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가진자를 위한 가진자에 의한 가진자의 이념일 뿐

한 여론조사 기관의 보고서에 의하면 20대 남성의 정치성향이나 가치관이 60대와 유사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모든 사물은 변화하며, 세대 간에 의식도 변화 발전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믿어지지 않는 현상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거짓이 아닌 모양이다. 지난 4월에 치른 서울시장 보궐선거 결과에도 그대로 나타났으니 말이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와 ‘열린연구소’가 조사한 보고서에도 비슷한 성향이 보인다. 20대의 64.9%가 능력차이로 생긴 불평등에 동의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자유지상주의)를 지지한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반면 자유를 추구하되 시장의 불평등을 정부가 메워주는 현대적 자유주의는 18.4%가 지지하였고, 평등과 정의와 공동체 가치를 중시하고 자본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에 반대하는 민주사회주의는 1.5%만이 지지하였다.

적어도 이 조사보고서가 맞다면 그들은 진보를 견제하고 비판하기 위해 보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치관이 보수를 지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들이 지향하는 자유지상주의는 자신의 능력대로 살아가야 하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신이 온전히 떠안아야 한다. 때문에 경쟁이 극심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사회에서 약자는 무시되고 배제된다. 심지어는 혐오의 대상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약육강식의 정글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왜 그들은 차별을 강화하는 자유지상주의적인 보수를 지향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보수로 분류되는 고전적 자유주의는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자유 지상주의 성향을 가진다. 자유 지상주의가 작동되기 위해서는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누구든 능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그 능력에 비례하여 더 많은 부와 권력과 명예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그게 정의롭게 이루어지려면 타고난 각종 기득권이나 상속이나 세습, 부모찬스 등이 배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가족제도와 사유제산을 인정하지 않아야 가능하다. 물론 사회가 부패하지 않아야 함도 당연하다. 오직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그게 가능할까? 그냥 소망사항 아닐까?

타고난 신분이나 조건을 배제하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분배된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로야 참으로 정의롭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봉건사회와 신분사회를 벗어나 근대 사회로 변화할 때에는 충분히 관심을 끌만한 주장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능력주의는 기득권이나 상속 혹은 세습에 의한 불평등을 정당화시키는 허구적 주장이라는 것이 이미 판명되었다.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되레 강화시켜왔을 뿐이다.

그럼에도 20대는 왜 능력주의에 전도되어 있을까? 능력주의는 불평등주의의 다른 말일 뿐인데 말이다.

지금 20대라면 1990년대에 출생하였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이 마무리되며 새로운 신분사회가 고착화되어가던 때이다. 그러면서 강남에서 태어난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 자기집을 가진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 명품을 살 수 있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 등등의 차별이 자연스럽게 체질화되어가던 때이다. 심지어는 민영아파트에 사는 아이의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주공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일이 신문기사화되기도 했다. 아이 손목을 이끌고 가던 어머니가 주변에서 노동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너도 공부 못하면 저렇게 된다.’라고 일러주던 것도 그때이다. 학교에서는 일등부터 꼴찌까지 줄세우기를 하여 등급을 낙인찍어주었다. 사회 곳곳에서 철저하게 서열을 내면화시킨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나이에 따라서, 직업에 따라서, 타는 차의 크기에 따라서, 사는 아파트의 가격에 따라서, 소득차에 따라서, 학벌에 따라서 서열을 매기려 한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자연스럽게 차별에 익숙해져버린 것 같다. 능력에 차이가 있으면 그에 따른 차별은 당연한 것으로 믿는 듯하다. 당연하게 믿는 것은 물론이고 그게 공평하다고 여기기까지 한다. 정말 그게 공평한 것일까?

그런 능력주의가 인정되려면 능력이 공정하게 평가되어야하고 능력에 따른 분배가 공평해야 한다. 그게 가능할까?

큰 착각이다. 능력주의는 기득권 질서의 불의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불평등한 현실을 감추고 능력에 따라 정의롭게 분배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한 주장에 세뇌되면 개인의 불행이나 고통을 능력이 부족하거나 노력이 부족한 탓으로 돌려버린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학교의 내신등급과 사교육비는 비례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성균관대 김민성 교수의 연구자료에서는 월 200만원 이상을 사교육비로 사용하고 있는 학생의 86%는 내신이 2등급 이상이었다. 반면 사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는 학생의 75%는 4등급 이하였다. 이는 그대로 대학진학으로 이어지고, 취업으로도 이어져서 사회적 계급을 만든다. 질문을 바꿔 해보자. 만일 강남 8학군의 학생이 환경이 취약한 농어촌에서 태어났다면 그래도 높은 성적을 얻고, 좋은 대학을 가서, 좋은 기업에 취업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더 물어보자. 일반 서민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이 재벌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처럼 부자가 될 확률이 몇%나 될까? 1%가 아니라 0.01%라 해도 1만명 중의 1명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개인의 능력도 타고난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능력주의가 절대로 정의롭거나 공정한 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불평등의 세습을 위장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어떤 이는 과정만 공정하면 정의로운 것이라고 한다. 그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토끼와 거북의 경주를 생각해보라. 이미 승자는 정해져 있다. 상류층은 자신들이 승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만들어놓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교육이든 특목고든 유학이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다. 반면에 보통의 청소년은 알바하면서, 투잡을 뛰면서 능력의 스팩을 쌓기 위해 코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렇게 해도 거북은 토끼를 이길 수 없다. 이처럼 이미 승자는 정해져 있는 경주임에도 과정만 공정하면 정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

매년 대졸 대기업 취업자는 2만 명 가량이다. 공무원, 교사, 전문직 등을 합해도 5만 명 가량이다. 이 숫자는 대학졸업생의 10%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90%는 선택에서 배제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불공정한 게임을 지지하는 것은 자기배반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자승자박하는 꼴이다. 이러한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계급재생산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급진적 사회주의가 수용되기는 불가하다. 차선은 전국민기본소득제와 같은 복지가 갖추어진 사회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모든 국민에게 최소한의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청소년들이 생계에 큰 부담을 갖지 않고 자신의 꿈을 펼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부 유럽국가에서 누구나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대학에 입학하면 매월 100만원이 넘는 돈을 용돈으로 지급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부럽다. 또한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대졸자와 소득에 차이가 없는 그런 사회 제도 또한 참으로 부럽기만 하다.

 

편집 :  심창식 객원편집위원

이현종 주주통신원  hhjj55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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