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민주주의 발전은 노동운동의 발전과 궤를 같이해 왔다. 노동의 힘이 자본의 힘을 견제할 수 있는 북서유럽의 역사가 그것을 반증한다. 세계 최상의 복지사회를 구축한 북유럽의 경우, 수십 년 동안 중도좌파의 사민주의 정당이 집권했다. 사민주의 정치세력은 노동계급의 정치경제적 요구를 대변해 온 탓에 오늘날 수준 높은 복지사회를 이룩했다.

항상 낮은 곳에 위치한 민중들의 삶에 천착했던 <정치인 노회찬>. 한국 현대 진보정치와 진보정당사를 언급할 때 노회찬을 빼놓을 수 없다.  민주노동당 창당은  50년대 사민주의 대중정치인 조봉암 선생의 <진보당>의 맥을 잇는 것으로 순전히 노회찬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결실이었다. (출처 : 명필름, 한겨레 자료사진)
항상 낮은 곳에 위치한 민중들의 삶에 천착했던 <정치인 노회찬>. 한국 현대 진보정치와 진보정당사를 언급할 때 노회찬을 빼놓을 수 없다. 민주노동당 창당은 50년대 사민주의 대중정치인 조봉암 선생의 <진보당>의 맥을 잇는 것으로 순전히 노회찬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결실이었다. (출처 : 명필름,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대 초반,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이끈 노회찬의 민주노동당에 전교조 교사 천여 명이 당우로 가입하고 후원을 했던 사건은 북유럽형 사민주의 복지국가를 열망한 때문이다. 그들 북유럽 국가들은 소득격차와 빈부격차가 크지 않고 누구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수준 높은 '평등사회'를 실현한 탓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진보정당 내부 분열과 이명박근혜 정권의 진보정당 탄압으로 전교조 교사들 천여 명이 형사처벌을 받는 것으로 끝났다. 그렇지만 여전히 북유럽형 사민주의 복지사회를 열망했던 교사들은 오늘도 꿈을 간직한 채,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핀란드 학교 수업장면(출처 : 한겨레 자료 사진) 핀란드 교육을 관통하는 교육원리는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다. 우리교육이 배워야 할 내용이다. 핀란드 중고교 학생들이 갖고 있는 높은 정치의식과 연대의식은 우리교육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2009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체결 당시에도 오바마, 후진타오 등 세계 정상들을 향해 피켓 시위를 감행한 유명한 사건도 핀란드 고등학생들이 주인공이었다.
핀란드 학교 수업장면(출처 : 한겨레 자료 사진) 핀란드 교육을 관통하는 교육원리는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다. 우리교육이 배워야 할 내용이다. 핀란드 중고교 학생들이 갖고 있는 높은 정치의식과 연대의식은 우리교육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2009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체결 당시에도 오바마, 후진타오 등 세계 정상들을 향해 피켓 시위를 감행한 유명한 사건도 핀란드 고등학생들이 주인공이었다.

국제학력평가(PISA) 등에서 세계 최상의 교육력을 자랑하는 핀란드의 '평등교육', '협력교육'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또한 세계 최상의 복지평등사회를 구현한 북유럽 국가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열정적으로 공부해야 한다.

가끔 언론에 소개되는 덴마크 교육과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교육 현실에 눈길이 쏠리는 이유이다. 2019년도 미래교육포럼이 주최한 핀란드 교육세미나가 서울에서 열렸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 '교사가 자긍심을 느끼는 교육'을 이 땅에서도 열어젖히고 싶은 소망은 교육자라면 누구나 간절하다.

