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의 가치' 회복 없이는 능력 만능주의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사진출처(https://pixabay.com/ko/photos/omr-%ec%8b%9c%ed%8a%b8-%ec%b1%84%ec%9a%b0%eb%8b%a4-%ec%a2%85%ec%9d%b4-372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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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15일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이주영 부장판사)는 2022년도 수능 생명과학Ⅱ 20번 문제에 대해 정답을 5번으로 결정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하 평가원)의 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평가원은 해당 문제를 전원정답처리 하였다. 강태중 평가원장은 출제오류에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를 빌미 삼아 언론에서는 입시 개혁과 수능 개혁의 필요성을 말하고 정치권에서는 ‘교육 개혁’을 공약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개혁의 논의가 공정성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존중’의 가치는 빠져 있고 능력 만능주의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공정성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교육


한국 교육과 대학입시 제도에 대한 지적은 매년 대학 입시 기간이 끝날 때마다 나온다. 입시제도 논의의 주된 담론은 공정성 담론이다. 특히 ‘정유라 사태’와 ‘조국 사태’는 수시의 공정성에 대한 담론을 더욱 증폭시켰다. 공정성 담론에 담긴 요점은 ‘기회의 균등’과 ‘객관성’이다. 정시가 공정하다는 견해에서는 먼저 명확한 정답과 평가 근거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객관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소위 말하는 ‘인서울’ 대학 혹은 서울대·고대·연대(SKY) 대학에 진학할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진다는 점에서 ‘기회의 균등’을 말한다. 수시가 공정하다는 견해에서도 ‘기회의 균등’과 ‘객관성’을 말한다. 먼저 수시는 일회성 시험의 결과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고등학교 3년 생활 전반을 평가하는 것이기에 더 객관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성적뿐만 아니라 재능과 성장 가능성 등 다양한 항목을 평가하기 때문에 굳이 시험 1등이 아니더라도 명문대학에 진학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기회의 균등’을 말한다.

그러나 공정성 담론은 서열주의와 엘리트주의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학생들을 더욱 ‘공정하게’ 줄을 세운다는 점에서 경쟁을 과열시키고 능력주의를 부추긴다. 물론 능력에 따른 서열화가 뭐가 문제냐는 입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능력이 태생적이든 아니든, 운(運)의 요소를 간과한 것이다. 성공과 성취에 있어서 재능과 노력이 상당 부분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나, 운(運)이라는 요소를 망각한 나머지 오만한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따금 우리는 성공과 성취가 자기 능력과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패하면 ‘아쉽게 운이 없어서’라고 운을 탓하지, 자기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오만한 태도는 경쟁에서 뒤처진 자들에게 패배감과 좌절감을 준다. 존중은 없고 승자와 패자로 분열된 교육 현장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현 엘리트주의 교육이 더 이상 등용문(登龍門)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정성 담론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그동안 교육은 사회적 상승의 통로로 여겨져 왔다. 이는 오래전 국가의 인재 등용 시험 시절부터 당연시 이어져 오고 있다. 사교육 시장이 한국에서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조세재정연구원(KIPF)의 <대학 입학 성과에 나타난 교육 기회 불평등과 대입 전형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2000년에서 2011년까지 “최상위권 대학 진학에서 최하위 계층일 경우 타고난 잠재력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회 불평등 때문에 명문대 진학에 실패할 확률은 적어도 70%”이다. 계층 상승에 대한 부정적 전망도 “통계청 「사회조사」 계층 이동성 부정적 응답이 1999년 11.1% 수준에서 2019년 약 55%”로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과거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도 있었지만, 지금은 허상일 뿐이다. 현 엘리트주의와 경쟁주의 교육은 기존 엘리트층의 세습 도구로 전락했다. 작금의 교육과 입시제도는 공정하지 않다.


