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유길종 옥수 지업사 대표

 

1944년 유길종 옥수 지업사 대표
1944년 유길종 옥수 지업사 대표

옥수 지업사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작은 난로위에서 끓고 있는 양은 주전자, 옹기종기 둘러앉은 친구 분들, 끓고 있는 물처럼 친구 분들의 담소도 따뜻한 훈기를 담고 모락모락 피어난다. 소박한 시골 점방(店房)을 그린 풍경화 한 편이다.

도라지 물을 올려놓았지만 하루 종일 끓여서 마시고 물 붓고 또 마시고 물 부어서 사모님이 “이제 맹물됐어요” 라고 하시며 싱겁다는 표정이시다. 맹물이 아닌 불순물이 없이 여과된 물이라고 말한들 따져 물을 이도 없을 것이다.

인생도 진한 삶을 살고 여과된 물만 남은들 어떠냐 옹기종기 모여서 한 모금씩 목을 축여주며 끝까지 그 몫을 해낸다. 옥수 지업사 유 사장님의 친구 분들도 도란도란 둘러앉아 훈훈한 품으로 서로를 안았다. 

나이 들어 맹물 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도라지 물을 다 우려낸 후라 역할을 다하고 맹물이 되었다. 맹물만 남았든 기저는 고사리물이었다. 지금 어르신의 삶도 여과지로 우려낸 삶, 불순물이 없어 정갈할 뿐이다.

■ 40년의 명맥, 옥수 지업사 ‘기름질 옥(沃)’의 의미를 찾다

고향인 청성면에서 1969년도에 꿈 한번 펼쳐보겠다고 옥천으로 나왔다. 한 자리에서 40년 동안 지업사를 하고 있다. 공간도 사람도 물건도 그대로, 40년 동안 옥수 지업사는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친구들의 정담이 오가는 사랑방으로 남았지만 1980년대 경기 좋을 때는 옥수 지업사의 미닫이문이 매일 정신없이 열고 닫혔다. 로라(롤러)가 다 닳아 삐그덕 거리는 파열음이 옥수 지업사의 활황을 소리로 말해주고 있었다. 일의 양이 많아서 다 쳐내질 못할 정도였다. 

■ 곤궁한 유년시절

5남매 중 가운데, 위로 누나 둘, 동생 둘 이었는데 사는 건 말도 못했다. 쌀밥은 구경도 못하고 풀 죽만 겨우 먹고 살았다. 6.25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려서 어머니 손을 꼭 붙잡고 다녔는데 그 때가 전쟁인지도 몰랐다. 하루는 저녁에 인민군이 들이닥쳐 아랫방 윗방을 뒤지더니 총 세워놓고 군홧발 뻗고 밥 내놓으란다. 서릿발 같은 으름장에 어린 나도 벌벌 떨었다. 겨우 예닐곱 살 되었을까 한 어린나이에도 아련한 기억이 있는 것 보니 놀란 가슴이 틀림없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총소리에 소름이 돋고 심장은 오그라들었다. 식구들과 같이 어디론가 피난을 가서 그 집의 작은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소리도 못 내고 벌벌 떨고 있었다. 총소리에 숨이 턱턱 막혔다. 어린 나이에 전쟁은 내가 만난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살다보니 매일이 전쟁이고 우리가 사는 여기가 전쟁터였다. 그 삶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자가 되었다. 승부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막판에 코로나라는 녀석과 한 판 승부를 벌이고 있다. 나만 벌이는 전쟁이 아니니 위로하고 잘 버텨보련다.

유년을 기억하려면 어머니 생각에 하늘을 또 높이 올려다보아야 한다.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곤궁한 살림에 일찍 떠나신 아버님 몫까지 책임져야 하는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감히 짐작이나 했을까. 흰쌀밥은 동네에서 큰 소리께나 치는 사람들이 먹고, 우리 같은 소작농의 자식들은 풀죽이나 먹고 살았다. 살림이 조금 펴서 농사로 먹고 살았지만 보리 콩 조금씩 입질이나 하고 좁쌀 정도가 양식이었다. 겨우 한숨 돌리는 시점에 청성 청마 초등학교 다니면서 부모님을 도와주었다. 어린 나이에 다들 집안일을 거드느라 그때는 열 살만 되도 애어른이었다. 


