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5 년 6월 8일 남망산 초소에서 연락이 왔다 .청산도 쪽에서 30여 척의 왜 선단이 가리포 쪽으로 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는다 . 이것이 석장포 전투의 시작이다 .

보고를 받은 첨사는 직접 확인하고 작전 계획을 세운다. 숫자로는 이길 수 없음을 직감한 첨사는 왜선을 유인하려고 왜선을 향해 돌진을 한다 .한참 돌진하다 도망가는 것처럼 석장포를 향해 후퇴 한다 . 그리고선 중도리 쪽과 망석리 쪽으로 나누어 숨는 척 한 것이다 .

당시에는 지금의 중도리 주유소가 있는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 망석리 쪽도 바닷물이 들어가는 때였으니 그것이 가능했다 .당시 날자를 보면 만조 시간이 15시 경이니 중도리와 망석리 쪽으로 배가 들어갈 수가 있어서 왜선을 그리로 유인하여 사전에 배치된 병사들의 불화살로 격침하였다고 전한다 .

1522년에 설진된 가리포진 (지금의 완도 )은 그해 7월 3일 초대 첨사로 부임한 이반 (李班 )을 시작으로 228명의 첨사가 지나갔으며  375년간 지속되었다 .석장포 전투가 있던 때는 가리포진 제 60대 최강첨사였다 .

최강 (崔堈 )첨사의 본관은 전주 (全州 ). 자는 여견 (汝堅 ). 호는 소계 (蘇溪 ). 아버지는 최운철 (崔云哲 )이다 .최강은 1559년 고성군 구만면에서 태어났다 .1585(선조 18)년에 무과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있던 차 ,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지역을 지키고자 형 균(均 )과 함께 고성 (固城 )에서 의병을 일으켜 사천 , 웅천 , 진주 , 영천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

그 공을 인정받아 1603년 11월 24일 가리포 첨사로 임명받았다 .이렇게 부임한 지 2년 여 만에 석장포 전투가 있었으나 대승을 거두고 이 전공으로 일등공신에 록훈 (錄勳 )되고 가선대부가 되어 1605년 11월 2일 순천부사로 영전하였고 ,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광해군 때는 충청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퇴하고 낙향하여 1614년 2월 16일에 사망하였다 .

조정에서는 병조판서에 추증하였고 의숙 (義肅 )의 시호를 내렸다. 이 전투를 끝으로 왜구는 가리포 및 인근 지역에 나타나지 않았다.

최 첨사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받은 가리포진 유지들은 고성까지 찾아가 3년 상을 치르고 돌아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

이렇게 한 것은 재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주셨던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을 것이다 .

석장포 해전 기념비  
석장포 해전 기념비  

완도군에서는 2005년 01월 04일 완도읍 석장리 1067-2 에 최강 장군 석장포해전 대첩비 (崔堈將軍 加里浦海戰 大捷碑 )를 세우고 완도군 향토문화유산 제 7호로 지정하였다 .

최강첨사의 고향인 경남 고성에는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127에 사당이 있다 .

이 사당은 1623년 창건되어 의민공 소호 (蘇湖 ) 최균 (崔均 )과 의숙공 소계 (蘇溪 ), 최강 (崔堈 )을 병향한 사당을 세우고 도산서원 (道山書院 )이라 하였다. 서원의 봉안문 (奉安文 )과 상향문 (常享文 )은 송이석 (宋履鍚 )이 지었고, 상량문은 정홍경 (鄭鴻慶 )이 지었다 .

도산서원           
도산서원           

이 글은 10여 년 전 필자, 정영래 , 이경구와 셋이서 현장 답사하고 썼으며 고성 사당도 직접 방문하고 찍은 사진들이다 .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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