오늘날 한국의 공교육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다. 2019년 교육통계연보에 따르면 전국 초중고 학교가 11,000개가 넘는다. 반면에 입시관련 사설 학원은 40,000개가 넘는다. 서울시교육청이 제공한 「2017 교육통계」에 따르면 서울에 입시관련 사설학원이 12,000개에 육박한다. 강남 3구에 3,500개가 밀집돼 있고 강남구 한 곳에만 1,700개가 넘게 있다. 제일 적은 행정구역보다 무려 20배 넘게 사설 입시 학원이 존재하는 셈이다. 대치동 학원가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서울시내 초중고 전체 학생수가 102만 명인데 입시학원에 다닌 학생수는 120만 명이었다. 글자 그대로 사교육이 공교육을 압도하는 현실이다. 사교육비가 연간 20조 원에 다다를 정도로 천문학적 단위이다.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은 입시 사설학원이 없다. 모든 교육은 공교육기관인 학교에서 감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교 마칠 때까지 교육비가 없다. 핀란드는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무료이다. 거기다 박사과정을 마칠 때까지 국가로부터 재정지원까지 받는다. 고등학교까지 무상급식이고 대학생들도 급식보조금을 매달 끼니 당 2,000원 넘게 받는다. 심지어 고등학생, 대학생들은 국가로부터 주거수당도 받는다. 교육의 공공성에 깊이 천착한 결과이다. 우리 헌법에 명시된 교육권을 사회권적 기본권으로 인식하고 국가가 이를 적극 실천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차기 정부는 진보정치를 뿌리내릴 수 있는 마중물 정부가 되어야 한다. 나아가 차기 정부는 한국사회가 명실상부한 복지국가로 발돋움하는 복지정부로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2022년 대선에서 어느 정당이 집권하든 차기정부는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고 꽉 막힌 경제문제를 풀어나가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판문점 선언-평양선언-서울선언-종전선언으로 이어지는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정치행위가 현재 당면한 한국 사회 경제문제를 풀어나가는 전환의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남북경제공동체 건설은 제2의 경제 도약을 가져올 것이기에 그렇다. 동서독 통일을 통해 유럽 최대의 단일시장을 구축한 독일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고 뿌리를 내리면 외국인 직접 투자가 쓰나미처럼 닥칠 것이다. 그 결과 우리 한반도는 일약 동아시아 허브 내지 중심국가로 급부상할 수 있다. 이는 국제 정치사회에 긍정적인 영향 또한 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통일의 주도권을 쥐고 주변 강대국들을 설득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 정착이 미중러일 강대국 국익에도 도움이 될 것임을 외교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대선에서 어느 정치세력이 집권하든 차기 정부는 역사의 흐름과 시대정신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에 기초해 혁명적인 교육개혁을 앞당겨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행복한 삶을 꿈꿀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차기 정부에 주어진 역사적 책무이다. 청소년이 행복하지 않고서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선 내년 대선 이후 들어설 차기 정부가 교육개혁의 최대 동력이자 대안 세력인 전교조와 신뢰를 회복하고 교육개혁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민주시민교육'을 시급히 학교현장에 뿌리내리고 교육개혁을 힘차게 추진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미래사회에 걸맞은 미래교육을 하기 위해서도 교육개혁은 너무나 시급하고 절실하다.

교육개혁에 미적거리며 눈치를 보는 교육 관료들을 채근해 교육계 적폐를 과감히 일소하고 정부와 협력하여 교육개혁의 첫 삽을 떠야 한다. 그 일을 시작으로 전교조와 함께 힘을 합쳐 산적한 교육난제와 교육모순을 헤쳐 나가야 한다. 당시나 지금이나 그러할 시기이고 2022 차기정부가 들어서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이 시대 교육노동운동이 나아갈 길이자 소명이다.

이를 위해 차기 정부는 전교조에 다가가 믿음을 줘야 하고 전교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마땅하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교육개혁의 성공 없이 어떤 정부도 성공하기 어렵다. 교육개혁의 방향을 바로 잡고 얽히고설킨 교육모순을 해결할 최적의 협력자이자 대안세력으로 가장 영향력이 큰 전교조를 꼽을 수 있다. 교육개혁을 학교현장에서 추진할 5만 조합원 교사를 든든하게 보유하고 있고 한국 교육이 나아갈 길을 이미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9년 4차 산업혁명을 앞두고 미래교육포럼이 개최한 핀란드 교육 세미나는 바로 그러한 방향제시라고 볼 수 있다. 전교조 서울지부가 후원단체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부 장관의 축사가 있었던 것도 그런 의미에서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학교는 ‘교사와 학생 모두가 인간적으로 성장하는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를 위해 '민주시민교육'을 프랑스처럼 '공통필수'교육과정으로 확대하고 영국처럼 '독립교과'로 가르쳐야 한다.

영국은 노동당 집권시기인 2000년부터 국가교육과정에 '민주시민교육'을 반영했다. 그리고 2002년부터 초중고 학교현장에 <시민성 citizenship>교과를 필수교과로 가르쳐 왔다. 다만 2015년부터 집권 보수당은 필수교과를 선택교과로 격하시켰다. 그럼에도 영국 학교교육에서 <시민성 citizenship>교과는 독립교과로서 ‘좋은 시민’(good citizen)을 넘어서서 ‘적극적 시민’(active citizen)을 학교교육의 목표로 추구해 왔다.

