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가득 형형색색의 단풍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현관을 나서면 새파란 하늘에 빙그르르 미끄러지는 나뭇잎이 머리칼이나 옷깃을 스쳐 대지에 입맞춤합니다. 폭신한 낙엽의 감촉을 즐기면서 산책을 하는데 ‘차라랑 차라랑 차라라랑……’ 기타의 선율이 들려옵니다.

줄지어 선 메타세쿼이아 아래 벤치에 자그마한 어른이 앉아 있습니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발끝을 까딱까딱하면서 연주하는데 예사소리가 아닙니다. 숨죽여 들으면서 감동하다가 혹시 방해될까 싶어서 슬그머니 벤치에서 일어났습니다.

오십 미터쯤 와서 뒤돌아보고, 일백 미터쯤 와서 뒤돌아보았습니다. ‘한번 말을 건네 볼까? 공연히 실례가 되는 건 아닐까?’ 일백오십 미터쯤 와서 뒤돌아보면서 ‘이대로 그냥 돌아가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금살금 다가가서 귀를 기울일 때 다른 곡을 연주하려고 핸드폰을 살피던 어르신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얼른 목례를 하자, 어르신도 응대했습니다.

어쩜 그리도 막힘없이 자유자재로 연주를 할 수 있는지, 벤치 앞에 서서 행복감에 흠뻑 젖었습니다. 핸드폰에서 재생되는 반주가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서 증폭되었고, 그것이 어르신의 기타 연주와 멋지게 어우러졌습니다.

“여기 와 앉아요.”

서너 곡을 더 연주한 어르신이 벤치 한 쪽을 비워주면서 말했습니다. 내내 서 있다가 꾸벅 인사를 하고, 어르신의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그렇게 기타를 잘 치세요? 전 오십 넘어서 기타를 배워보려고 하는데 생각 같지 않습니다.”

슬며시 웃으면서 어르신이 말합니다.

“난 기타를 오십 년 동안 쳤어요. 취미가 아니라 업(業)으로 밴드를 했지요. 기타를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절대로 쉬운 악기가 아니에요. 좋은 선생이나 교본을 선택해서 죽기 살기로 연습해야 해요. 그래도 될 동 말 동한데 적당히 해서 이렇게 연주를 하고 싶어 하지요.”

어르신이 즉흥적으로 연주를 합니다. 역시나 ‘와!’하는데 묻습니다.
“기타를 배우려는 이유가 있어요?”

“제가 음치입니다. 그래서 가족이나 친구들하고 노래방에 가서 시원하게 노래 한번 해본 적이 없어요. 국민학교(어르신의 연세를 생각해서) 1학년 음악 시간에 아이들이 한  명씩 앞으로 나가서 선생님의 풍금에 맞춰서 노래를 불렀어요. 제 차례가 돼서 노래하는데 선생님이 풍금을 쾅! 치더니 ‘야, 넌 앞으로 노래하지 마.”했지요. 친구들은 배꼽이 빠져라 웃었고, 전 그 뒤로 노래해 본 적이 없어요.”

“나쁜 사람이네요. 여기서 색소폰 불던 사람하고, 아코디언 연주하던 사람 본 적 있어요?” “예” 했더니 말씀을 잇습니다. “그 사람들 전부 엉터리예요. 기초가 안 됐죠. 그래서 그분들이 연주할 때 ‘제가 반주를 해도 될까요?’ 하니까 시큰둥하게 그러라고 했어요. 그래서 반주해 줬더니 그다음부터 안 나오더라고요.”

“……. 아, 그래서.”

“예전에는 집 안에 돈은 있고, 대학 갈 실력이 안 되는 사람들이 뇌물을 주고 음대에 많이 갔어요. 그런 사람들이 중·고등학교에서 음악 교사를 했는데 뭘 전공했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우물거리고 말아요. 그런데 초등학교 교사들은 혼자서 이것저것 다 가르치잖아요. 그러니 음악에 대해서 뭘 알겠어요? 그냥 자신의 개인적인 잣대로 함부로 말한 거지요. 노래 한번 해 봐요.”

“예? 노래요?”

“아무거나 노래 한번 해봐요? 음치인지, 아닌지 내가 들어볼게요.”
하면서 반주를 준비합니다.

“…….”
어떻게 하지? 억지로 시켜놓고, 막상 노래를 시작하면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배꼽을 잡고 웃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몸이 굳어버렸습니다.

“전 노래를 하지 않아서 아는 가사도 없습니다.”

“아무거나 괜찮으니까 편하게 해 봐요.”

연세가 지긋한 프로 기타리스트가 이렇게까지 권하는 데야 더 이상 뺄 수가 없습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되지도 않는 노래를 하는데 기타 반주는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너무 부끄러워서 쥐구멍으로라도 숨고 싶은데 어르신이 말합니다.

“음치 아니에요. 남들보다 키가 낮으니까 낮춰서 부르면 되는데 일반적인 키에 맞춰서 부르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오십 년 동안 만나본 사람 중에 진짜 음치는 몇 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지고 부르는 게 중요해요.”

“……?”
벌떡 일어나서 인사를 했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제 나이가 쉰일곱인데 음치가 아니라고 말해 준 분은 선생님이 처음입니다.”

일흔여덟의 연세에 매일 공원에 오셔서 한 바퀴(5km) 돌고 적당한 자리에 앉아서 기타를 연주한다는 어르신. 사모님이나 자녀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걷고, 치매에 걸리지 않으려고 연주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참 멋진 분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기타 연습을 하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전화해서 물어보라고 당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언제든지 공원으로 나오라고 할 만큼 도량도 넓은 어르신입니다.

편집 : 박춘근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오성근 주주통신원  babsangman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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