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늘 생각나는 한시가 하나 있습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화석정’(花石亭)입니다. 많은 사람이 잘 아는 너무나 유명한 시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 한문 시간에 이 시를 처음 접한 뒤 너무 마음에 들어 지금까지 애송하고 있습니다. 요즘 가을 단풍 숲속 사진들을 SNS로 보내는 지인들이 많은데 그 사진들을 보며 문득 그 시가 생각납니다. 

​임진강 위에서 바라본 임진적벽에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다. 임진적벽은 화석정에서 바라보이는 적벽이다(글, 사진 출처 : https://www.hani.co.kr/arti/area/capital/914699.html).
​임진강 위에서 바라본 임진적벽에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다. 임진적벽은 화석정에서 바라보이는 적벽이다(글, 사진 출처 : https://www.hani.co.kr/arti/area/capital/914699.html).

 

花石亭(화석정)

林亭秋已晩 (숲속 정자에 가을이 깊으니) 
騷客意無窮 (시인의 생각은 끝이 없어라)
遠水連天碧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붉도다)
山吐孤輪月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하였고)
江含萬里風 (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 (변방의 기러기 어디로 날아가는고)
聲斷暮雲中 (울음소리 저무는 구름 속에 끊어지네)

시에 사용된 한자가 대체로 쉬워서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은 시입니다.

林亭 : 숲속의 정자 (花石亭은 경기도 파주의 임진강 근처에 있는 정자입니다)
騷客(소객) : 떠들 소(騷), 나그네 객(客). 시인 또는 문사 자신을 뜻하는 말입니다.
無窮(무궁) : 끝이 없음
遠水 : 멀리 보이는 물. 구체적으로 이 시에서는 임진강을 가리킵니다.
霜楓 : 서리 상(霜), 단풍 풍(楓). 서리 맞은 단풍 
孤輪月 : 외로운 둥근 달
萬里風 : 만리의 바람,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
塞鴻 : 변방 새(塞), 기러기 홍(鴻). 북쪽 변방에서 날아오는 기러기
暮雲 : 저물 모(暮), 구름 운(구름). 저무는 구름, 저녁 구름

그러면 시를 한번 소리 내어 읽어봅시다. 앞 두 글자, 뒤 세 글자로 끊어서 읽습니다. 감정을 최대한 실어서 고저장단을 살려가며 읽으면 시가 더욱 가슴속에 스며들 겁니다.  

林亭 秋已晩하니
騷客 意無窮이라
遠水 連天碧이요
霜楓 向日紅이라
山吐 孤輪月이요
江含 萬里風이라
塞鴻 何處去오
聲斷 暮雲中이라

어떻습니까. 늦가을의 감흥이 가슴 속으로 밀려들지 않는가요? 이 시는 오언율시(五言律詩)입니다. 다섯 글자로 이뤄진 구(句)가 8개입니다. 2개의 구가 모여서 한 연(聯)을 이루는데 이를 순서대로 수련(首聯), 함련(頷聯), 경련(頸聯), 미련(尾聯)이라고 부릅니다. (또는 발단(發端), 함련(頷聯), 경련(頸聯), 낙구(落句)라고도 부릅니다.) 이 4개의 연은 기-승-전-결의 성격도 지닙니다. 오언율시에서는 함련과 경련이 각각 대구(對句)를 이루는 게 원칙입니다. 그리고 그 대구의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가를 살피는 것이 율시의 중요한 감상 포인트입니다.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이 시의 수련(首聯)입니다. 숲속 정자에 이미 깊은 가을, 만추(晩秋)가 찾아왔습니다. 숲속을 거니는 화자인 시인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상념이 끝이 없습니다.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이 시의 함련(頷聯)입니다. 눈을 들어 보니, 멀리 보이는 강물은 하늘에 맞닿아 푸르고, 가까이 있는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을 받아 더욱 붉습니다. 원경(遠景)과 근경(近景), 푸른 색과 붉은 색이 완벽한 대구를 이룹니다. 황홀한 색감이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전해줍니다.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시의 경련(頸聯)인데 이 시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입니다. 산은 외롭게 홀로 떠 있는 둥근 달을 토하였고, 강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고 있습니다. 산과 강, 달과 바람이 절묘한 조화와 대구를 이룹니다. (이 시를 배우면서 ‘산이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하였다’는 대목에서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밖을 향해 밀어내는 토(吐)와 안으로 끌어당기는 함(含)이 오묘하게 어우러집니다. 정(靜)적인 달을 산이 ‘토해낸다’고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동(動)적인 바람은 오히려 강이 ‘머금었다’고 해서 정적으로 그려냈습니다. 동(動)과 정(靜)의 역설적인 배합을 통해 시의 감흥은 더욱 증폭됩니다.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이 시의 마지막 마무리 미련(尾聯)입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기러기들이 날아갑니다. 늦가을 북쪽 변방에서 날아오는 기러기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저물어 가는 저녁 구름 속에 기러기 울음소리 끊어지는구나. 이제는 ‘시각’에 이어 ‘청각’까지 시의 대상이 확장됩니다. 기러기 울음소리가 멀어지면서 이 시도 아스라한 여운을 남기며 끝납니다. 영화의 ‘페이드 아웃’ 같은 느낌입니다.