■ 청년, 먹고 살길을 찾아 대전 철도국 기관차 조수로

집안 살림이 곤궁해서 먹고 살 궁리 중에 나는 대전 철도국에 취업을 했다. 철도국에 근무하고 월급을 받아보니 딱 쥐꼬리만 했다. 기관차 조수로 취직을 하고 기관사 옆에 앉아 신호를 봐가면서 기관사를 도왔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는데 씽씽 달리는 기차 안에서는 간간이 청춘의 끓는 피를 식히기도 했다. 누런 봉투에 담긴 첫 월급을 받고 바람을 훅 넣어 봉투를 벌려보니 1만5천원인가 종이 몇 장 달랑 들어있었다. 입에 풀칠이나 하는 꼴이라 청춘의 시간을 기관차 조수로 계속 묻어두기에는 암담했다. 다시 옥천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 지업사, 장사의 길에 들어서다

버스가 몇 대씩 움직여 출퇴근을 시키던 옥천에서는 큰 회사에 그 흔히 말하는 낙하산 줄 타고 취업을 했다. 막상 큰 회사에 들어가 보니 내 예상과 빗나가는 삶의 방식들을 접하면서 실망과 분노를 같이 맛보았다. 

성격자체가 거짓말 할 줄 모르고 원리원칙주의자인데 공구관리와 자산관리 일을 분담하게 되었다. 위험한 공구를 다루다보니 몸을 다쳐서 6개월을 병원에 입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퇴원 후에 청천벽력같은 일을 알게 되었다. 나 없는 사이에 공구를 007 가방에 넣어나가서 팔아먹는 사건이 생겨서 일이 크게 벌어졌다. 쇠붙이라 다 돈이고 공구 하나가 당시 돈으로 3천원이 넘었으니 007가방 몇 가방만 들고 나가도 제법 돈이 됐다.

지금도 세상사가 내 마음 같지 않지만 그 옛날에 씨씨티브이가 있기를 하나 컴퓨터로 장비 정리를 하나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니 한 사람만 마음 잘못 쓰면 열 사람이 지켜도 소용이 없었다. 열 사람이 도둑 하나를 못 잡는 다는 말을 우리 옛 어른들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다 살면서 뼈저리게 겪은 만고풍상 끝에 얻어낸 세상 공부였다. 

퇴원 후에 복직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공구를 사고파는 모습이 다른 때보다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아 그래 장사를 해야 겠구나 생각하면서 공구 장사를 할까 페인트 장사를 할까 고민을 했다. 건설 경기가 슬슬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필요한 자재들은 많았다.

가게만 차려놓으면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드나들 줄 알았지만 세상사가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금구리에 가게를 얻었다. 아내와 장사를 시작하면서 어머니께서 2남 1녀를 키웠다. 일단 가게 얻어놓고 2~3개월 빈 공간으로 두었는데 앞으로는 종이장사가 잘 될 거라는 의견들이 여기저기서 들리면서 나는 벽지 종이 장사를 하기로 했다. 

장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건 당연한데 당숙이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지업사가 많아 질 때 3평짜리 가게에 물건을 다 못 채워서 애를 먹었다. 간신히 쟁여놓았던 벽지를 빼면 박스가 쑥 나와서 와르르 무너지고 그 정도 고단한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어디서 무엇을 파는지 알아야 물건을 떼어 와서 팔 텐데 대전을 나가서 계속 알아보고 다녔다. 

어느 날 대전 중앙시장에 나갔다가 장판 실은 차에서 사람이 내려서 따라 갔더니 벽지를 파는 가게로 들어가는 걸 보고 얼떨결에 나도 물건을 가져와서 장사를 시작하기도 했다. 모든 시작이 다 그렇듯이 옥수 지업사의 시작도 참 어설펐다.

