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태일 평전』 대 『전태일 바로 보기』

총성이 울리고 포탄이 떨어져 시체가 나뒹구는 현실만이 전쟁은 아니다. 집단의식을 산산 조각내 색다른 의식으로 포박하는 행위 역시 또 다른 전쟁이다. 영화로, 연극으로, 드라마로, 책으로, 학술대회로, 그리고 학교교육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은 매일 계속된다. 역사 청산이 전무했던 우리 사회에선 어쩌면 충분히 예견된 일이다.

세월호 참사를 단순 ‘해상 교통사고’로 치부한 정치인들이 있었다. 한 술 더 떠 “세월호로 회쳐 먹고 찜 쪄 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먹고 진짜 징하게 해쳐먹는다.”고 했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선체가 기울어진 상태로 침몰 중인 세월호. 단원고 2학년 학생 250명과 인솔교사 12명을 포함해 승객 304명이 참사를 당했다. (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선체가 기울어진 상태로 침몰 중인 세월호.   
단원고 2학년 학생 250명과 인솔교사 12명을 포함해 승객 304명이 참사를 당했다. (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시체 팔이’ 장사를 운운한 적도 있고 어느 정치인은 “세월호 그만 좀 우려먹으라”며 “징글징글하다”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5월 광주민중항쟁 당시 학살당한 5·18 민주화운동 유가족들을 겨냥해 어느 정치인은 ‘괴물집단’이라 비난했다. 모두 지난 해 발생한 사건들이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 180도 정반대 견해를 드러냄으로써 사회적 논란과 갈등을 표출하는 사회가 우리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이다. 학교민주시민교육도 마찬가지이다. 

2020년 7월 22일 국회 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강민정 의원(열린민주당), 박찬대 의원(더불어 민주당), 권인숙 의원(더불어 민주당)이 공동 주최한 <학교민주시민교육> 관련 학술대회 포스터(출처 : 하성환)
2020년 7월 22일 국회 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강민정 의원(열린민주당), 박찬대 의원(더불어 민주당), 권인숙 의원(더불어 민주당)이 공동 주최한 <학교민주시민교육> 관련 학술대회 포스터(출처 : 하성환)

민주시민교육법 관련하여 어떤 국회의원은 적극 법안을 발의해 주는가 하면 다른 의원은 아예 만나주지도 않는다. 여전히 민주시민교육에 대해 불온한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민주시민교육지원법 입법 발의에 대응하여 보수단체에서 개최한 토론회 포스터(출처 : 장은주 교수 제공) 민주시민교육지원법을 반대하는 토론회가 정경희 의원(국민의 힘)과 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 교수 모임(정교모) 공동 주최로 공교롭게도 국회 의원회관 제2 세미나실에서 개최되었다.
민주시민교육지원법 입법 발의에 대응하여 보수단체에서 개최한 토론회 포스터(출처 : 장은주 교수 제공) 민주시민교육지원법을 반대하는 토론회가 정경희 의원(국민의 힘)과 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 교수 모임(정교모) 공동 주최로 공교롭게도 국회 의원회관 제2 세미나실에서 개최되었다.

심지어 학교민주시민교육 관련 학술토론회의 경우, 시차를 두고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맞불을 놓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 현대사에 깊이 영향을 미친 똑같은 인물을 두고도 시각의 차이는 확연하다. 바로 <전태일>에 대해 180도 상반된 시각으로 저술된 책이 4년 전에 출간되었다. 『전태일 평전』에 맞서는 『전태일 바로 보기』가 바로 그 책이다.

『전태일 평전』 은 1983년 전두환 5공 정권 시절  처음 출간죄었다. 당시엔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펴냈는데 출간 당시 저자 이름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그러다가 87년 6월 항쟁 이후 출판의 자유를 누리게 되면서 1991년 <전태일 평전>으로 개정판이 나왔다. 그때 처음으로 저자가 조영래 인권변호사였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물론 조영래 변호사는 개정판 발간 며칠을 앞두고 1990년 12월 폐암으로 숨졌다.

