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받은 아이들 기사를 보면 괴롭다. 특히 아이가 죽음에 이를 정도로 학대한 기사나 아이를 죽이고 자살한 사건 같은 기사를 보면 하늘 아래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 너무도 싫다. 지난 6월에는 조유나 양 실종사건이 있었다예전 같으면 '아이와 동반자살'이라고 기사에서 나왔을 텐데 요새 그런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한겨레기사에서도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  . 

조유나양 가족 수면제 검출…자녀 살해 뒤 극단선택 무게

'아이와 동반 자살'이란 용어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 자살의 의미를 알고 이에 동의하는 아이는 세상에 없다.'아이와 동반자살'이라 쓰는 것은 가장 극단적인 아동학대를 저지른 부모에게 면죄부를 주는 용어다. 괴롭더라도 '자녀 살해 후 자살'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써야한다

'자녀 살해 후 자살'은 부모가 아이를 소유물로 보는데서 온다학대 후 보호받고 있는 아이를 내 것이라며 돌려달라고 악쓰는 부모, 부모가 달라는데 어떻게 안 돌려주냐~는 관계자를 만나면 우리는 아직도 후진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를 부모 아래 두는 유교적 인식에서 온 것이라고 본다.   

2016년 3월 굿네이버스, 세이브더칠드런 등 42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아동학대로 숨진 채 발견된 아동을 추모하는 영정을 들고 학대 근절을 촉구하는 모습.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출처 : 한겨레신문 2021-2-14)
2016년 3월 굿네이버스, 세이브더칠드런 등 42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아동학대로 숨진 채 발견된 아동을 추모하는 영정을 들고 학대 근절을 촉구하는 모습.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출처 : 한겨레신문 2021-2-14)

나는 부모의 물건이 아니다라고 외쳤던 한 아이가 생각난다. 상담소에서 일할 때 만난 아이다.

승희(가명)는 신체적 학대는 아니지만 '버림'이라는 심각한 학대를 받은 아이다.

승희는 원래 친부모님과 살았다. 승희 세살 때쯤 엄마가 집을 나갔다. 원인은 가정불화. 내가 만난 가정에서 여자가 집을 나가는 대개 원인은 남편의 폭행, 음주, 노름, 생활력 부족 등이다. 혹자는 ‘여자가 바람이 나서’라는 생각하겠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돈을 못 벌어도 부부간 사이가 좋으면 여자들은 아이들 놔두고 가출하지 않는다. 가출하는 엄마를 편들어 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그렇게 살다간 죽을 것 같아서 나간다. 그만큼 남편에게서 받은 심리적, 신체적 손상이 크다.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이해하고 감싸주고 도와주어야 한다.

승희 엄마도 그래서 나갔다. 처음엔 돈 벌어 애들 데리러 온다고 나갔다. 애들 땜에 다시 들어 왔다가 만날 아빠와 싸우다가 두드려 맞고 다시 또 나갔다. 두 번째 나간 후 엄마는 연락이 끊겼다. 어느 날 아빠도 돈 벌어 온다고 하고는 나갔다.

그 후 오빠와 언니 둘과 승희는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과 함께 살았다. 아빠는 가끔 와서 생활비를 주고 갔지만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다. 할머니가 주로 시장 노점상에서 번 돈과 삼촌이 직장에서 번 돈으로 살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집에 왔다. 할머님과 의논하여 승희를 이웃 동네 두부공장 집에 데려다 주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승희를 입양시킨 것이다.

양부모 집에는 오빠가 있었다. 승희 초등학교 때 고등학생이었다. 승희는 두부공장 집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잘 자랐다. 양부모 사랑도 받았고 학교에서도 잘 적응했다. 공부도 잘 따라했다. 양부모 집에서 사는 동안 승희는 상처받지 않고 잘 자랐다. 그러다가 그 집을 떠나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오빠가 부모님 두부공장 일을 도와주다가 콩을 높이 쌓아놓은 곳에서 떨어져 뇌를 다쳤다. 오빠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했다. 병원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집에 와서도 가끔 발작도 했다.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양부모는 오빠를 돌보는 일에 힘겨워했다. 승희도 잘 돌보지 못하게 되자 승희 4학년 말에 할머니에게 승희를 보냈다.

