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학창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경주수학여행 못간 것을 안타깝게 여긴 아내가 20여 년간 마음에 두었다가 몇 년 전 부터 경주여행을 가자고 채근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둘째 아들이 11월2일~4일까지 2박3일의 일정으로 덜컥 호텔을 예약하는 바람에 등 떠밀려 6학년 6반의 나이에 늦깎이 경주수학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2년 가까이 코로나 여파로 여행 한 번 못간 아내는 며칠 전 부터 들떠서 여행준비에 푹 빠져 있었다. 11월2일 나의 사랑하는 중고차에 아내와 막둥이를 태우고 여행짐을 트렁크에 싣고 아침8시 사람들의 출근시간에 우리 가족은 설레며 여행길을 달렸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출근길은 고속도로에서도 경기도 이천까지 서행을 하며 밀렸다. 아마도 SK반도체와 협력업체 직원들의 출근이 많은 것 같았고 우리 산업의 건강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흡족한 마음으로 러시아워를 즐기며 서행했다.

5시간 걸려 경주에 도착한 우리는 허겁지겁 불고기 백반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대릉원 관람을 시작했다. 제주도 오름보다는 턱 없이 작지만 메추리알만 한 일반인의 산소에 비하면 타조알 보다 큰 수십 기의 대릉이 평원에 펼쳐져 있는 것에 내심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름도 비석도 없는 왕과 왕족들 수십 기의 무덤을 보노라니 어떤 무상하고 허전한 감상이 밀려왔다. 신라 김씨 왕조를 시작한 13대 미추왕릉(262~284년 재위)은 유일하게 담장으로 둘러싸여 독립적인 공간을 차지하며 바위만한 돌 의자가 왕릉 앞에 놓여있어 그래도 왕의 위엄을 느끼게 하였다. 천마총이라 이름 지어진 왕릉은, 신라의 국호와 왕의 칭호를 시작한 22대 지증왕(500~514년 재위)의 무덤이라고 추정하는데 왕릉 내부에 전시된 물품들을 보니 온통 황금 장신구들이 찬란함을 뽐내고 있었다. 왕의 영혼을 태우고 하늘을 날아가라는 소원으로 자작나무 껍질로 그린 흰말이 마치 구름 위를 달리는 천마 같이 사실감 있게 표현되어 능 이름을 천마총이라 명명했으리라. 황남대총은 쌍분릉으로서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가장 큰 능이라고 한다. 총면적 약 600,423m2(181,627평)의 평원에 누워있는 수십 기의 고분들을 보노라니 감상에 젖어 시를 읊으며 첨성대로 향했다   

한 나라의 왕이었어도 / 못 다 이룬 꿈이 있네 / 육신은 늙어 릉 안에 누웠으나 / 이루어야 할 국가경영의 대업 / 누천년 꿈으로 부풀어 오르네 / 그 꿈 부활하여 비상할 때 / 한반도는 우주를 활공하리라

신라 22대 지증왕릉으로 추정되는 천마총
신라 22대 지증왕릉으로 추정되는 천마총
천마총 내부에 전시된 유물
천마총 내부에 전시된 유물
천마도: 왕의 영혼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백마를 형상화 함
천마도: 왕의 영혼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백마를 형상화 함
신라 13대 미추왕릉. 능 앞에 돌의자와 석상이 보인다
신라 13대 미추왕릉. 능 앞에 돌의자와 석상이 보인다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 때(재위 632~647) 축조된 높이 9m 정도의 천문 관측기구로 추정하지만 '점성대' 라는 별칭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별자리를 관측하여 왕실의 길흉을 헤아리던 역할도 하였던 것으로, 왕궁과 가까운 평지에 건축한 이유를 깨닫게 한다. 첨성대는 안정감 있게 위로 좁아지며 우아하게 흐르는 곡선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이 편안하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다. 그런 곡선미가 우리 민족의 독창적 정서로서 기와지붕, 여인의 한복과 버선, 고려청자와 조선 백자 등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다른 민족은 감히 흉내 내지 못하는 독특한 '한국의 멋'이 된 것은 아닌가 상상해 보았다

첨성대 전경
첨성대 전경

 