박종철 군 스스로 자신의 삶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고백한 <전태일 평전>은 1983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초판본이 나왔지만 군사정권 시절 저자 이름을 밝힐 수 없었다. 1991년 1차 개정판이  <전태일 평전>이란 제목으로 나오면서 글쓴이가 1세대 인권변호사 조영래였음이 밝혀졌다. 조영래 변호사는 1차 개정판이 나오기 직전에 투병 중 별세했다. 고3시절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주동한 혐의로 정학처분을 받기도 했지만 서울대학교 시험에서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다. 70-80년대 민주화운동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1990년 12월 폐암으로 작고했다.(출처 : 돌베개)
박종철 군 스스로 자신의 삶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고백한 <전태일 평전>은 1983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초판본이 나왔지만 군사정권 시절 저자 이름을 밝힐 수 없었다. 1991년 1차 개정판이  <전태일 평전>이란 제목으로 나오면서 글쓴이가 1세대 인권변호사 조영래였음이 밝혀졌다. 조영래 변호사는 1차 개정판이 나오기 직전에 투병 중 별세했다. 고3시절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주동한 혐의로 정학처분을 받기도 했지만 서울대학교 시험에서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다. 70-80년대 민주화운동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1990년 12월 폐암으로 작고했다.(출처 : 돌베개)

90년대 7차 교육과정부터 청년 전태일의 삶과 죽음은 교과서에 실리기 시작했다. 모두 민주화 열풍이 가져온 ‘교과서 제자리 찾기’였다. 그때부터 자라나는 아이들이 <전태일>을 공부했다. 그렇게 90년대를, 2000년대를, 그리고 다시 2010년대를 보냈다. 오늘날 초중고 학생들에게 <전태일>은 매우 낯익은 존재이다. 제도권 학교교육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학습해 온 덕분이다.

거꾸로 60대 이후 세대는 청년 <전태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한 청년이었는지 잘 모른다. ‘한강의 기적’을 박정희로 등치시킬지언정 <전태일>이 그들의 머릿속에 잘 떠오르지 않는다. 모두 제도권 학교 교육에서 <전태일>을 학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2년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에  지상 3층으로 건립된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 전경. (출처 : 하성환)현재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기념 전시만 하고  도서관은 운영하지 않고 있다. 
2012년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에  지상 3층으로 건립된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 전경. (출처 : 하성환)현재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기념 전시만 하고  도서관은 운영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100억불 수출 달성’, ‘새마을 운동’, 그리고 ‘박정희’를 떠올린다. 당시엔 그렇게 시험문제가 나왔다. 나이든 세대 머릿속엔 「한강의 기적 = 박정희」 신화가, 그리고 정주영, 이병철을 비롯한 재벌들 얼굴들이 깊이 각인되었다. 그런 측면에서 학교교육은 알튀세르의 표현대로 철저하게 이데올로기 그 자체였고 학교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국가장치였다.

문제는 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를 거치면서 뉴라이트 세력이 내재된 위기감을 표출하며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정치세력화를 통해 이명박 당선에 일등공신을 자처했다. 그리고 곧바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심히 왜곡되었다며 그들 스스로 대안 교과서 『한국근현대사』를 발간했다. 그게 2008년도 일이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2009 개정 교육과정 당시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를 전격 폐기시켰다. 당시 『한국근현대사』 과목은 수능 사회탐구 과목으로 전국에서 네 번째로 응시생수가 많았던 과목이다. 그런데 2009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된 2011년부터 『한국사』 과목에 통합시켜 학교교육과정에서 완전 배제시켜 버렸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하면 ‘오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사회 ‘오늘’은 근현대사가 낳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육선진국은 대부분 자유발행제를 토대로 교과서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검정제 교과서도 못 미더워했다. 한 마디로 시대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슬렀다. 한술 더 떠 검정제 『한국사』 교과서마저 믿을 수 없다며 국정제 교과서 편찬을 강행했다. 그런 경색된 정치 분위기를 발판 삼아 2014년 서북청년단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조차 일었다. 극우 세력들이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고개를 들었다. 박근혜 정권이 판을 벌린 결과였다. 그러다 2016-2017년 시대의 불의에 맞서 들불처럼 일어난 촛불시민혁명으로 폭망했다. 바로 그  즈음 뉴라이트 학자들이 『전태일 바로 보기』(2017)를 발간했다. 전열을 재정비하려는 모습이다.

