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모성과 예술의 만남 -

 

파리, 미술월간지 눈(L^OEIL) 1999년 2월호 "목석원 - 나무와 돌의 정원 "특집보도.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파리, 미술월간지 눈(L^OEIL) 1999년 2월호 "목석원 - 나무와 돌의 정원 "특집보도.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아르노 르 브뤼스끄 박사(미술사)는 프랑스 파리에서 발간되는 미술월간지 ‘눈’ 1992년 2월호에 “목석원, 나무와 돌의 정원”이라는 제목으로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의 생명이 돌 속에 불어 넣어졌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 (아래 번역: 김영숙 불문학박사)

백운철은 그의 섬 제주의 역사와 문화유산보존에 온 열정을 바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가 보지 못한 방식으로 집단 기억 보존의 차원에서 그 내용을 무대화 하고 활성화하고 있다... 신들린 사람이라고도 불리는 백운철의 저력은 제주의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전설"이다.  이 전설 속의 모성애와 아들들의 절망감은 그가 세운 돌탑위에 얹힌 돌얼굴들에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온 섬을 헤매어 찾은 돌 얼굴들을 목석원에 수집하는 것은 전설 속의 아들들의 비통한 영혼을 위로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바닷가에서 발견된 이 돌들은 수 백 년 동안 비, 바람, 파도에 씻겨 예술작품에 비길 만한 기이한 형상들을 하고 있다. 이른 아침 목석원을 찾은 방문객은 드디어 평온을 찾은이 돌얼굴들이 아침 안개 속에서 나누는 조용한 대화에 놀라게 된다.

안개 낀 목석원 #1. 1998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안개 낀 목석원 #1. 1998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이하 사진 들은 그 당시 파리 사진의 달의  "다빠보"에서 전시된 50점중 다섯 점이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어머니의 사랑의 죽을 먹고난 후, 이러한  사실을 알고, 땅을 치며 통곡하는 오백자식들의 비통한 표정이다.

오백장군, 비탄에 빠져있는 설문대할망의 자식들 #1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오백장군, 비탄에 빠져있는 설문대할망의 자식들 #1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오백장군, 비탄에 빠져있는 설문대할망의 자식들 #2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오백장군, 비탄에 빠져있는 설문대할망의 자식들 #2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오백장군, 비탄에 빠져있는 설문대할망의 자식들 #3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오백장군, 비탄에 빠져있는 설문대할망의 자식들 #3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비탄에 빠져있는 설문대할망의 자식들 #4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비탄에 빠져있는 설문대할망의 자식들 #4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비탄에 빠져있는 설문대할망의 자식들 #5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비탄에 빠져있는 설문대할망의 자식들 #5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탐라목석원은 경제난으로 2009년에 문을 닫았다.)

그 후, 탐라목석원은 세계적인 ‘현대정원’에 선정되고, 2001년 9월 프랑스 문화재관리국 연간지 ‘모뉴멘탈’에 아르노 박사는 이와 관련해서 두 번째 기고를 했다.

예술가 백운철이 한국 남단 제주도에 일궈 놓은 정원, 그곳에서는 돌로 된 형상들이 설문대할망의 전설을 노래한다. 소복이 쌓인 눈, 그 청정한 고요 속에서 흰옷을 차려입은 돌들이 제주의 전설을 지키고 있다. 돌과 나무의 정원 목석원은 신화와 시적 서정을 바탕으로 섬의 기억을 노래한다. 아침이 밝아오면, 나이 모를 태고의 광물계 무리들이 안개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우리를 그 오묘한 대화 속으로 이끌어간다... 길들여지 지 않는 섬 제주도는 여자, 바람, 돌이 많은 삼다도이다. 그중 첫 번째 것은 전통적으로 부계사회인 타 지역과 구분되는 모계 사회적 구성을 알려 준다...

아르노 박사가 제주도를 “전통적으로 부계사회인 타 지역과 구분되는 모계 사회적 구성” 이라는 문화인류학적 언어로 묘사한 것은 의의가 깊다. 아르노 박사는 그만큼 백운철의 작품세계에서 드러나고 있는 모계사회의 독특한 질서와 가치 -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 초월적 세계와 맞닿아 있는 아들의 헌신과 예술성 - 에 감동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예술계는 탐라의 모계제(여성계통을 따라 이루어지는 사회 제도) 정서와 예술성의 합치에 녹아들었다.