첨성대를 나와 대릉원을 끼고 10분 남짓 걸으니 교동마을 최씨 고택에 다다랐다. 깨끗하게 잘 복원된 한옥마을은 언제 보아도 마음이 따뜻하고 포근해 진다. 나는 예전부터 그런 감정이 데자뷰 현상일까,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내 몸속의 유전자에 수백여 년 조상들이 한옥에 살았던 유전자가 각인되어 나타나는 낯설지 않고 친근한 감정으로 우리 민족의 공통 정서라고 생각한다. 최씨 고택은 신라 요석공주가 살았던 요석궁 터에 경주 최씨 최언경(1743~1804)이 터를 잡아 정착하면서 약 200년 동안 종택을 유지해 왔다고 한다. 최부자집에서 전해오는 전통은 진사 이상의 벼슬은 금지했고, 만석 이상의 재물은 모으지 말며, 찾아오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말며,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고,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지침이 있었다고 한다. 최부자집의 1년 쌀 생산량은 약 3천석이었는데 1천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1천석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은 후손들이 거의 살지 않고 관리인이 교동법주를 빚으며 최씨 집안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 / 혼자만 잘살면 무슨 재민겨 / 더불어 잘 살아야 흥이 나제 / 아름답고 멋있는 경주 최씨 집안 / 자손들 흥왕하여 이 나라도 잘되기를 / 진심으로 발원해 본다

최씨 고택 첫 대문
최씨 고택 첫 대문
최씨 고택 본채. 고풍스럽고 푸근한 고향집의 모습이다
최씨 고택 본채. 고풍스럽고 푸근한 고향집의 모습이다
최씨 고택 안채. 외부와 격리되어 아늑하고 포근하다
최씨 고택 안채. 외부와 격리되어 아늑하고 포근하다

 

시간은 5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차를 몰고 오늘의 마지막 여정, 황룡사지로 달렸다. 넓은 평원에 덩그러니 서있는 5층 높이의 유리건물만이 쓸쓸하게 우리를 맞았다. 차도 몇 대 없는 주차장에 주차하고 건물 안에 입장하니 황룡사 9층 목탑 모형이 근엄하고 당당하게 서있었다. 모형이라 하지만 높이가 15m 정도는 보여서 실제 80m에 이르는 신라시대의 9층 목탑을 상상해 보니 평원에 우뚝 솟은 어마어마한 높이의 건축물 이었다. 우리가 한 때 63빌딩을 여의도의 랜드마크로 오며 가며 이정표로 올려 보았는데 아마도 황룡사9층 목탑은 경주의 눈부신 랜드마크 였으리라. 선덕여왕 재위 시에 여자라고 나라 안팎에서 무시 받으면서도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모셔와 못 하나 박지 않는 목탑 건축을 시작했고 1층부터 차례로 일본, 당, 오월, 탐라, 백제, 말갈, 거란, 여진, 고구려를 새겨 넣으며 완공한 후 선덕여왕은 "우리가 삼국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고 실제로 수십년 래 삼국을 통일하는 현실을 목도하였다. 아이러니 한 것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는 당시 적국인 신라의 염원을 담은 건축을 흔쾌히 수락했다는 사실이다. 아비지는 국적을 초월한 진정한 예술가였을까? 가슴 아픈 것은 이렇게 웅장한 건축물이 몽골의 침략으로 불에 타 소실되어 황량한 터만 갈대숲에 묻혀 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국력으로 복원하지 못 할 것도 없으나 터를 바라보며 약소국의 고통과 수치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반추하는 반면교사의 터전으로 삼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룡사 9층 목탑의 축소 모형탑 (약15m)
황룡사 9층 목탑의 축소 모형탑 (약15m)
신라시대의 실제 황룡사 9층 목탑은 아파트 30층 높이(80m)의 위용으로 고대 경주의 랜드마크 였을 것으로 추정
신라시대의 실제 황룡사 9층 목탑은 아파트 30층 높이(80m)의 위용으로 고대 경주의 랜드마크 였을 것으로 추정
철못 하나 쓰지 않고 목재로만 짜 맞추어 80m 높이 탑을 쌓았다는 것은 당시의 첨단 건축기술을 짐작케 한다.
철못 하나 쓰지 않고 목재로만 짜 맞추어 80m 높이 탑을 쌓았다는 것은 당시의 첨단 건축기술을 짐작케 한다.
석양이 기울고 있는 황룡사의 넓은 터전
석양이 기울고 있는 황룡사의 넓은 터전

 

뉘엿뉘엿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예약된 한옥 호텔로 차를 몰아 달려갔다. 세상에 그 많은 집이 있어도 아무데나 들어갈 수 없고 꼭 준비된 집으로만 돌아가야 하는 것이 참 신기하다는 상념을 하다 보니 어느덧 차가 호텔 한옥 담장을 돌아가고 있었다. 주변에 식당이 없어 가져 온 먹거리로 저녁을 대충 해결하고 우리 가족만의 노천 온천탕에서 피로를 풀고 온돌방에 떨어져 잠들면서 첫날을 마감했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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