『전태일 바로 보기』 는 『전태일 평전』을 인용하며 비틀기를 시도한 책이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먼저 “전태일 당시, 한국 여공들의 근로조건이 열악했던 것은 한국 경제의 발전 단계에 비추어서 평가되어야 한다”(166쪽)고 역설한다. 그리고 “당시 근로조건이 나쁘고 임금수준이 낮았던 것은 한국경제의 발전 단계가 그 수준밖에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그(글쓴이 주 : 전태일)가 강조하는 근로기준법은 당시 한국사회가 지킬 수 없는 법이었다.”(160쪽)고 강변한다. 한 발 더 나아가 “노동자의 처지가 개선된 것이 노동운동 덕분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 사회 전체에서 전태일의 업적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159쪽)고 강조한다.

한 마디로 한국 경제발전 단계에 비춰 볼 때 당시 열악한 근로조건은 전혀 문제될 게 아니라는 주장이다. 더구나 노동조건이 개선된 것은 한국 경제 발전이 이뤄지면서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초중고 교과서에서 전태일을 알리는 이유를 “교육을 통해서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을 주입시키고 현재, 그리고 미래 한국 사회를 그들의 관점에서 변화시키려는 의도 때문”(167쪽)이라고 비판한다.

『전태일 바로 보기』를 쓴 다른 편저자는 교과서에서 전태일을 ‘신격화’, ‘우상화’하는 행태에 대해 멈출 것을 주장한다. “사실 왜곡이 심하다”며 “오늘날 쾌적한 환경이 갖춰진 게 전태일을 비롯해 노동자들의 외침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무리 쾌적한 환경을 외치더라도 환경을 개선해 줄 자본이 없다면 소용없는 일”(175쪽)이라며 노동환경을 개선해준 것은  ‘자본’ 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학교교과서에 “건국대통령(글쓴이 주 :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큰 비중으로 다루기보다 일개 노동자(글쓴이 주 : 전태일)의 분신을 더 중요하게 다루고”(183쪽) 있다고 비판한다.

결국 “오늘날 노동환경이 나쁘지 않은 것은 전태일의 죽음이 원인이 아니라 전태일 같은 환경에서도 노사가 협력하여 상황을 이겨내고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한 탓”(186쪽)이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당시 “부당했던 상황을 정치인이나 기업가의 잘못이나 탐욕으로 설명하는 것은 올바른 설명이 아니며(중략)... 경제가 발전하여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려는 근로자가 없어졌기 때문”(205쪽)이라고 주장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전태일 바로 보기』를 발간한 저의가 무엇 때문인지 그 의도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결론적으로 『전태일 바로 보기』에서 어떤 글쓴이는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이 “전태일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보다 특정 목적을 위해 사실을 왜곡했다”(47쪽)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죽음을 택한 것은 오히려 비겁하고 손쉬운 선택”(70쪽)으로 “전태일의 극단적인 선택은 불가피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아름답지도 않다”(71쪽)고 주장한다.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돌베개)이 전태일을 너무 신격화, 우상화했다며 비판한  <전태일 바로보기>(비봉, 2017) 책 표지(출처 : 하성환)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돌베개)이 전태일을 너무 신격화, 우상화했다며 비판한 <전태일 바로보기>(비봉, 2017) 책 표지(출처 : 하성환)

『전태일 바로 보기』는 강원대, 성신여대, 연세대, 중앙대, 명지대 교수들과 한국자유연합, 문화평론가, 변호사, 잡지 편집위원 등 저자가 다양하게 구성돼 있다. 그 중에는 ‘일베’를 두둔하고 일본군 위안부를 ‘매춘부’와 비슷하다고 망언을 한 사람도 있다. 그는 <뉴라이트 전국연합> 공동대표와 한나라당 참정치운동 공동본부장,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렇다면 <전태일>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출생했다. 피복 봉제 노동일을 했던 아버지 전상수 님과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해방 직후 1946년 대구 9월 총파업 당시 참여했다가 고초를 겪었다. 이소선 여사의 아버지이자 전태일의 외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을 하다 일경에 피검돼 학살됐다.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정신대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당하다 탈출했다.

어린 시절 전태일의 삶은 절대빈곤 그 자체였다. 봉제공 기술을 지닌 아버지가 시작한 사업이 사기를 당해 망하자 1964년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의 폭음과 폭행을 피해 어머니는 서울로 무작정 가출해 식모살이, 식당 보조를 전전했다. 16살 전태일은 막내(전순덕)를 데리고 어머니를 찾아 무작정 서울로 갔다. 동생 전태삼도 어린 나이에 가출해 서울에서 거지생활을 하였다. 전태일은 막내(전순덕)를 천호동 보육원에 맡기고 닥치는 대로 일을 시작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아이스케이크 장수, 우산 장수, 손수레 뒤밀이, 평화시장 시다 생활을 했다.

