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벌판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가고 /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웃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노래 '향수'의 첫 연이다. 이 노래를 듣노라면 난 어린 시절 고향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시인 정지용이 일본 유학 시절 고향 옥천을 생각했듯이 나도 두고 온 고향 마을 '독쟁이'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아! 고향! 그리고 鄕愁!
넓은 뜰 동쪽으로 실개천이 흐른다.
그 실개천은 마치 옛이야기를 지줄대듯 조잘대며 휘돌아 간다.

여기 '지줄대다'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조잘조잘대는 다정하고 나긋나긋한 소리를 표현한 순수 우리말이다.

실개천이 조잘대며 흐르는 벌판, 거기 한가로이 얼룩백이 황소가 먼 산을 향해 '음~매~' 울고 있다.

얼마나 평화로운 광경인가!

한데, 시인은 그 울음을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이라 표현했다.

해설피! 저녁 무렵 햇볕이 점점 약해지는 모습이다. '금빛'이라 했으니 때는 황금빛 노을이 짙은 석양이다.

이때 소가 천천히 기지개를 켜고 늘어진 목청으로 길게 울음을 운다.
게으른 울음! 얼마나 한가로운가!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그런 고향을 어찌 차마 꿈에선들 잊을 수 있으랴!
꿈에서도 잊지 못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시인은 그냥 '잊을 리'라 하지 않고 '잊힐 리야'라고 해서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을 더 간절하게 했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가면 / 비인 밭에 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둘째 연이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가고 있다. 화로는 우리가 어렸을 땐 유일한 난방 도구의 하나였다. 우린 이 화로 주위에 둘러앉아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무애(無涯) 양주동(梁柱東, 1903-1977)의 수필 <爐邊의 鄕思>도 이 질화로를 배경으로 한 글이다.

"재가 식어진다"고 했으니 겨울 저녁이다.
"비인 밭에 바람 소리 말을 달린다"했다. 말을 달리듯 바람이 세차다는 말이다.

마치 구양수(歐陽脩)가 <秋聲賦>에서 "銜枚疾走,不聞號令, 但聞人馬之行聲"(재갈을 물고 질주하는 것과 같아서, 호령도 들리지 않고 다만 사람과 말 달리는 소리만 들린다)라한 대목을 연상케 한다.

그 화로 곁에서 아버지가 졸고 계신다. 짚단을 베개로 삼아 높게 고이신다. 주무시려나 보다.

시인은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라고 했다.

아버지의 모습이 몹씨 피곤해 보인다. 꺼벅 꺼벅 조는 아버지! 마침내 누우신다. 짚 베개를 높이 돋아 고이시고..

여기 아버지는 누굴까?

시인 정지용만의 아버지가 아니다. 당시 우리나라 모든 이들의 아버지다.

이 둘째 연은 언젠가 아내 한솔이 작품화해 회원전에 출품했다.

"여보! 가수 이동원이 하늘나라로 갔어!"
"그래, 내 친구 박인수와 듀엣으로 향수 부른 그 친구 말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셋째 연이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어린 시절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가 짙다.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어린 시절의 회상이다. 목표를 정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높이 쏜 화살, 저 멀리 숲속 어디엔가 떨어졌다.

그 화살을 찾으러 이슬 내린 숲속을 헤맸다. 이슬에 옷이 다 젖었다.

여기 '함추름'은 물기가 젖거나 서려있는 모습이 가지런하고 차분한 모양이다. 물기가 촉촉하다는 말이다. 그냥 '적시다'하지 않고 '휘적시다'고 했다. 휘돌아다니며 옷을 적셨단 말이다.

이 구절에선 도연명의 '種豆南山下'에 나오는 "夕露霑我衣"(저녁 이슬에 옷을 흠뻑 적시다)를 떠올리게 한다.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
아무렇지도 않고 예쁜 것도 없는 /
사철 발 벗은 아내가 /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넷째 연이다.

여기선 어린 누이동생과 아내의 모습이 돋보인다. 양쪽 귀밑머리를 휘날리며 쫄랑쫄랑 뛰어다니던 누이동생, 그리고 사철 맨발인 아내.

아무렇지도 않고, 어디 예쁜 곳이라곤 하나도 없는 아내!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무슨 말일까? 아무런 꾸밈이 없다는 말일까? 그럼 순수하다는 말이다.

또 아내가 예쁜 곳이라곤 어느 한 곳도 없다고 했다. 정말 그랬을까? 아니다. 그가 젊은 시절 아내와 찍은 사진을 보면 아내는 미인이었다.

그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을 줍던 곳.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연상케 한다.

하늘에 성근 별 /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다섯째 연이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하늘엔 별이 하나, 둘 반짝이고 초가지붕 위론 서리 까마귀가 날아간다.

여기 '서리 까마귀'는 찬 서리가 내릴 무렵의 까마귀를 말한다. 쌀쌀한 저녁이다.

방 안엔 등잔불이 켜졌다. 모두 이 흐릿한 등불 아래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여기서 '도란도란'은 여럿이 둘러앉아 낮은 목소리로 서로 정답게 이야기하는 모습이다.

한 폭의 풍속화를 보는듯하다.

이와 같이 정지용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해가 뜰 때부터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저녁 무렵까지의 농촌 마을 풍경을 한 편의 영화 처럼 그려놓았다.

실개천이 '지줄대고' 얼룩백이가 '해설피' 울어대는 고향마을에 대한 향수가 매 줄, 매 연마다 철철 넘쳐난다. 향토성이 짙은 시다.

이곳은 정지용의 고향 마을이 아니라 바로 70년 전 나의 고향 마을이다. 그때 그 시절이 자꾸만 그립다.

이동원의 이 향수는 역시 테너 박인수를 만남으로써 그 가치가 한층 높아졌고, 정지용의 시, 향수 또한 이동원과 박인수가 노래로 불러 유명해졌다.

"그대를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라"

하늘에서 이동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인이 된 이동원의 명복을 빌며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주님, 이동원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옵소서!

2021.11.18
김포 여안당에서
한송 포옹이 쓰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통신원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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