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대구에 사는 제자 현송(玄松)으로부터 아래의 한시(漢詩) 한 수(首)를 받았다.

欲坐而坐欲眠眠
看卽林巒聽卽泉
蓬屋草庭人不到
往來風月與雲煙

앉고 싶으면 앉고 자고 싶으면 자고,
보이는 이 산이요 들리느니 물소리라.
풀 우거진 초가집 찾는 이 하나 없고,
오가는 것은 바람과 달 그리고 구름 안개뿐이로다!

이 시는 차천로(車天輅, 1556-1615)의 <만흥>(漫興) 전문이다. 차천로는 조선 중기 때 문신, 문인으로 문장에 뛰어나 선조가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전담했다.

그는 시와 가사에 조예가 깊었고, 글씨에도 능하였다. 특히 한시에 뛰어나 한호(韓濩)의 글씨, 최립(崔笠)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이라 일컬어졌다.

나는 이 시를 읽고 오늘 아침 새벽에 그에게 다음과 같이 답글을 보냈다.

현송, 차천로의 시, '漫興'을 올렸군! '漫興'이란 이렇다 할 느낌을 받지 않고 저절로 흥취가 일어난다는 뜻이네. 자연인으로서 시골 생활의 여유로움을 읊은 시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이리 저리 서성이다 앉고 싶으면 앉고(欲坐而坐),
자고 싶으면 잔다 했네(欲眠眠). 얼마나 여유로운가?!
앉으나 누우나 보이는 것은 숲과 산(看卽林巒),
그리고 들리는 것은 샘물 소리(聽卽泉) 뿐일세.

'蓬屋'이라 했네. 쑥집. 산골이니 논이 없어 볏짚이 어찌 있겠나? 그러니 쑥으로 지붕을 엮을 수밖에...

뜨락엔 찾아오는 이 없어 풀이 우거졌네(蓬屋草庭人不到),
오직 오고 가는 것은 바람과 달, 그리고 두둥실 떠도는 구름과 안개뿐(往來風月與雲煙),

현송, 이 시를 대하니 문득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떠오르네.

園日涉以成趣, 門雖設而常關, 策扶老以流憩, 時矯首而遐觀, 雲無心以出峀, 鳥倦飛而知還, 景翳翳以將入, 撫孤松而盤桓...

매일 정원을 거니네. 그래도 늘 흥취가 나네. 비록 문은 있어도 찾아오는 이 없어 늘 닫혀있네.

도연명은 '常關'(늘 닫혀있다)이라 했는데, 차천로는 '人不到'(사람이 이르지 않는다)라 했네.

늙은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고 이리저리 다니다 힘들면 바위위에 앉아 쉬네(策扶老以流憩),
때로는 머리를 들어 멀리 바라보는데(時矯首以遐觀),
이때 안개구름이 무심히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르고(雲無心以出岫),
지친 새도 날아돌아갈 줄 알더군(鳥倦飛而知還).
이때 햇볕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려 하면서(景翳翳以將入),
외로운 소나무 주위를 맴돌고 있네(撫孤松而盤桓).

현송, 오산 차천로는 이때 정경(情景)을 '看卽林巒聽卽泉', '往來風月與雲煙'이라 했네.

이처럼 똑같은 대상을 보면서도 보는 사람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다네. 시는 바로 그 시인의 느낌, '情意'를 나타낸 것일세. 서로 다른 현실적 자아(自我)와 내면적 자아(自我)에서 오는 차이일세. 景과 情!

그럼, 내친김에 석운(石耘) 서헌순(徐憲淳,1801-1868)의 시, <偶詠>을 다시 감상해보세!

山窓盡日抱書眠
石鼎猶留煮茗烟
簾外忽聽微雨響
滿塘荷葉碧田田

산창에서 온종일 책을 안고 졸고 있는데,
돌솥 가에선 아직도 차 끓이는 연기 서려 있네.
주렴 밖에선 홀연히 가랑비 소리 들리는데,
연못에 가득한 연잎은 푸른 잎이 둥글둥글!

여름날 산창 가에 누워 책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네. 한데, 아직 돌솥에선 차 끓이던 연기가 서려 있네. 이때 주렴 밖에선 '우두둑!' 가는 빗소리가 들려오네. 이때 시인은 그 소리를 "聲'이라 하지 않고, '響'이라 했네. 같은 소리지만 시인에 따라 들리는 느낌이 다르다네.

비는 연못에 가득한 푸른 연잎 위로 떨어지네. 이때 빗방울은 떨어지자마자 연잎에서 또르르 구슬처럼 굴러 내리네. 그때 연잎에 있던 청개구리가 놀라 깡충 옆 연잎으로 뛰어가네.

현송, 여기 '田田'이란 '둥글고 둥글다'는 뜻일세. 시인은 둥근 연잎을 둥근 밭으로 본 것이지. 얼마나 멋진가! 한데, 어느 곳에선 이 '田田'을 '團團'으로 한 곳도 있다네. 역시 '둥글다'는 뜻이나 이때 '團團'은 연잎에 떨어진 빗방울이 구슬처럼 둥글게 굴러 내리는 것을 표현한 것일세.

시란 이처럼 글 뜻풀이에 머물지 않고 시인의 내면세계를 꿰뚫어 볼 때 참맛(眞味)을 맛볼 수 있다네. ㅎㅎㅎ

아이고! 찌개 다 탔네. ㅉㅉㅉ
오늘은 이만 총총 줄여야겠네!

아 참! <오산 차천로 선생 문학비 > 내가 살았던 과천 별양동 중앙공원에 있다네.

2022. 8. 25. 새벽

김포 여안당에서 취석 한송이 대구 현송이 올린 오산 차천로의 시 '漫興'을 읽고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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