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이란 무엇인가? <네이버 한자사전>에 제1번으로 나온 뜻과 음은 ‘한 한’이다. 글자 사전의 첫 풀이치고는 볼품이 없다. 한은 한이다. A는 A이다. 이처럼 동어반복(tautology)이니까. 규정하기가 딱하니, 그렇게 할 방법밖에는 없다는 고민도 묻어나온다.

선시(禪詩)라면 동어반복은 심장한 의미를 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부처님이 어디에 계신다는 말인가’(山是山 水是水 佛在何處; 산시산 수시수 불재하처). <금강경 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 나오는 중국 송나라 야보(冶父) 스님의 시구라고 한다.

파자하면, 恨 = {忄[心], 艮}. 마음이 간(艮)이다. 한자에서 부수(部首)는 뜻을 나타내기에, 恨은 마음의 어떤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이제 문제는 艮을 어떻게 풀이하느냐이다.

지난 5월1일 촬영된 지리산 중봉 서사면의 고사한 구상나무와 가문비나무의 모습. 녹색연합 제공,  출처: 한겨레, 2021-07-07.
지난 5월1일 촬영된 지리산 중봉 서사면의 고사한 구상나무와 가문비나무의 모습. 녹색연합 제공, 출처: 한겨레, 2021-07-07.

파자하면, 艮= {門의 왼쪽 부분 , (-), 乀(파임 불), 丿(삐침 별)}. <네이버 한자사전>에서 그 제1번의 뜻은 괘 이름 간, 그칠 간이다. 艮은 주역의 소성괘인 8괘 중 7번 괘이고 산(山)을 나타낸다. 그 상징은 ☶이다. 또한 艮은 대성괘인 64괘 중 52번 중산간(重山艮)이다. 8괘 중 7번 괘가 겹친 괘이다. 그 괘를 풀이한 괘사의 단전(彖傳)에서 말하길, ‘간은 그치느니라’(艮止也).

지명에 山이 들어간 지역은 바닷가에 적지 않다. 예컨대, 예컨대, 북한 강원도 원산(元山), 울산, 부산, 경남 마산, 전북 군산, 충남 서산, 경기 안산, 북한 황해남도 장산곶(長山串) 등이다.  맥이 흘러내려 오다 바다를 만나니, 그 지점에서 그 맥이 그치고 응결하여 산을 형성하는 형세이리라. 그런 연유인지, 부산과 울산은 인구가 100만 명을 넘는 광역지방지치단체인광역시이다. 마산은 예로부터 합포로 불리던 항구였다. 1960년 3ㆍ15 마산의거와 1979년 부마민주항쟁이라는 민주화 운동의 발상지이다. 마산시(1919년~2010년)는 2010년 7월 1일 이후 창원시의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에 속하는 지역이다. 군산, 서산, 안산은 기초지방단체로서의 시이다.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 출처: 경남 산청군(www.sancheong.go.kr).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 출처: 경남 산청군(www.sancheong.go.kr).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中山里)에 가면,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을 만난다. 중산리는 지리산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목이다. 마을지명 유래를 보니, 지리산 산상(山上), 산하(山下)의 중간에 자리를 잡은 마을이라 하여 중산(中山)이다. 중산은 거꾸로 읽으면 산중(山中)이다. 깊은 산속이다.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의 자리에 서면, 사방팔방이 산이 겹치고 겹친 첩첩산중(疊疊山中)이다. 이러한 상황을 나타내는 괘가 바로 중산간(重山艮)이다. 한때나마 그 마을을 중산리(重山里)라고 써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리산 일대에는 얼마나 많은 한이 맺히고 맺혔을까?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 명칭에서 보듯이, 6.25사변을 전후로 지리산 곳곳에서 한은 쌓이기 시작했다. 한쪽은 빨치산으로, 또 다른 한쪽은 토벌대로 각각 총을 들고 산을 올랐던 그들과 그 남은 가족이 겪은 생사의 경험은 그곳에 그대로 한으로 맺혀 응결되었으리라.