2002년12월 - 2003년 1월호, 프랑스의 격월간지, 정원조경, 인테리어장식, 건축 관련 <메종 프랑세즈>지에 아르노 박사의 세 번 째의 글이 실렸다. “목석원, 그 머나먼 섬의 정원” 이라는 제목의 글은 백운철의 인생 후반기의 도전을 예고해주고 있었다.   

이제 백운철은 '제주돌문화공원'이라는 더욱 원대한 계획을 총괄 기획하고 있다. 제주돌문화공원 역시 설문대할망 신화를 핵심 주제로 삼고 있다. 설문대할망의 몸을 상징하는 형태로 지표면과 동일하게 세워질 건축물 주변에는 오백 장군 아들들을 상징하는 오백개의 탑들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 백운철의 계속되는 여정은 '땅의 정신(향토정신)'을 영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해서 문화유산과 예술적 감성이 어떻게 서로 만나는 가를 여실히 보여주게 될 것이다.

2011년, 백운철은 아르노 박사의 추천으로 프랑스 철학학회(초형이상학회)가 주는 최고상 <그랑지두이>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프랑스의 초형이상학회가 백운철에게 수여한  <그랑지두이>상장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프랑스의 초형이상학회가 백운철에게 수여한 <그랑지두이>상장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프랑스의 초형이상학회가 주는 <그랑지두이>상을 수상하기까지 백운철은 파리 사진계에서 남다른 활약을 했다. 한국을 방문한 레오나르 사진작가와의 연결로 인해 1988년 10월, 파리에서 2년마다 주관하는 '사진의 달'에 초대를 받는다. 한라산 영실사진 오픈식에서 사진평론가/큐레이터인 류마니박사와 아르노 박사 부부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면서부터, 프랑스에서 여러 차례 영실사진전을 갖는가하면 마지막으로 파리국립도서관(주관처) 콜베르 갤러리에서 104인 현대사진대전(大展) 에 그의 영실사진 두 작품이 선정된다.

1994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콜베르 갤러리, 세계104인 현대사진대전에 초대된  백운철의 두상 사진: 희노애락을 벗어나 '무의 경지'에 들어가면서 바위가 된 모습 #1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1994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콜베르 갤러리, 세계104인 현대사진대전에 초대된 백운철의 두상 사진: 희노애락을 벗어나 '무의 경지'에 들어가면서 바위가 된 모습 #1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1994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콜베르 갤러리, 세계104인 현대사진대전에 초대된 백운철의 두상 사진: 희노애락을 벗어나 '무의 경지'에 들어가면서 바위가 된 모습 #2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1994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콜베르 갤러리, 세계104인 현대사진대전에 초대된 백운철의 두상 사진: 희노애락을 벗어나 '무의 경지'에 들어가면서 바위가 된 모습 #2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이 돌사진들은 모두 백운철이 한라산 영실에서 수집한 돌 들이다.

제주대학 박물관에 기증한 고 홍정표 선생  흑백사진 50점도 백운철이 직접 인화한 60년대 '제주사람들의 삶' 까지 모두 루마니 박사에 의해 프랑스국립도서관 특별 사진국에 소장되는 이변이 발생 한다. 도합 250점이다. 프랑스의 전설적 사진가 브레숑작품 250점 소장과 대등하게 소장 됨으로써, 백운철은 제주돌문화공원은 물론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신화를 국제무대에 우뚝 세웠다.

 

돌문화공원은 무슨 의도로 기획되어졌나?

목석원과 돌문화공원의 설립 상황을 살펴보면 규모에서 뿐 아니라 만들어진 의도에서 차이를 볼 수 있다. 목석원에서는 예술가 백운철이 젊은 혈기로 40년간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신화를 주제로 돌과 나무 정원을 만들어 희귀한 전시를 하여 연 백만의 관람객을 유치했다. 그런데 어느 시기가 되자, 마치 하늘이 정해 놓은 기간이 끝난 듯, 각종 사건이 일어나면서 목석원은 경영이 어렵게 되고 문을 닫게 되었다. 설문대할망과 일심 단결이 된 백운철은 모든 전시물을 무상 기부하는 조건으로 돌문화공원의 광활한 공간으로 옮기고 그때부터는 할망의 자태가 드러나 돌문화공원을 가득 채우는 것을 목표로 돌문화공원을 디자인 하는 것으로 진로를 바꿨다.  일은 일사불란하게 진행 되었다.