프랑스 <학교민주시민교육>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와 라이시테'를 핵심 가치로 추구한다. 라이시테의 정신은 차별이 없는 세상과 타인에 대한 존중을 지향한다. 프랑스 초-중-고 모든 학교에서 라이시테 헌장을 교과서 내용으로 수록하고 라이시테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프랑스는 몇 차례 교육과정 개혁 이후 2015년부터 초중고 모두 '민주시민교육'을 <도덕 시민교육>(enseignement morale et civique, 약칭 EMC)으로 교과 명칭을 통일시켰다. 프랑스 <학교민주시민교육>은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교육부가 제공하는 공식적인 교육과정으로 공부한다. 고등학교는 <도덕 시민교육 EMC>이 교육부의 공식적인 교육과정으로 포함돼 있진 않지만 대학입학시험 논술문제로 출제되기에 고등학교에서도 <학교민주시민교육>을 공부한다.

<차별과 경쟁교육>을 폐기하고 <협력과 평등교육>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의 대전환을 촉구하는 플래카드.(출처 : 하성환) 전교조 조합원 교사들이  2019년 5월 교육주간을 맞아 학교 정문에 플래카드를 내걸고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이다.
<차별과 경쟁교육>을 폐기하고 <협력과 평등교육>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의 대전환을 촉구하는 플래카드.(출처 : 하성환) 전교조 조합원 교사들이 2019년 5월 교육주간을 맞아 학교 정문에 플래카드를 내걸고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이다.

이제 21세기 학교사회는 교육선진국처럼 <차별과 경쟁의 논리>를 배제해야 한다. 오히려 <협력교육>을 통해 <평등한 문화>를 체득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화국 시민>을 길러내여 한다. 학교공동체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이고 삶의 기쁨을 만끽하는 ‘행복발전소’로 학교 사회를 변화시켜 나갈 때 학생도 교사도 보람을 느낀다. 이를 위해 교육부-교육청은 교사와 학생을 신뢰하고 그들의 자발성을 보장하며 행정적으로 아낌없이 지원해야 한다.

한 마디로 학교라는 공간을 ‘민주주의를 체험하는 살아 있는 교육공동체’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학교생활을 통해 아이들이 민주적인 삶을 체득하고 ‘민주주의자’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움과 성장을 통해 삶의 기쁨을 느끼고 교사는 소명의식과 보람을 느낄 것이다. 그런 방향으로 교육정책이 혁명적으로 전환되고 교육운동 또한 그러한 방향으로 매진해야 한다.

이제 2020년 9월 3일 대법원 판결로 전교조는 법외노조 멍에를 벗었다. 그리고 바로 이튿날 문재인 정부 고용노동부는 전교조를 구속했던 법외노조 통보 처분을 취소하는 조치를 신속히 단행했다. 매우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이젠 교육개혁의 동반자로서 차기 정부 또한 전교조와 상호 신뢰와 소통을 바탕으로 협력적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그 힘으로 오랜 숙원인 교육 개혁을 이 땅에서 현실화해야 한다. 그 길이 우리 국민이 사는 길이고 전교조도 사는 길이자 궁극적으로 이 땅의 교육을 회생시키는 길이라 믿는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교육을 살리기 위해선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고 교육의 목적에 깊이 천착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육의 목적은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교육기본법 제2조(이념)에 명시된 내용이다. 87년 6월 항쟁의 영향으로 93년 교육부 민주시민교육 장학지도자료에도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모든 것에 성공하고 민주시민교육에 실패했다면 그것은 교육 전체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진단이다.(교육부, 1993, p16-17)

2019년 12월 34세 최연소 핀란드 총리로 선출된 산나 마린(오른쪽에서 두 번째) 총리가 12월 10일 연정 내각을 발표하는 장면.(출처 : 한겨레 TV)19개 내각부처 장관 가운데 12명이 여성이고 재무, 내무, 교육부장관은 산나 마린 총리처럼 30대이다. 학교교육과 청소년의회를 통해 일상적인 정치활동을 경험하면서 성장한 핀란드 청소년들은 시민활동을 시민의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2019년 12월 34세 최연소 핀란드 총리로 선출된 산나 마린(오른쪽에서 두 번째) 총리가 12월 10일 연정 내각을 발표하는 장면.(출처 : 한겨레 TV)19개 내각부처 장관 가운데 12명이 여성이고 재무, 내무, 교육부장관은 산나 마린 총리처럼 30대이다. 학교교육과 청소년의회를 통해 일상적인 정치활동을 경험하면서 성장한 핀란드 청소년들은 시민활동을 시민의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미 북서유럽 국가들은 '민주시민교육'을 실천한 지 오래되었다. 신자유주의가 급속히 확산된 1990년대-2000년대는 역설적이게도 서구사회에 '민주시민교육'이 풍미한 시대였다. 영국처럼 '민주시민교육'의 역사가 20년 정도로 짧은 국가가 있는가 하면 나치체제의 어둠을 뚫고 일찌감치 「정치교육」(politische Bildung)을 실천한 독일은 「독일연방정치교육원」의 지원 아래 50년이 넘는 '민주시민교육'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한국 사회는 너무 늦은 감이 있다. 그렇지만 프랑스처럼 대학 입시과목화한다면 그 교육적 효과는 단기간에 끌어낼 수도 있다. 만일에 입시과목화에 실패한다면 <민주시민> 교과는 학교현장에서 예전 <환경>교과나 <시민윤리> 교과처럼 철저히 외면당한 채 사라질 것이다.