오언율시는 시의 짝수가 되는 구절의 끝 자에 같은 음운의 글자를 써야 합니다. 이른바 압운(押韻)입니다. 한자의 초성(初聲), 중성(中聲), 종성(終聲) 세 가지 소리 중 초성을 자모(字母)라 하고 중성과 종성을 합해서 운모(韻母)라 하는데, 운모가 같은 글자로 맞추는 것이 압운입니다. 이 시를 보면 2구, 4구, 6구, 8구의 끝이 窮(궁), 紅(홍), 風(풍), 中(중)으로 돼 있어 압운을 정확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시는 율곡이 불과 여덟 살의 나이에 지었다고 합니다. 화석정은 본래 고려말의 학자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살던 곳인데 율곡의 5대조인 이명신(李明晨)이 물려받아 세운 정자입니다. 율곡이 여덟 살 때 화석정에 올라가 이 시를 지었다고 해서 이 작품은 ‘팔세부시’(八歲賦詩)라고도 불립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막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 어린이의 작품이라고 믿어지나요? 시상(詩想)의 전개나 형식적 완결성이 도저히 여덟 살 어린이가 썼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원숙하고 뛰어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율곡의 천재성을 너무 과장해서 나온 말일 뿐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율곡이 세상을 뜬 뒤 제자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지은 율곡 행장(行狀 : 고인의 행적과 성품 등을 기록한 글)을 보면 화석정 시를 율곡이 여덟 살 때 지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8세에 스승에게 글을 배워 학업이 날로 진취하였다. 일찍이 화석정에 올라가 시를 지었는데, 그 격조(格調)가 완전하게 이루어져 아무리 시율(詩律)에 능한 사람도 따를 수 없었다.”  <율곡집>에도 이 시 밑에 ‘계묘년 8세작(癸卯年八歲作)’이라고 명시돼 있다고 합니다. 율곡은 과거에서 무려 9차례나 장원을 해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의 천재 중의 천재였습니다. 여덟 살 때 이미 이런 시를 쓸 정도의 뛰어난 문재(文才)를 발휘했다고 믿을 수밖에요.

사족 하나. 이 시의 마지막 구에 들어 있는 ‘단’(斷) 자가 율곡 선생의 단명을 예고했다는 후세 시람들의 해석도 있습니다. 율곡은 50의 나이를 미처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한창 일할 장년의 나이에 죽은 것이 이 ‘단’자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호사가’(好事家)들이 그냥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화석정은 율곡이 은퇴한 뒤에 머물며 독서하고 후학을 가르친 장소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고 현종 때인 1673년에 중수한 것도 역시 6·25전쟁 때 소실됐습니다. 현재의 화석정은 그 터에 1966년 파주의 유림에서 성금을 모아 지은 것으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며칠 전 화석정 시를 두고 카톡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한 선배분이 이런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화석정은 머리 아픈 일이 있을 때 가끔 찾던 곳인데, 이제는 바로 밑으로 4차선 도로가 생겨 율곡 선생이 읊었던 그 멋진 정취가 사라져 버려 너무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배운 지 어느덧 4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감흥은 여전히 가슴에 살아 있습니다. 며칠 전 11월을 맞아 몇몇 친구들한테 이 한시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학교 때 배운 기억이 난다” “아~ 술이 아니 댕길 수가 없네” 등의 답신이 오더군요. 술 한 잔 들고 창밖의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화석정’ 시를 읊조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듬뿍 만끽하면서. ** 

 

<편집자 주> 김종구 언론인은 1988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서 한겨레21 편집장, 한겨레신문 편집국장, 편집인,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남서울대 객원교수, 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로 매스컴과 글쓰기 등의 강의를 하고 있다.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김종구 언론인  kjg21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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