그 때 승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려서 집을 떠났기 때문에 양부모를 친부모라고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할머니 집과 가족에게도 애정이 없어 승희는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자주 집을 나와 두부공장 양부모 집에 가곤 했다. 그러면 다시 할머니네로 보내졌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승희는 아예 집을 나왔다.

처음에 승희는 자신이 사는 도시를 돌아다니다 경찰에 단속이 되어 수차례 집으로 돌아갔다. 6학년이 되면서 승희는 무대를 서울로 옮겼다. 2년간의 가정부적응이 승희를 가출부랑아동으로 만든 것이다.

내가 승희를 만난 것은 영등포역 근처에서 부랑생활을 몇 개월 한 후였다.가출청소년을 만나면 우선 보호자부터 찾는다. 승희는 주소도 모른다, 학교도 다니지 않았다며 어떤 정보도 주지 않았지만 집은 찾아 갈 수 있다며 혼자 집에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보낼 수는 없는 일이라 같이 가자며 승희와 함께 나섰다. 승희는 한 동네를 뺑뺑 돌고 또 돌았다. 도망갈 기회만 찾았던 것 같다. 나는 집이 싫으면 부모님 만나 이야기하고 나와 같이 상담소로 돌아가도 된다고 말했다. 이 말에 도망은 포기한 것 같았다. 시장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는 할머니께 나를 데리고 갔다.

할머님은 승희를 보자 반기지 않았다. “어디서 또 데려왔냐?“얘는 데려다 놓으면 그 다음날 또 나간다”라고 말씀하셨다. 승희 문제를 의논하자며 할머님과 승희 집으로 향했다. 저녁까지 기다려 퇴근한 삼촌을 만났다. 우리는 승희를 상담소에 두기로 결정했다. 승희도 원했다. 승희는 그 집 식구가 아니었다. 언니들의 쌀쌀한 반응, 삼촌의 짜증 섞인 반응, 그리고 할머님의 고달픈 반응... 물론 승희 가출이 식구들을 힘들게 했겠지만 몇달 만에 나타난 승희를 반가워하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나라도 그런 냉랭한 집에서 하루라도 살 수 없었을 거다. 아무리 그래도 저녁밥은 먹고 가라는 할머님 말씀에 저녁을 먹고 승희와 나는 상담소로 향했다.

승희와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가족과 떨어져 살게 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을까? 천천히 차근차근 가정복귀를 시도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마음이 어두웠지만 승희는 무척 좋은 듯 했다. 그 후 승희는 상담소 생활에 잘 적응했다. 승희는 학습능력이 뛰어났고 욕심도 많아 늘 상표 모으기에서 1등을 차지했다. 애교 있고 눈치도 빨라 주어지지 않은 일도 알아서 척척 해내는 모습에 다른 선생님들의 사랑도 많이 받았다.

나는 승희를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해주고 싶었다. 나와 일정 기간 지내면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안정을 찾은 후 아동복지시설에 가서 중학교를 다니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학습과 책임감 훈련에 지나치다 싶게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내가 승희를 너무 오래 잡아 두었던가? 나와 지내던 몇 달 동안 승희는 두세 번 상담소를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집을 나와 생존한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부랑하며 사는 삶에 두려움이 없다. 굶어 죽지도 않으며, 얼어 죽지도 않고 사는 방법을 안다. 오히려 자기 마음대로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랑 경험이 많은 아이들일수록 규칙에 얽매이는 것에 갑갑함을 느낀다. 견디지 못하면 바람 쐬듯 가출했다가 다시 들어오기를 반복한다.