<민주시민>과목을 <국어> 과목처럼 가르칠 것을 촉구하는 「학교 <민주시민>과목 추진연대」 2019년 총회 장면(출처 : 김원태 학교시민교육연구소장 제공)
<민주시민>과목을 <국어> 과목처럼 가르칠 것을 촉구하는 「학교 <민주시민>과목 추진연대」 2019년 총회 장면(출처 : 김원태 학교시민교육연구소장 제공)

따라서 <민주시민> 교과는 대학입시과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는 <민주시민> 과목을 ‘국어’ 과목처럼 가르치기 위한 운동단체의 강력한 요구와 함께 교육운동 전반에 그런 지형이 형성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민주시민> 교과가 대학 입시과목으로 안착한다고 했을 때 평가방식은 과연 어떤 형태일까?

예측하건대 오늘날 <한국사>와 <영어> 과목처럼 <민주시민> 과목을 절대평가로 측정하되 프랑스 바칼로레아 시험처럼 논술형 절대평가로 논의가 집약될 가능성이 높다. 그 길만이 <민주시민> 교과의 생명력을 영구히 확보하는 길이자 교육의 목적인 <민주시민> 교육에 대한 학생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제주, 대구 등 일부 광역자치단체에서 시범 운영하고 있는 국제 바칼로레아(IB)를 연상시켜 전교조를 중심으로 사회적 논란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교육과정평가원 스스로 한국형 바칼로레아(KB) 평가문항을 개발한다면 쉽게 논란을 잠재울 수 있다.

요컨대 논술형 절대평가 방식을 취하되 일정 점수를 취득하면 통과하는 방식으로 평가를 진행한다면 사회적 논란을 잠재우고 민주시민교육을 학교현장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킬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역사정의가 무너진 사회이다. 따라서 사회정의를 세우기는 지난한 과제이자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오늘날 일베 현상이나 태극기 부대, 사랑제일교회 등 기독교 주류의 행태는 그를 잘 보여준다. 이념적으로 극단의 경험을 체험한 세대와 그 정신적 후손들이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현실에서 독일 바이텔스바흐 합의처럼 <논쟁성 재현 수업>을 실천하기란 넘어야 할 난관이 수없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국회에서「학교민주시민교육법」이 상임위에 계류 중이지만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특별한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 한, 통과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미 「학교민주시민교육법」제정 추진에 반대하는 극우 내지 수구 세력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민주’란 말 자체에 눈빛이 달라지고 비틀린 시선으로 쳐다보기 일쑤이다.

결과적으로 국회의 직무유기이다. 좋은 법을 만들어야 함에도 이를 외면하는 현실이 우리 교육계가 처한 냉엄한 현실이다. ‘민주시민교육’을 학교현장에 강제할 법적 근거가 없는 상태이다. 그렇지만 <민주시민교육> 과정을 개설하는 것은 교육부장관의 권한 내에 있기에 장관의 의지만 있다면 당장 내년에라도 개설이 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 개설할 것인지에 대한 교과의 이해관계가 첨예한 만큼, 현재 상황에선 이것도 기대하기 어려운 게 우리교육이 처한 현실이다.

부득이 서울시 교육청을 비롯해 진보교육감들이 존재하는 일부 광역자치단체에서 시도 의회 조례로 <민주시민교육 진흥조례>를 제정했다. 그 내용 속에는 <논쟁성 재현 수업>을 강조하고 있고 독일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대원칙을 거의 원형 그대로 제시하고 있다. 학계 일부에서는 독일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원칙이 한국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합의될 수 있고 교실에 적용될 수 있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곽노현, 2021, p8-14)

그러나 2019년 인헌고 사태나 2020년 4‧15 총선을 앞두고 학교에서 선거교육을 하려고 했을 때 나타난 부작용을 떠올린다면 그리 쉽지 않은 과제임에 틀림없다. 결국 논쟁성 강한 현안에 대해 학교사회 갈등은 사회갈등으로 비화됐고 학교 선거교육조차 허용되지 못했으며 학교교육은 파행을 맞았다. 특히 선거교육의 경우 중앙선관위의 제재 앞에 서울시 교육감은 아무것도 하질 못한 채 무기력했다.