70년대 후반부터 전국에 불어 닥친 새마을 운동으로 말미암아 제주도는 쓰나미가 덮친 듯, 관광 난개발로 인해 서양문화가 삽시간에 휘몰아친다. 그 와중에 백운철은 새벽마다 짚차를 몰고 제주전역을 돌아다니며 수십 곳의 민속품 상회를 통해 육지로 마구 팔려 나가는 제주의 소중한 자연석, 돌 민속품, 항아리, 민구류 등을 보존하기 위하여 10여 년 동안 닥치는 대로 외상거래를 하며 사들이기 시작한다. 그러는 중에 김영삼 정부의 여행 자율화 정책으로 인해 해외여행 붐이 일어났다. 더불어 제주 여행사들은 사설 관광지에 대해 지나친 수수료 횡포를 부렸고 목석원은 문화재 관람료에 대한 수수료를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단체 관광객들이 줄게 되었다. 그 때 또 갑자기 불어닥친 IMF로 말미암아 제주를 찾는 관광객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엄청난 수집비용과 인건비등을 목석원 관람료 수입으로는 도저히 감당키 어려워 결국 문을 닫게 되지만, 2만 여 점의 소중한 민속 자산들을 제주도(당시 북제주군)에 무상기증 하기로 하고, 제주의 정체성, 향토성, 예술성을 살린 100만평의 제주돌문화공원을 조성하여 후손들에게 물려 주자는 순수한 목적에 따라 민관 협약을 맺었다. 관에서는 필요한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민에서는 기획, 디자인, 설치 감독권을 갖고 20년 동안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백운철은 단 한점도 팔지않고, 2만여점의 우리의 소중한 민속자산들을  감독권을 갖고 20여 년동안 현장 가수장고(가설 창고)에서 기거하면서 허허 벌판의 목장부지와 생활 쓰레기 매립장을 지금 우리가 보는 세계적 수준의 유일무이의 돌문화공원으로 조성해 놓았다.

제주돌문화공원 홈페이지를 보면, 돌문화공원의 기획 의도는 첫째도 환경, 둘째도 환경, 셋째도 환경이다. 이것이 바로 백운철의 기획 의도였다. 제주의 정체성, 향토성, 예술성을 살려서 탐라의 형성과정, 탐라의 신화와 역사와 민속문화를 시대별로 총 정리하여 가장 아름다운 교육의 공간을 조성하여 후대에 물려주는 것, 이것이 돌문화공원의 기획자 백운철의 평생의 신념이다.

“제주돌문화공원은 공원 전체가 설문대할망을 핵심주제로 삼아 펼쳐지고 있다. 한라산과 360여개의 오름돌을 만든 설문대할망은 최고의 돌의 거장(巨匠)이다. 설문대할망은 곧 제주돌의 화신(化身)이고, 제주돌 하나하나는 곧 설문대할망의 분신이다. 설문대할망은 당신이 만든 성산일출봉을 돌 빨래구덕 삼고 우도를 돌 빨래판 삼아 빨래를 하다가 당신이 만든 백록담을 돌베개 삼아 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다.” [제주돌문화공원 홈페이지 참조]

설문대할망은 스스로 빠져 들어간 돌 가마솥에서 사랑의 죽(粥)이 되고, 그것을 먹은 아들들은 오백장군 바위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런 배경 이야기를 들어본 관람자는 오백장군 바위의 결마다 살아서 숨 쉬는 설문대할망의 모성애의 진동을 느낄 수 있다. 돌문화공원은 그 전체의 구성이 설문대할망 이미지의 거대한 바탕 위에 세워졌다. 미완성 상태에 있는 설문대할망전시관은 돌문화공원의 핵심시설이다.

설문대할망전시관 기본계획 조감도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설문대할망전시관 기본계획 조감도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설문대할망 이야기가 큰 빛을 보는 것은 이 시대에 어떤 인류사적 의미를 갖을까?

