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필진 중에서 깔끔한 글솜씨로 이름이 자자한 분이 박효삼 선생입니다. 그래서 종종 편집에 어려움이 생기면 기꺼이 조언을 구하지요.

대구 토박이지만 최근 예천에 머물고 있다기에 한번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경주 남산 답사기 10편'을 열독하면서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호젓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유적과 대화하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사실 예천이 경주 부근 어디인 줄 알았는데 턱도 없이 먼 거리더군요. 한번 보자고 했더니 반가이 응낙하셨고, 반백수인 두 분 심창식, 형광석 선생과 함께 예천으로 떠났습니다.

12월 9일 목요일, 동서울터미널에서 아침 7:40에 출발하여 약 3시간 후 경북도청역에 내렸습니다. 도청은 2016년에 이곳 안동시로 이전하였고, 길 건너에 주거지가 조성되었는데 그곳은 예천군이랍니다. 그래서 도청소재지 안동의 인구는 줄어들고, 예천군의 인구는 갈수록 증가한다고 합니다. 그래봐야 인구의 수도권 집중은 갈수록 심해지고 아름답게 잘 포장된 도로가 사통팔달로 뚫려있어도 젊은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문장만큼이나 군더더기 없는 박효삼 선생이 처음으로 우리를 인도한 곳은 병산 서원입니다.

병산서원으로 들어가는 복례문입니다. 
병산서원으로 들어가는 복례문입니다. 

병산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퇴계 이황 선생 문하에서 학업을 닦은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31세에 풍악서당을 이곳으로 옮겨 잠시 후학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서애라는 호는 어린 류성룡이 물에 빠져 서쪽(병산 우측)으로 떠내려가다가 모래톱에 걸려 살아났답니다. 서쪽 언덕(西厓)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하여 붙였다고 하네요(병산서원 화기 관리인). 

'克己復禮爲仁'이라는 공자의 말에서 따왔습니다. '인이란 사욕을 극복하고 례로 돌아가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혼란한 시기에 태어난 공자는 삼황오제의 이상향을 꿈꾸며 주나라 예법을 되찾고자 일생을 바칩니다.
'克己復禮爲仁'이라는 공자의 말에서 따왔습니다. '인이란 사욕을 극복하고 례로 돌아가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혼란한 시기에 태어난 공자는 삼황오제의 이상향을 꿈꾸며 주나라 예법을 되찾고자 일생을 바칩니다.

이곳 병산서원은 서애 선생과 아들 류진을 모시는 사당이 있고, 학문을 연구하는 강당과 유생들이 머물렀던 동재와 서재가 있고, 누각과 서원을 관리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부속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누각인 만대루가 나옵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누각인 만대루가 나옵니다.
강학이 이루어지던 立敎堂과 스승의 거주 공간
강학이 이루어지던 立敎堂과 스승의 거주 공간
서원에서 내려다본 전경. 좌우에 유생들이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 만대루 너머 병산이 병풍처럼 둘렸습니다.
서원에서 내려다본 전경. 좌우에 유생들이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 만대루 너머 병산이 병풍처럼 둘렸습니다.
서원 뒤편에 서 있는  3인. 김동호, 심창식, 형광석. 바닥에 난방이 안 되고 대청마루처럼 열린 공간이라 겨울에는 어떻게 공부했을지 궁금합니다.
서원 뒤편에 서 있는  3인. 김동호, 심창식, 형광석. 바닥에 난방이 안 되고 대청마루처럼 열린 공간이라 겨울에는 어떻게 공부했을지 궁금합니다.
만대루에는 북이 하나 매달려있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유생이 생기면 북을 쳤다는데, '북 맞은 놈'으로 찍히면 다른 서원에도 못 가고 영원히 매장당했다고 합니다. 
만대루에는 북이 하나 매달려있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유생이 생기면 북을 쳤다는데, '북 맞은 놈'으로 찍히면 다른 서원에도 못 가고 영원히 매장당했다고 합니다. 
병풍처럼 생긴 병산은 돌탑을 쌓은 듯 가파른 악산입니다. 넓은 모래톱과 낙동강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병풍처럼 생긴 병산은 돌탑을 쌓은 듯 가파른 악산입니다. 넓은 모래톱과 낙동강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느긋하게 서원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박효삼 선생 이름 뒤에 항상 따라오는 사미(思美)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유래를 물었습니다. 어떤 아름다운 기억이 있기에 지금까지 분신처럼 달고 다닐까? 美人? 美女? 美酒? 美食? 혹시 말 못 할 은밀한 추억은 없을까 궁금했지요.

思美 가로되, 그냥 "이름 소리글자”랍니다. “효삼이(효사미), 효삼아(효사마)” “허걱!!!”

그래서 욘사마 이전에 달구벌에서 명성이 자자한 ‘효사마’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쌍팔년도 이전에 가방끈 좀 긴 사람들이 잠시 즐겨 사용했음 직한 중간 이름 빼고 사용한 思美가 마음에 들고, 또한 그럴듯해 보여 아직도 애용한다는 허랑한 이야기. 평상시 박효삼 선생의 인상과 너무 대조적입니다.

12월 초의 쓸쓸함과 삭막함에 물든 갈대의 서걱이는 소리가 우리들의 세월을 거꾸로 돌립니다.

이참에 우리도 친구 따라 이름 하나씩 따로 가져봅시다.

형광석 선생은 무등산의 상서로움과 유달산의 기운을 이어받아 서기(瑞氣)라 하고, 심창식 선생은 어떤 글이라도 들어가기만 하면 시가 되길 바라며 시기(詩器)라 불러봅니다.

瑞氣 형광석, 思美 박효삼, 詩器 심창식! ㅎㅎ 괜찮군요! 별호도 지었으니 이제 우리 일행 4인은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떠납니다.

우리가 21세기에 <한겨레:온>에서 글을 쓰고, 함께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 예천에서 산천을 주유하는 인연으로 보아하니, 500년 전에는 함께 글 깨나 읽었던 유생이었거나, 도를 닦았던 도반이 아니었을까요?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donghokim7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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