승희도 그런 맛을 잘 아는 아이다. 수차례 상담소에서 나가려고 시도했다. 숨어 있다가 걸린 적도 있고, 진짜 나가서 며칠 돌아다니다가 다시 경찰에 의해 끌려온 적도 있다. 그런 위기와 회복이 반복되면서 승희는 학교에 빨리 복귀하고 싶다고 했다. 스스로 삶의 방식을 결정한 것이다.

새 학기 시작 6개월 전 승희는 아동복지시설로 옮겼다.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시설이다. 이미 그 곳에는 승희도 잘 알고 있는 중학생 언니가 적응을 아주 잘 하고 있었다. 둘이 잘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시설에 가기 전 사전 적응을 위해 수차례 만남도 가졌다.

시설에서는 승희에게 6개월 특별 과외수업을 받게 해주었다. 중학교 학업 적응을 위해 대학생 자원봉사 선생님을 붙여주셨다. 공부도 잘 따라했고, 총무 수녀님, 담당 수녀님 모두 싹싹하고 영리하다고 칭찬도 많이 하셨다. 중간에 자기보다 어린 아이의 돈을 빌리는 방식으로 빼앗은 적이 있었다. 그 돈으로 선물을 사서 나를 찾아왔다. 아이들은 이렇게 황당할 때가 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승희가 가출했다는 소식이 왔다. 그렇게 잘 지내던 아이가 가출을 했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을 터인데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다. 중학교 입학이 두려웠을까? 그리곤 소식이 끊어졌다.

그 해 여름 승희에게 전화가 왔다. 양말 공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토,일요일도 없이 일한다며 자기는 일하는 게 좋다고 했다. 명랑한 목소리였다. 기가 막혔지만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아주 가끔 오는 전화를 받으면서 그 해가 갔다. 다음 해 나는 갑자기 근무처를 옮겼다. 같이 근무하던 직원에게 승희에게 전화 오면 내 연락처를 알려주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이상하게 그 후 승희는 연락이 없었다. 그렇게 끊어졌다.

승희는 애교가 있으면서 좀 성깔도 있는 배우 염정아와 외모가 비슷한 예쁜 아이다. 영리하고, 자존심도 세서 이 세상을 어떻게든 잘 헤쳐 나갔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옛말로 역마살이라 긍정적으로 말하는 부랑벽이란 쉽게 고쳐지지 못한다. 부랑벽이 있는 아동이 실제 성인 노숙자가 된다는 자료를 보면서 혹시 승희도 여자 노숙자가 되었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 때도 있다.

나와 울고 웃고 하던 아이들 중에서 상식적인 삶의 궤도에 들어가서 잘 지내고 있는 아이들은 거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름만 간신히 기억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궤도를 벗어난 아이들은 가끔 생각나서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그 아이들을 잘 이끌어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함과 무능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하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생각날 때가 있다

“내가 뭐 물건이에요? 이리 보냈다 저리 보냈다 하게”

승희가 자신을 이리저리 보낸 것에 대하여 퉁명스럽게 나에게 던진 말이다. 같은 어른으로서 아직도 마음이 찔린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저런 상처를 얼마나 이해할까? 아마도 어른들 자신이 저런 취급을 받으면 상대방을 원수 삼았을 거다. 단지 힘없고 반항할 수 없는 아이라는 이유 하나로 얼마나 함부로 취급하는가.

부모가 함께 죽자고 할 때... 어른 감정이 실린 무지막지한 힘으로 때릴 때... 원하지 않는 곳으로 보내질 때... 아이들이 겪었을 공포와 무기력감은 평생 갖게 되는 트라우마가 될 것이다. 저항할 수 없는 아이들을 감정이 없는 물건 취급하고 권리가 없는 소유물로 보는 생각세상이 잘 살게 되면 바뀔 거라 생각했는데.... 세상은 더 잘 살게 되었는데 그런 생각의 수위는 더 높아지고 더 잔혹해지는 느낌이다. 인간성이 점점 상실되어가는 것만 같다. 이 무서운 세상을 무엇으로 바꿀 수 있을까? 법을 강화해야한다는 말이 많다. 실제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상식으로도 못 바꾸었는데 법으로 바꿀 수 있을까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장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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