17살이 되던 1965년, 평화시장 내 영세한 봉제공장 <삼일사>에 미싱사 견습공(시다)으로 취업했다. 그리고 1년 만에 미싱사 보조에서 그해 가을엔 <통일사>로 옮겨 미싱사로 취업했다. 단기간에 미싱사로 변신한 데에는 대구 시절 당시,봉제공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봉제 일을 배웠기 때문이다. 18살이던 전태일은 자신이 재단사가 되면 사장과 협의하여 어린 시다들의 근로 환경과 처우를 개선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미싱사 월급보다 적은 재단사 보조로 공장을 바꿔 <한미사> 재단사 보조로 취업했다. 그리고 드디어 1년 뒤인 1967년 <한미사> 재단사가 되었다. 전태일은 재단사가 되었음에도 하루 15시간 이상 중노동에 시달렸다. 당시 전태일이 쓴 일기장엔 이렇게 적혀 있다.

“끝 날이 인생의 종점이겠지.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 ...... 육체적 고통이 나에게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없어도 좋겠다. 미싱 6대에 시다가 여섯 명, 그 사람들이 할 걸 나 혼자서 다 해주어야 하니 다른 집 같으면 재단사, 보조, 시아게 잘하는 사람 3명이 할 일을 나 혼자 하니 정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언제나 이 괴로움이 다 없어지나? ......” - 1967년 3월 17일 일기에서 『전태일 평전』 128-129쪽.

초고속으로 재단사가 되었지만 <한미사> 사장은 겉으론 호인인 척하면서 전태일을 혹사시켰다. 전태일이 쓴 글 속에 <한미사> 사장을 위선적인 ‘이중인격자’로 표현하였다. 고통 속에서도 전태일은 버스비 30원을 아껴서 13살, 14살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 30개를 사서 나눠주었다. 어린 여공들 6명에게 자신을 내어 주고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도봉구 창동까지 걸어 다녔다. 전태일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점심으로 밀가루 찐 빵을 신문지에 싸주었다. 그러나 점심을 싸오지 못한 어린 영혼들 앞에서 차마 펼칠 수가 없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2005년 6월1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열린 제16회 <민족민주열사> 범국민 추모제에서 아들의 영정을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2005년 6월1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열린 제16회 <민족민주열사> 범국민 추모제에서 아들의 영정을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어린 여공들을 향한 전태일의 마음은 육신의 고통 이상으로 괴로웠다. 언젠가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이렇게 심정을 토로한 적도 있었다.

“어머니, 순덕이(글쓴이 주 : 전태일 막내 동생)보다 작은 애도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는데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먼지구덩이 속에서 굶으면서 애쓰고 있는 걸 보면 인간이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 아이들이 기특하기도 하고 불쌍해 보이기도 합니다.” - 조영래(2005). 『전태일 평전』. 돌베개. 125쪽.

『전태일 바로 보기』 는 전태일이 미싱사 보조-미싱사-재단사 보조-재단사로 초고속 승진한 것을 언급한다. 그리고 통계 수치를 비롯해 전태일이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 요인을 제대로 분석했다. 봉제공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봉제일을 배웠기에 가능했다. 또한 미싱사 시다 월급과 재단사가 된 전태일의 월급을 비교한 것도 사실에 부합한다. 실제로 재단사 전태일은 당시 월급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스물두 살 청년 전태일이 절망적인 노동현실에 분노하며 근로기준법을 불태우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절규한 것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 바로 휴머니즘이 내면에 짙게 깔려 있음을 발견한다. 가혹한 노동현실 앞에서 어린 여공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은 전태일을 한 인간으로서 성숙시켜 나갔다.

가혹한 노동현실을 개선해 보려고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대통령 박정희를 <국부>로 칭하며 편지도 썼다. 그리고 무엇보다 열악한 작업장 현실을 기사화한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서 자신들이 수고한 활동의 결과에 스스로 고무돼 축제 분위기로 들뜨기도 했다. 뭔가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로 한껏 부풀었다. 근로조건을 개선해 준다는 평화시장 내 봉제업체 사장들 말을 믿고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전태일을 절망하게 만든 것은 ‘변화하지 않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전태일은 1970년 8월 9일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 조금만 더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 조영래(2005). 『전태일 평전』. 돌베개. 144쪽.