2019년 10월 23일 인헌고 앞에서 보수(?) 단체 회원들이 <전교조 해체> 팻말을 들고 시위하는 장면(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2019년 10월 23일 인헌고 앞에서 보수(?) 단체 회원들이 <전교조 해체> 팻말을 들고 시위하는 장면(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요컨대 한국 사회에서 독일식 논쟁성 강한 수업을 재현하는 것은 상당한 진통과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지난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형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 자체가 상당한 '이념투쟁'으로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시민교육'은 이미 시범적으로 혁신학교에서 상당 부분 성공을 거두고 있다. 2019년 교육부는 초등 중심으로 <민주학교>를 지정해 상당 부분 내공을 쌓았다. 문제는 이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문제이다. 서울을 비롯해 대도시 입시 선호학교 부모들은 자신의 거주지에 혁신학교가 들어서는 것을 극렬히 반대한다. 혁신학교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가 널리 유포된 탓이다. 거기에는 수구언론들의 책임도 일정 부분 존재한다.

분명한 점은 혁신학교 교육운동 10년 동안 혁신교육이 아이들 학력을 저하시켰다는 공식적인 연구결과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혁신학교를 통해 확인된 혁신교육의 긍정적인 결실들을 다른 학교로 전파하고 널리 공유하려는 정책 내지 움직임에 대해 앞으로 집단적인 반발이 예상되고 사회적 논란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문제를 지혜롭게 극복하고 혁신학교 교육운동의 소중한 결실을 일반 학교에 대중화 ‧ 보편화하려면 사전 정지작업이 필요하다.

혁신학교는 교육과정 운영과 평가, 학급운영과 학생자치 측면에서 놀라운 교육적 성과를 일궈냈다. 특히 혁신학교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던 경기도 광주 남한산초등학교 사례는 학교단위로 교육혁신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송순재, 2017, p54) 특히 '민주시민교육'의 관점에서 혁신학교 운동은 다양한 시사점을 주었다.

권위주의 학교문화를 약화시키고 평등한 인간관계와 교원학습공동체 등 열린 공간을 통한 교사들 간 소통은 교사들 스스로 자기성장의 기쁨을 맛보게 하였다. 또한 학생체험을 중시하고 학생들의 자발적인 활동을 존중하는 일체의 교육활동은 '민주시민교육'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소중한 실천사례로 확인된 바 크다.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 중인 서울형 혁신학교 수업장면.(출처 : 한겨레21 1035호 류우종 기자)혁신학교의 성패는 교사의 자발성과 헌신성에 달려 있다. 밤낮, 주말 없이 수업을 연구하는 교사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서울형 혁신학교에서 중학생들이 주제별 모둠·토론 수업을 하고 있다.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 중인 서울형 혁신학교 수업장면.(출처 : 한겨레21 1035호 류우종 기자)혁신학교의 성패는 교사의 자발성과 헌신성에 달려 있다. 밤낮, 주말 없이 수업을 연구하는 교사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서울형 혁신학교에서 중학생들이 주제별 모둠·토론 수업을 하고 있다.

100년 넘게 우리교육을 지배해온 낡은 패러다임을 근본부터 뒤흔들 '교육개혁의 진앙지'로 <혁신학교>는 작용할 것이다. 「교육이 가능한 학교」를 일궈내고 「학생들 삶을 위한 교육」을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을 혁신학교는 충분히 보여주었다.

‘공교육 개혁‘의 새로운 모델로서 혁신학교는 교육활동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한 운동이었으며 허브스쿨(hub school)로서 주변 학교에 영향을 미치는 허브 역할을 다하고 있다. 따라서 혁신학교 유치 내지 전국적 확산에 따른 논란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홍보활동과 왜곡된 이미지 교정을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한국 사회 학교교육은 과대학교, 과밀학급, 과다한 행정업무, 그리고 공고한 학벌에 기초한 치열한 입시경쟁교육으로 유명하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강고한 틀로 정형화되고 규격화된 <병영학교>이다. 거기다 유교사회 봉건적 잔재가 아니더라도 관료제적 권위주의 문화가 팽배한 사회이다. 한국 교육의 거대한 한 축을 맡고 있는 사립학교로 가면 그 현상은 더욱 심각한 형편이다.

