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은 ‘아언각비’에서 밝히기를, 농어(農魚)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말로,  쉬운 한자로 쓰기 위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했다.

고전번역원의 기록들을 보면 노어(鱸魚)로 되어 있다. 자산어보에는 농어가 검은색 물고기라는 의미를 가진 노어(鱸魚)에서 유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농어의 어린 물고기를 보로어(甫鱸魚) 또는 걸덕어(乞德魚)라고 한다는 기록도 있다. 전라남도에서는 깔때기, 껄떡이, 완도에서는 껄떡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것들은 한자를 우리 식으로 옮기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사시어(四鰓魚) 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농어의 별칭으로, 아가미 뼈가 네 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농어사진 출처 : 우리바다 어류도감
농어(사진 출처 : 우리 바다 어류도감)그림의 위는 민농어이고, 아래는 점농어이다.

 

농어의 맛을 두고 전해지는 말이 있다.
옛날 중국 진나라 시대에 장한(張翰)이라는 사람이 낙양에서 높은 벼슬에 올랐다. 장한은 녹음 짙은 어느 여름날 문득 고향의 송강의 농어 맛이 그리워졌다고 한다. 번민에 빠진 장한은 결국 관직을 버리고 고향 송강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물론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왜 하필 녹음 짙은 여름철에 농어 맛이 그리워졌을까? 농어는 바로 여름철에 그 맛이 최고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그 맛이 좋았으면 벼슬을 버리고 가기까지 하였을까? 그 맛과 함께 어릴 때 뛰어놀던 고향 생각도 함께였을 것이다.

장한이 관직을 떠나면서 남긴 시가 있어 소개한다.

아래 시는 고전번역서인 목은집 4권에 실려 있는 시다.

수레 깃발이 거듭 바닷가 성을 들어가니 / 車斾重過海上城
사람을 만나거든 내 이름 들어 말해 주오 / 逢人爲說鄙夫名
가을이 오매 농어의 흥취를 견디지 못해 / 秋來不耐鱸魚興
풍진 속에 머리 긁는 파리한 사람이라고 / 搔首風塵大瘦生

★, 농어의 흥취 : 진(晉)나라 때 장한(張翰)이 낙양(洛陽)에 들어가 동조연(東曹掾)을 지내다가 가을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자기 고향 오중(吳中)의 순챗국과 농어회를 생각하면서 “인생은 자기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중요한데, 어찌 수천 리 밖에서 벼슬에 얽매일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갔던 고사가 있다.

농어가 바로 그때 산란을 하는 시기다. 그래서 농어의 맛을 두고 ‘7월 농어는 바라보기만 해도 약이 된다’는 옛말이 생겼다. 아마도 음력 7월을 말했을 것이다. 실제로 시장에서는 민농어와 점농어가 같이 있다면 점농어 값이 더 비싸고, 농어가 맛이 들기 시작한 것은 6~9월까지라고 한다. 옛날에는 완도에서도 많이 잡히던 고기다.

물고기들의 주 산란장은 진질이라고 불리는 잘피가 서식하는 곳이다. 완도군 군외면의 사후도와 해남군 북일면의 내동리 사이를 복섬 바다라고 하는데 이곳은 잘피의 대단위 군락지다. 여기에서는 매년 농어를 비롯하여 감성돔, 놀래미 등 다양한 물고기들이 산란을 한다. 잘피 군락지에는 아나고라 불리는 참 장어가 아주 많이 잡히고 그 맛은 장어 중 최고로 친다. 이제 그 많던 잘피 군락지가 없어져 가고 있다.

생각 없는(?) 매립으로 군락지가 없어져 가고 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산란하기 위해 물고기들이 연안을 찾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물고기를 잡으려고 먼바다까지 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편집  :  박춘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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