‘존중’의 필요성


한국의 교육은 능력주의와 엘리트주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학생들은 그들의 재능과 노력을 존중받지 못한다. 학생들은 흔히 명문대학을 ‘명문 기업’에 갈 수 있는 일종의 보증수표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입시경쟁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경쟁에서 승리한 학생들도 그렇고 경쟁에서 패배한 학생들도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승리자’는 없다. 경쟁에 참여하면서 얻는 심신의 상처 때문이다. 그 상처는 경쟁을 함께하는 학생들끼리 입힌 상처이기도 하다. 승리자인 학생들은 패배자인 학생들이 자신보다 능력이 떨어지고, 앞으로 자신보다 성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승리자인 자신보다 패배자인 학생들이 더 높은 서열의 대학에 진학하면 그 결과를 부정하려 든다. 질투와 시기를 억제하고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네도 경쟁사회에서의 패배감은 극복하기 쉽지 않다. 경쟁에서 순간의 실수는 패배로 이어지고 패배자로 낙인이 찍힌다. 하지만 누구도 그 상처를 보듬어주지 않는다. 명문대학에 진학한 극소수의 엘리트들도 경제적 보상만 얻을 뿐 온전히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다.

교육 개혁을 통해 ‘대학 서열’을 바꾸면 해결할 수 있을까. 국립대학들을 프랑스의 대학처럼 서울 제1 대학, 제2 대학 식으로 바꾸고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여 상향 평준화하면 우리 사회가 더 공평하고 공정해지는 것일까. 모두가 최고의 교육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긍정적이다. 하지만 전국 모든 대학을 ‘서울대’로 만들지 않는 이상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인다. 결과적 평등을 모든 격차에 적용하지 않는 이상 교육격차, 경제적 격차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격차에 결과적 평등을 실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좋은 기업’에 가기 위한 경쟁과 패배감은 심화된다. 학력 탓도 불가능해졌으니 온전히 기업 입사에 실패한 본인의 탓이리라. 물론 교육 개혁을 통해 학벌주의를 타파하면 그 자체로 사회에 긍정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제일 시급한 논의는 ‘존중’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다. ‘존중’의 기준이 높은 임금과 좋은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로 변해버린 사회다. 우리는 저임금이거나 워라밸이 좋지 않은 직업을 선호하지 않는다. 특히 직업에 귀천은 없다지만 우리 사회는 저임금 노동자를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다. “취업 안 되면 치킨집이나 차려야지” 등의 발언도 주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런데 똑같은 치킨집이어도 돈을 더 많이 버는 치킨집 사장님은 추켜세운다. 언론도 ‘존중’이 결여된 사회를 부추기는 듯하다. 한국기자협회보 박지은, 강아영 기자의 <남녀 인구 비등한데…언론엔 `50~60대·남성·관리자`만 보여>에 따르면 “언론에 100번 이상 인용된 인물들의 직업 대부분은 ‘관리자’와 ‘전문가’에 편중"되어 있다. 특히 “통계청의 <2020년 경제활동인구 조사>에 따르면 국내 근로자 중 관리자는 1.5%뿐이지만, 언론에 인용된 인물 중 관리자 비율은 74.4%”에 달한다. 서비스 종사자는 0.1%에 불과했다.


존중과 사회적 기여도


존중의 가치가 살아있는 사회는 엘리트주의와 능력 만능주의에 빠질 필요가 없는 사회다. 굳이 엘리트가 아니어도, 능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교육은 엘리트뿐만 아니라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에 그 역할이 있다. 존중의 대상은 고임금의 전문직이나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직업들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적 기여도가 존중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종종 사람들은 높은 임금이 높은 사회적 기여도의 증거라고 착각을 하곤 한다. 그런 논리라면 교육자라는 직업보다 마약 범죄자가 사회적 기여도가 높아야 한다.

교육을 더 이상 엘리트주의와 서열주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써서는 안 된다. 과거에는 통했을지도 모르나 사회적 계층 상승 담론도 허상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존중과 연대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 지금도 엠제트(MZ) 세대들은 가혹한 취업시장으로 내몰려지고 어린 학생들은 시험 하나로 인생의 ‘승자’와 ‘패자’의 낙인이 찍히고 있다. 부디 올해의 ‘교육 개혁’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란다.

 

편집 : 심창식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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