앞으로 다가올 10년은 100년 넘게 위계질서화 된 권위주의 학교문화를 수평적인 평등 문화로 전환하는 과제에 직면할 것이다. 학생-교사-교직원-학부모 모두 학교구성원으로서 자기 성장과 자아실현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길 원한다. 이름 하여 「행복한 학교 만들기」는 대한민국 향후 10년 교육의 핵심 정책으로 급부상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랜 시간 교육노동운동 단체에서 끊임없이 주장해 온 「작은 학교」 만들기, 학급당 학생수 20명 이하로 감축하는 문제, 그리고 법정 수업일수를 190일->180일->170일로 축소하는 문제가 그러하다. 나아가 학교업무를 정상화하여 [교육이 가능한 학교]로 만들고 아이들[삶을 위한 교육]을 실천하려는 노력 또한 그러하다.

1인당 GDP가 3만$이 넘는 나라에서 아직도 필리핀보다 더 많은 학급당 학생 수를 유지하고 있는 현실은 부끄러운 일이다. 프랑스는 1인당 GDP 6천$일 때 대학교까지 무상교육을 실현했다. 프레이리의 표현대로 교육은 아이들 머릿속에 지식을 주입하는 활동이었고 아이들에게 학습은 지식저장고로 그쳤다. 그런 교실분위기에서 독립된 주체로서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창의적인 언어를 구상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 교육의 대전환은 시급하고 절실하다. 혁명적인 교육의 대전환! 그것은 우리 사회 미래 100년을 보장한다. 비전이 없는 교육을 이젠 멈춰 세워야 한다.

입시교육과 이념의 틀에 갇혀 교실 토론조차 자유롭지 못한 게 우리네 교육 현실이다. 2016년 「국제 시민 및 시민권 연구」(ICCS)조사는 이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교실 토론 수업 시 학생들이 최근에 발생한 정치적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는지 또는 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도록 교사가 용기를 주는지 등 <개방성> 정도를 묻는 조사에서 조사대상국 24개국 가운데 24위였다.(김원태, 2020, p19) 이토록 척박한 토양에서 한국 사회가 이 정도로 건강성을 유지해 온 것은 진보정당 정치학교와 노동운동, 사회운동을 비롯한 외부 활동가들 및 NGO의 희생과 헌신의 대가이다.

여의도고 NGO동아리 학생들이 2013년 신촌에 있는 이한열 기념관을 찾아 <87년 6월 민주항쟁의 전개과정>에 대해 동영상과 함께 이경란 관장님 설명을 들은 뒤에  이한열기념관 입구에서 찍은 기념사진(출처 : 하성환)
여의도고 NGO동아리 학생들이 2013년 신촌에 있는 이한열 기념관을 찾아 <87년 6월 민주항쟁의 전개과정>에 대해 동영상과 함께 이경란 관장님 설명을 들은 뒤에 이한열기념관 입구에서 찍은 기념사진(출처 : 하성환)

다시 말해 한국 사회 공동체와 민주주의가 이 정도로 건강성을 유지하는 것은 학교 밖 시민사회단체인 참여연대, 정의기억연대, 인권연대, 나눔문화, 이한열기념관,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언론개혁시민연대, 미군범죄근절운동,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 4‧16연대, 여성의 전화, 이한빛 미디어 노동인권센터, 전태일 재단, 김용균 재단, 월드비전, 굿네이버스, 앰네스티 등 수많은 정치사회 NGO, NPO, 구호 NGO와 민주노총, 전교조 등 노동운동단체의 정치교육, 그리고 노회찬 정치학교가 수행한 학교 밖 [민주시민교육]의 결실 덕분이다. 그리고 그 계기를 만들어 준 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적어도 글쓴이는 그렇게 생각한다.

오늘날도 여전히 아이들은 학교를 싫어한다. 「배움으로부터 도주」가 아니라 「자기성장의 기쁨을 경험하는 공간」으로 학교가 거듭나려는 노력이 거의 없기에 학교는 예나 지금이나 우울하다. 잘못된 관행이나 무의미한 절차를 계속 되풀이하며 아이들은 지도의 '대상'일 뿐, 교육의 '주체'로 단 하루도 살아가질 못하는 게 우리 교육이 처한 아픈 현실이다.

학교를 ‘행복발전소’로 만들기 위해선 일차적으로 학교생태계를 평등한 문화로 전환시켜야 한다. 그 첫 번째 할 일이 권위주의의 해체이자 계선조직의 꼭대기에 위치한 교육부 - 교육청 - 학교장을 교육활동의 지원단위로 그 위치를 재설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지금의 학교 권위주의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것은 '학교민주시민교육법'을 통과시키면 가능한 일이다. 교육과정 구성권과 평가권을 온전히 교사에게 되돌려주고 교육활동의 주체를 학생 중심으로, 아이들의 「삶을 위한 교육과정」으로 재구성하면 된다. 학생-교사들이 도움을 요청할 시에만 교육청 관료와 학교장은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하면 된다.