야외에는 전차, 장갑차, 헬기, 빨치산이 숨어 지내던 아지트 모형 등을 전시했다.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잡힌 지리산 내원마을의 한 민가를 복원했는데 그곳에는 빨치산이 구들장 아래 숨어 지내던 이른바 ‘구들장 아지트’도 볼 수 있다. 출처: 경남 산청군(www.sancheong.go.kr).
야외에는 전차, 장갑차, 헬기, 빨치산이 숨어 지내던 아지트 모형 등을 전시했다.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잡힌 지리산 내원마을의 한 민가를 복원했는데 그곳에는 빨치산이 구들장 아래 숨어 지내던 이른바 ‘구들장 아지트’도 볼 수 있다. 출처: 경남 산청군(www.sancheong.go.kr).

눈치 빠른 독자는 짐작하셨으리라. 艮이 표상하는 산은 어떤 기운이 내려오다가 그쳐 응결한 대자연이다. 따라서 恨 = {忄[心], 艮}은 어떤 마음이 용솟음쳐 내려오다가 그치고 응결한 그 무엇이리라. 그 응결체는 금강석(diamond)보다 더 강하여 풀리지 않는다. 거의 영원히 남는다. 한 맺힌 사람이 눈을 감는다고 해도 그 한은 후손에게 유전자처럼 전달된다. 관찰하건대, 그렇게 보인다.

가끔 ‘전설의 고향’을 생각한다. 내 고향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는 여느 마을 못지않게 ‘전설의 고향’으로 엮어도 손색없을 한이 서린 마을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9.9.17, 242-244쪽) '도암면 도장리 도장마을 사건'(사건번호: 다-8151호 외 4건)에 따르면, 1951년 3월 17일(음 2월 10일) 새벽 도장리 마을에 진주한 군인들은 주민들을 마을 앞 논으로 모이게 하여 군경 가족은 따로 빼고 청장년 남자들을 다시 선별한 후 그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여 모두 13명이 사살되고 2명이 부상당하였다. 그 후 군인들은 마을을 소각하는 동시에 남은 주민들에게는 화순군 도곡면으로 소개 나갈 것을 명했고, 주민들은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채 마을을 떠났다가 저녁 무렵 다시 돌아와 시신을 수습하였다. 이날 국군 제20연대 3대대가 도장리에서 청장년 남자들을 빨치산이라는 혐의로 집단살해한 사람은 모두 15명이었다. 그중 9명이 진주 형씨 문중의 후손이었다. 총상을 입은 사람은 3명이었다. 제삿날이 같은 사람이 15명이었으니, 응결된 한이 얼마나 거대하고 단단하겠는가. 그 유가족, 당시 용하게도 현장에서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 형씨 문중 후손 등은 오늘날 흔한 말로 ‘트라우마’로 한평생 고생해야 했다.

<골령골의 기억전쟁>. 표지는 박건웅 화백이 그렸다. 출처: 한겨레, 2020-06-25.
<골령골의 기억전쟁>. 표지는 박건웅 화백이 그렸다. 출처: 한겨레, 2020-06-25.

어느 마을에나 전해져올 만한 이야기다. 6·25사변 때, 군인에 간 열아홉 살 자식을 둔 아주머니는 새벽마다 우물에 나가 물을 길어와 집 뒤 안의 장독대에 정화수를 놓고 빌었다. 어느 날 새벽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집으로 오다가 갑자기 정신이 흐릿해지면서 손이 풀렸다. 그만 물동이는 땅에 떨어져 깨져버렸다. 그로부터 달포쯤 지나 우체부가 왔다. 전보였다. 그 아들의 전사 통지서였다. 어찌 목 놓아 대성통곡하지 않겠는가. 겨우겨우 눈을 뜨고 전사한 날짜를 보자마자, 미칠 지경에 이르고 정신을 놓아버렸다. 인간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넘어버린 상황이었다. 아들이 전사한 날짜가 바로 물동이가 깨진 날이었다. 어머니와 자식은 이처럼 서로 감응한다고 하더이다. 아주머니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모든 흐름이 물동이 깨진 그해 그날 새벽 시간에 그치고 응결된 삶을 사셨다. 어머니가 아들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 한스러운 나날이었다. 고향 동네에서 1960년대 후반 초등생 시절에 본 어느 선한 아저씨는 보통 사람보다 일찍 하늘로 가셨다. 그분의 아들은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그 아저씨에게는 아들의 전사가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넘어가 버린 '정신적 외상사건'(traumatic event)이었으리라.

대한민국 103년 11월 03일

편집: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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