응모는 영국과 미국을 「동양의 원구자요, 전체의 죄인」으로 규정하고 「동양을 침략하고 유린하고 또 임의로 착취하여 동양인을 멸시 천대」한 데서 찾았다. 따라서 〃이번 대동아전쟁은 그들에게서 동양을 이탈하여 공영권을 건설하고 세계의 평화를 도모하려는 것은 물론이지만 일편으로 보면 참아오던 원한 폭발이라고도 할 것이다"라며 일본은 평화의 사명 국가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방응모는 1942년 2월 특집에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군관 당국을 절대로 신뢰하여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을 주장하고 아울러 일하지 않는 사람은 국민이 아니라는 관념을 깊게 가지고 국민개로(國民皆勞)운동에 동참하고 물자 절약에 솔선하며, 전비 확충의 바탕이 되는 저축강화 등을 촉구”하고 있다. 어떻든 반도 민중은 이때 물력(物力)과 심혈을 총경주하여 국책에 협력할 것을 다짐하자는 것이었다.

방응모의 최후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방응모는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고 한다. 1950년 9월 28일, 북한 개성의 서흥군 송악산 부근에서 트럭에 실려 끌려가던 도중, 갑자기 미군기 4대가 날아들어 조명탄을 터트리고 폭탄과 기총을 퍼부어 방응모는 이 공습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시신은 서흥군 인민위원회에 맡겨져 장례가 치러졌고, 서흥 부근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마무리

한국 신문의 근대적 발아점을 되돌아볼 때, 제국 일본의 식민지하에서 발간된 조선어 민간 3개지 중, 2개지가 현존하여 한국언론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민간 3개지의 하나였던 『조선일보』가 재벌 언론사로 급성장한 것은 일제 지배하에서 철저한 친일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오늘날까지 신문재벌 방씨 일가로 연결되어 있기에 단순히 방응모라는 개인 차원을 넘어 한국언론사 연구에서는 『조선일보』와 방응모를 나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방응모의 친일행각은 직접적으로 각종 친일 관변단체에 참여해 현지 강연과 각종 매체를 통해 일제 통치와 군국주의를 찬양했고,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서는 식민지 통치 찬양, 황실 숭배, 침략전쟁 미화 등의 아부성 기사를 통해 친일매국행위를 하였다. 또한, 『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을 통해 방응모는 친일 논설을 직접 써서 일제의 전쟁 도발을 찬양하거나, 일제의 침략전쟁에 전 조선인이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시국 인식과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활동을 했던 점을 『조광』에 실린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방응모가 어떤 인물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별도의 인물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그는 일제하에서 적극적인 친일 활동과 일제 식민지 통치 권력과의 유착을 통해 『조선일보』를 반민족 언론기업으로 육성시킨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방응모는 조선일보와 『조광』을 통해서 ‘친일매국행위’를 일삼고 조선 민중의 ‘민족 독립 의지’를 좌절시키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서 반민족 언론 기업인이었다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 3부 끝.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언론소비자주권행동(박인식 정책위원)  kpcoesj@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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