이를 위해선 현행 교육부가 추진하고 있는 교육자치, 학교자치를 전면화하여 모든 권한을 교육활동의 주체인 학생-교사-학부모에게 권한을 이양해야 한다. 동시에 국회에 계류 중인 「학교민주시민교육법」을 최대한 압박해서 통과시키는 집단 간 연대활동이 절실하다.

19세기 근대시민사회가 발달하면서 대중교육의 확산과 함께 거대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가 공교육, 바로 학교교육을 지배하였다. 그런 점에서 공교육체제의 출발과 발달은 중앙집권적 국가주의 교육과 궤를 같이 한다.(심성보, 2018, p219) 그러나 20세기 민주주의가 각 분야로 확산하면서 공교육체제 역시 다양성과 창의성, 자율성, 효율성을 존중하고 지향하는 방향으로 변모해 왔다. 이는 세계교육개혁의 동향으로 국제사회 각국의 교육의 역사 또한 ‘자율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모해 가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앙에 집중된 막강한 권한이 지방으로 분산되고 학교의 자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추세에 있다. 1996년 학교사회에 전격 도입된 학교운영위원회 역시 학교장 1인에 집중된 권한을 견제하고 분산시키려는 취지였다. 그러나 오늘날 공립학교 학교운영위원회는 심의기구로서 그 역할이 형식화된 지 오래고 사립학교 학운위는 자문기구로서 이름만 남아 있는 유명무실한 상태다.

민주주의를 생활 속에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학교사회를 재구조화하기 위해서는 현행 학교운영위원회로는 불가능하다. 유명무실한 학교운영위원회를 대체할 「학교자치평의회」를 학교현장에 도입해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게 필수적이다. 교육부-교육청-학교장으로 이어지는 중앙집권적인 권한을 교사-학생 교육활동 주체에게 이양하거나 분산하는 것은 시대의 대세이자 교육개혁의 핵심과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보교육감이 실천한 혁신학교가 주목받는 이유이다. 다만 기득권 세력인 교육 관료들과 일부 학교 관료들의 반발이 충분히 예상되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시대정신인 '교육 자치', '학교 자치'는 향후 한국의 학교사회가 <학교=행복발전소>로 변화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분기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다가올 교육 자치, 학교 자치 시대를 대비해 「학교자치평의회」의 위상을 정립하고 구체화해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학교장 점수자격제를 전격 폐기하거나 경과규정을 두고 점진적으로 폐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교장공모제를 넘어서서「교장선출 보직제」를 도입하기 위한 사전 홍보와 정책적 노력이 절실하다. 좁직한 눈으로 교육 세상을 보는 이들에게 <학교=행복발전소>는 하나의 문화충격으로 다가갈 것이다.

현행 교장 공모제로는 <학교=행복발전소>를 만들 수 없다. 혁신학교처럼 교장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방식보다 교육활동 결정 권한을 교사-학생에게 이양하는 것이 지름길이자 확실한 교육개혁이기 때문이다. 교육주체인 교사-학생들이 중심이 된 「학교자치평의회」를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자주성과 독립된 주체로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존중될 때 <미래 학교>의 모습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차고 창의력과 지적 호기심으로 충만한 교육공간으로 변화할 것이다. <미래 교육>은 그러한 방향으로 거침없이 전진해야 한다.

우리가 핀란드 교육개혁에서 얻는 가장 중요한 핵심어는 교사와 학생들의 '자율성'을 극대화한다는 데 있다. 장학 감사 제도를 일거에 폐지하고 교사로 하여금 강제 연수 및 의무연수 제도를 전격 폐지해 교사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방식이 제도화되면서 핀란드 교사들의 연구열은 세계적으로 매우 높다. 그만큼 전문성을 갖춰나가는 것이자 교직에 대한 사회적 신뢰와 존경 역시 매우 높다.