인류학자 전경수 교수에 의하면 세상에서 창세신화를 갖고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설문대할망은 “창세와 모신 신앙의 내용을 겸비한 신화중의 신화“라고 칭송 받을 가치가 있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설문대할망이야기는 빛을 보지 못했다. 설문대할망 이야기가 빛을 못 보게 방해해 온 요소가 있다. 바로 ‘여성영웅의 출현을 부각시키지 않으려는 역사인식의 반영'이었다. 그것은 우리 역사의 유교화 현상에서 유래했고, 한반도가 부계–부권 사회가 되면서 생긴 여성문화 말살의 실례이다.

”인간사회의 시작이 사실상 모계사회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확인한다면, 설문대할망이야기는 모계사회를 조명하는 이야기“이다.(전경수, 2010) 유교식부계문화 때문에 설문대할망은 오래동안 조명을 받지 못하고 변두리에 내쳐 있었는데, 이제 돌아보면 이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육지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탐라가 다른 지역같이 철저히 유교화가 되지 않을 수 있었고, 따라서 해녀를 중심으로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서도 순수한 모성의 위대함에 대한 인식이 실생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도민들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모계사회의 특성은 종족번식, 희생, 조화, 협조 등 인류사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요소들이다.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의 관계는 철저하게 서로에 대한 사랑, 배려, 존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 여신 문명의 실증적 자료를 발굴하고 그 의미를 세상에 알린 고고학자, 마리야 김부타스Marija Gimbutas (1921~1994)는 도서 ‘여신의 언어’에서 인류 역사는 원래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변천해 왔다고 밝히고 있다. 인류사적으로 사유재산 개념이 생기고 착취와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가부장제가 힘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김부타스는 남성 중심 문명은 인류의 기나긴 시간 속에서 일시적인 것이며 거기서 파생된 전쟁과 지배의 문화는 병리적 현상이라고 결론지었다. 유럽의 인류는 더 오랜 기간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고, 이는 여신 전통의 흔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설문대할망 탑 앞에서. 아홉 제관들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설문대할망 탑 앞에서. 아홉 제관들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설문대할망이 여성이며 창세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부계사회에서는 설문대할망신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말은 돌문화공원의 역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돌문화공원은 이 시대가 바닥을 치고 있는 파괴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남성중심 권력체재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처를 제공하고, 설문대할망은 인류가 방향타를 돌리는 데 필요한 키를 제공한다.

돌문화공원, 오백장군상들 앞쪽에 관람객들이 쌓아놓은 돌탑들, 조화를 이루고 있다.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돌문화공원, 오백장군상들 앞쪽에 관람객들이 쌓아놓은 돌탑들, 조화를 이루고 있다. (출처: 돌문화공원 사업단)

백운철은 제주가 난개발 되기 이전에는 너무도 아름다웠던 탐라의 모계제 배경 속에서 태어나서 설문대할망의 화신과 같은 어머니의 지극 정성이 깃들인 양육과 지지를 받고 자라서 그 자신이 설문대할망의 화신이 된 사람이다. 그의 지성-감성-영성의 조화는 현대인이 다다를 수 없는 극치를 이루고 있으며, 가히 동서남북 남성의 롤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멋진 남자다. 그의 업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생명모성과 예술이 만나서 창조의 최고조를 이룸”이라 하겠다. 한반도 남쪽에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화산섬의 독특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한 남성이, 정복과 억압의 역사를 훌쩍 넘어서서,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우주적 비전을 따라가며, 이 땅에 새로운 문명을 일으키고자 자신을 던지며 기념비적인 신화공원을 이루어가는 절묘한 모습이다.

백운철은 세상 사람들에게 돌문화공원에 돌구경 오라고 하는 대신에 관람자들이 설문대할망신화세계 속에 들어와서 스스로 육안으로 보고 영혼의 흐느낌을 체험하며 함께 설문대할망을 표현하라고 초대하고 있다.

설문대할망제가 매년 5월15일, 설문대할망 탑 앞에서 모셔지고 있다.
설문대할망제가 매년 5월15일, 설문대할망 탑 앞에서 모셔지고 있다.

 

*이 글은 '제주의 소리' 김반아의 기고문 2022.8.31.  "세계가 제주돌문화공원을 주목하는 이유" 를 확장한 글입니다. 

* 김반아 : 교육철학 박사(하버드 대학), 생명모성 연구소 소장, 인류 정신문화 운동가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김반아 주주  vanak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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