그래도 사람들한테 인심을 잃지 않았던지 물건이 잘 팔렸다. 처음에 벽지를 가져가서 팔고 돈 갖고 오라고 하는 사장님이 계셔서 시작을 어렵지 않게 했다. ‘마진 많이 붙여서 팔고 싶지 않아서 내 나름의 계산법으로 장판이나 벽지를 팔았는데 다른 집보다 물건 값이 쌌던 모양인지 다른 가게들이 들고 일어나서 난리가 났다. 나보고 덤핑 장사 한다고…. 마진 덜 먹고 많은 사람들에게 팔려는 전략이었는데 괜한 오해를 사기도 했다. 

나는 순박한 사람이지만 나를 건드리면 못 참는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니고 좋은 마음으로 적게 먹고 손님들에게 좋은 일하면서 장사를 잘해보려는 의도였다. 소란스러운 일들을 잠재우고 장사에 매진했다. 우리 옥수 지업사가 옥천을 장악했다. 나랑 같이 일하는 기사들도 일을 열심히 했다. 벽지만 파는 것이 아니라 도배일도 연결해서 맡았는데 다들 성실하게 일하고 장판도 깔끔하게 잘 깔아주니 손님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성실하고 정직하게 장사하면 손님들이 먼저 알아준다.

 


■ ‘옥수 지업사’ 40년을 한결같이 성업하다

1980년대가 우리 옥수지업사의 황금기였다. 다들 경기가 좋으니 집도 고치고 건축 붐이 일어났다. 1982년도에 시작해서 40년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우리 자손들은 지업사를 맡을 아이들이 없어서 우리 부부가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지만 우리 대에서 마칠 생각을 하면 아쉽다. 그래도 지업사 일하면서 아이들 공부 시키고 우리 부부가 일 잘한다고 벽지회사에서 여행도 보내주고 시골 사람이지만 적당히 누리고 살았다.

우리 아들 외국에서 공부할 때 대전 외환은행 가서 달러로 바꿔서 돈 보낼 때는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돈 뭉치를 잠바 속에 꽁꽁 숨겨서 대전까지 가는 길이 구만리 같았다.

적은 돈이 아니어서 바꿔서 보낼 때는 사실 장사가 잘 되도, 안 입고 안 먹은 돈으로 모은 돈이라 손이 바르르 떨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이 돈으로 우리 아들이 공부 열심히 해야 할텐데” 하는 마음만 가득했다. 지금은 우리 아들이 사회에서 자리 잘 잡고 있으니 흐뭇하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우리 부부도 젊은 시절 하루하루 알토란같이 살았다. 남들이 우리가 성업할 때 “유사장 장사 잘 되는데 건물 사지 그래?”라고 부추겼지만 우리는 건물 사는 거 보다 자식들 머릿 속에 지식 넣어주는 게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 아이들 공부 뒷바라지를 했다. 후회도 없고 잘했다는 생각이다.

돈도 벌고 지역에서 신임도 얻어서 내 고향 옥천 잘살게 하고 싶은 마음에 정치 현장에도 발을 디뎌보기도 했다. 이것저것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보았다. 어린 시절 풀죽만 먹고 살다가 그래도 옥수 지업사 하면서 사람답게 살았다. 문중 일 보면서 대종회 부회장 일까지 맡았으니 골고루 사는 맛을 다 보았다. 

나이 들어가는 나에게 사람들이 간간이  “젊어보이세요, 웃는 인상이 너무 좋으세요” 라고 말을 건네기도 하는데 그냥 듣기 좋은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좋은 건 틀림없다. 모든 건 한결같이 내 곁을 지키는 아내 덕분이다. 내가 독한 마음먹지 않고 험한 말 하지 않으면서 살아온 내 마음보가 선한 얼굴로 나타난다니 감읍할 따름이다. 

 


* 이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okcheoni.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40

편집 : 김미경 편집장 

김경희 옥천신문 객원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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