「학교자치평의회」는 기존 학교운영위원회가 유명무실하고 형식화된 측면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노력이다. 나아가 학교사회를 평등한 문화가 지배하는 교육공간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결단이다. 민주주의를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선 교육 주체인 교사와 학생들이 협력해서 학교사회를 가꾸어 가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학교자치평의회」가 교사평의회와 학생평의회로 구성돼 학교사회 최고 의결기구로서 자리매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교육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 굳이 코로나 바이러스19가 아니더라도 급변하는 과학기술혁명 시대 학교교육의 양상은 급변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학교교육이 자율성과 변화에 대한 다양성과 유연성, 그리고 개성과 창의성에 굳건히 기반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가올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는 학교의 모습이자 <미래 교육>의 비전을 담보하는 일이기도 하다. 빅데이터에 기반한 사물인터넷이 일상을 지배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과 학습을 대체하는 시대가 도래한다.

리프킨의 표현대로 <한계비용 제로> 혁명이 모든 산업분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변화는 사용자와 노동자, 판매자와 소비자로 구분되던 기존의 낡은 패러다임을 붕괴시킨다. 한계비용 제로 시대에 프로슈머들은 서로의 재화와 서비스를 공유하는 <협력적 공유사회>를 지향하며 <사회적 경제>로 이동하게 된다.(정재걸, 2019, p53) 학교사회 역시 교실을 매개로 더 이상 교사와 학생이라는 고정 관념에 머물지 않는다. 교사와 학생이 교육공급자와 교육수요자라는 구분에 머물지 않고 긴밀히 상호작용하면서 지식과 교육서비스를 공유하는 <협력적‧창의적 관계>를 탄생시킬 것이다.

따라서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서 각자도생의 방식으로 지식을 주입하고 암기된 지식을 측정하는 19세기 교육방식과 개별화되고 대상화된 기존 교육환경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변화의 파고를 넘어설 수 없다. 그 결과는 도태되는 길밖에 없다. 그것은 개인적으로나 국가 사회적으로 매우 끔찍한 결과를 자초할 것이기에 그 어떤 집단보다 학교사회는 급변하는 사회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한다.

미래교육이 전개되는 학교사회는 「자율과 존중, 협력과 연대」의 정신이 살아 움직이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학생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창의적 상상력과 다양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온-오프라인 공간으로 교육활동을 전면화하고 그 방향으로 전진해 나가야 한다.

프레이리(P. Freire)의 비판처럼 마냥 지식을 저축하고 축적된 지식을 평가하는 기존 교육방식으로는 결코 <미래 교육>을 예측할 수도 없고 맞이할 수도 없다. 변화된 현실 앞에 우리 공교육의 자화상을 들여다보고 깊은 집단적 성찰을 바탕으로 학교의 위상을 재정립해 <미래 교육>을 전망해야 한다.

요컨대 21세기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대한민국 교육을 살리고 우리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는 데 있다. 「교육의 본질」은 ‘자주성’을 되살리는 것이다. 교사의 ‘자주성’과 학생의 ‘자주성’을 극대화할 경우 학교교육은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의 목적에 부합하게 된다. 거꾸로 ‘자주성’을 억압하거나 왜곡하는 일체의 활동은 교육의 형식, 바로 가면을 쓴 「반(反)교육」일 뿐이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100년 넘도록 ‘자주성’을 말살한 교육이 지속돼 왔다. 그 억압의 사슬을 끊어 내고 아이들의 자율성과 자주성을 드높이는 것에서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당시 침몰하는 장면(2014. 04.16)배가 좌현부터 바닷물에 잠기면서 위기감이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오지 못했던 우현 쪽 2-7반, 8반, 9반 10반은 1명 또는 2명만 생존했을 정도로 학생들의 희생이 너무 컸다. (출처 : 한겨레 자료 사진)
세월호 참사 당시 침몰하는 장면(2014. 04.16)배가 좌현부터 바닷물에 잠기면서 위기감이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오지 못했던 우현 쪽 2-7반, 8반, 9반 10반은 1명 또는 2명만 생존했을 정도로 학생들의 희생이 너무 컸다. (출처 : 한겨레 자료 사진)

세월호 참사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왜 3층 일반승객의 생존율은 71%인데 더 안전한 4층 단원고 학생들은 23%에 머물렀는지 자문해야 한다. 객실이 안전하다는 거짓 방송을 하고 자신들만 탈출한 선장과 선원들의 범죄행위만 탓할 일이 아니다. 그 거짓 방송은 3층 일반승객들과 4층 단원고 학생들 모두에게 동시에 방송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참사 이후 어느 부모님의 가슴 절절한 탄식에 귀 기울여야 한다. “선생님 말씀 듣지 말고 그냥 밖으로 뛰쳐나오라고 했으면 살았을 텐데”(416 세월호 참사 작가기록단, 2015, p104)라며 가슴 아픈 탄식에 우리 교사들은, 우리 교육계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시대의 교사로서 성찰이 절실한 대목이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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