<전태일>의 죽음을 비하하며 당시 참담한 노동현실을 ‘한국경제의 성장’, 바로 ‘자본의 성장’으로 개선된 것처럼 분석하는 것은 학자로서 취할 자세는 아니다. 더더욱 <전태일>을 초중고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것을 마치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을 주입하는 것으로 강변하는 것은 『전태일 바로 보기』 라는 책을 출간한 저의를 노골화한 느낌이다. 왜냐하면 <전태일>이 자신을 불사르고 근로기준법을 불태우면서 외쳤던 절규를 기억한다면 감히 그런 망언을 학술적인 글쓰기인 것처럼 포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전태일>이 자신의 몸과 근로기준법을 불사른 그날, 병원에서 숯덩이처럼 까맣게 탄 몸으로 <전태일>은 어머니와 마주한다.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께 약속을 다짐 받는다. 그 모습을 이해한다면 그런 망언들을 감히 쓸 순 없으리라! 더더구나 일베도 아니고 대학교수의 직함을 이용하여 그런 글을 써서 책으로 엮어낼 수는 없다.

온몸이 숯덩이처럼 까맣게 타버리고 눈꺼풀은 뒤집힌 상태로 입술은 퉁퉁 부었다. 게다가 살결은 화상으로 터져버렸기에 어머니조차 아들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 참혹한 형상을 보면서 어머니는 아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어미된 심정에서 죽어가는 아들을 한없이 애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신을 감싼 화기를 가라앉혀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려고 15,000원 하는 값비싼 주사를 놓아달라고, 집을 팔아서라도 갚겠다며 의사에게 간청했지만 거부당한다.

<전태일>이 어머니에게 한 첫 마디는 “어머니, 놀라시면 안 됩니다!”였다. 그리고 “어머니, 담대하세요! 마음을 굳게 가지세요! 그래야 내가 말을 하겠습니다.”라고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그리곤 찬찬히 어머니께 다음과 같이 다짐을 받았다.

2005년 전태일 거리(청계천 6가 버들다리)에 조성된 전태일 기념 반신상.(출처 : 하성환).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행동하는 양심 전태일, 영원한 우리들의 영웅 전태일> 문구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을 향한 고귀한 희생>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2005년 전태일 거리(청계천 6가 버들다리)에 조성된 전태일 기념 반신상.(출처 : 하성환).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행동하는 양심 전태일, 영원한 우리들의 영웅 전태일> 문구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을 향한 고귀한 희생>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만은 나를 이해할 수 있지요? 나는 만인을 위해 죽습니다. 이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버림받은 목숨들, 불쌍한 근로자들을 위해 죽어가는 나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조금도 슬퍼 마세요. 두고두고 더 깊이 생각해 보시면 어머니도 이 불효자식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 저를 원망하십니까?”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담담히 아들 손을 꼭 잡고 대답했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 어찌 원망하겠니? 원망하지 않는다.” 전태일은 빙그레 웃으며 마지막 말을 힘겹게 이어갔다.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 주십시오.” 그러자 어머니가 죽어가는 아들에게 다짐했다. “그래, 아무 걱정 마라!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게!”

이한열 열사 상주를 맡아 발언하고 있는 이소선 여사. (출처 : 전태일기념관 제공. 한겨레 신문)
이한열 열사 상주를 맡아 발언하고 있는 이소선 여사. (출처 : 전태일기념관 제공. 한겨레 신문) 
이소선 여사는  아들 태일이의 뜻을 이어 받아 노동자의 어머니이자 민주화운동가로 평생을 사셨다.

어린 영혼들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며 근로기준법전을 자신과 함께 불살랐던 스물두 살 청년 전태일!, 그의 죽음은 ‘휴머니즘’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다. 친구를 위해 죽는 것만큼, 이웃을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내어주는 것만큼 고귀한 것은 없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전태일의 삶과 죽음은 우리사회에 넓고 깊게 파장을 일으켰다. 이제 더 이상 그 죽음을 왜곡하지 않았으면 한다. 오히려 22살 청년노동자의 죽음을, 그 아름다운 영혼 앞에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숙한 공동체로 거듭났으면 한다. 그것이 22살 청년노동자의 죽음에 값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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