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삶을 위해

떠오른 생각들로 순서도 정오(正誤)도 없다. 오호(惡好)와 시비(是非)를 논할 수는 있지만 대상은 아니다. 중복도 있으므로 고려하시면 좋겠다. 여러 차에 걸쳐 싣는다.

초목과 하늘이 좋다.
초목과 하늘이 좋다.

<자유로운 삶을 위해>

모든 사람은 나름의 자유로운 삶을 원한다. 자유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자유가 무엇인지를 모르기에 자유가 주어줘도 누리지 못한다.’고 험한 말을 하는 자도 있지만, 자신도 자유의미를 알고 하는 말인지 의심스럽다. 일설에 의하면 ‘자율 할 수 있는 자’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자유의미를 모른다 해도 자유는 삶의 최고 가치요 본질이다. 자유가 있어야 자연스럽게 살리라.

나무기둥에 묶여 있는 개와 황소를 들판에 풀어 놔 보면 안다. 그들이 얼마나 자유를 갈구해 왔으며,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만끽하는지 볼 수 있다. 그들이 자유를 알아서 그럴까? 자유는 본능이다. 하물며 인간이야 말해 무엇 하랴.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는 본인의사에 반한 구속으로 길들여져, 자유를 모르거나 잃어버린 듯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천부의 권리인 자유를 어찌 잊어버리겠는가? 또한 누가 자유를 거부하겠는가? 다만 현실 삶에 필요한 자본에 구속되어 그럴 뿐이다. 보이지 않는 손도 있지만.

이런 의미에서 우리 생활주변의 소재를 들어 자유로운 삶에 대한 소견을 기술해 봤다. 이 단견으로 자유를 논한다 함은 어불성설이지만 실용으로 참고하면 좋겠다. 나머지와 부족한 부분은 동일 선상에서 확장 유추하시길 바란다. 더 구체적인 것은 전문가의 견해를 찾아보면 될 것이다.

 

261.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삶은 만물과의 만남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특히 사람과 그렇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자연스럽게 만나고 자연스럽게 헤어져야 한다. 만날 형편이면 만나고 만날 형편이 못되면 안 만나면 된다. 꼭 만나야할 사람과 꼭 가져야할 물건이 있고, 꼭 만나지 말아야할 사람과 꼭 갖지 말아야할 물건이 있지 않다. 무엇이건 억지로 맺으면 오히려 곤란을 초래할 수 있다. 만남에도 여유가 있어야 한다. 몸과 맘의 여유, 시간과 장소의 여유가 그것이다. 섣부르게 만나면 서로를 해친다. 가장 중한 만남은 부모와 배우자다. 부모는 선택할 수 없지만 배우자는 가능하다. 하지만 이 두 만남은 너무 확연하므로 여기서 논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삶은 만물만인으로부터 일정거리를 두어야 한다. 너무 가까워도 멀어도 잘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알기도 어려워 관계유지가 어렵다. 삶은 자신이 사는 것이지 타인타물들이 사는 게 아니기에 만남에 신중해야 한다. 물질은 겉과 속이 다르지만 숨김과 가식이 없어 단순하고 순박하다. 그러기에 어느 정도 대응대체가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겉과 속이 다르기는 하지만 숨김과 꾸밈이 심하다. 더욱이 음흉하여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를 보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게 아니고, 안다고 아는 게 아니다. 실체를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그러니 대웅대체가 어렵다. 그런 것을 감안하면 사람과의 만남에서 그에 대한 기대, 만족, 실망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타인에게 비치는 자신도 그러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나는 사람을 보면 그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어폐가 있다.(서구속담도 있다. ‘A Man is Known by the Company He Keeps’) 진정한 현자와 인자라면 누구를 만나든 무슨 상관인가? 훌륭한 사람을 만나면 훌륭함을 배울 것이요, 훌륭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반면교사로 삼을 것이기에 하등의 문제가 없다. 나쁜 사람을 만나면 오히려 그를 바른 길로 안내할 수 있기에 더욱 좋지 않는가? 좋은 사람만을 만나 양지에서 태평하게 산다면 현자가 왜 필요하겠는가? ‘자신은 남들에게 좋은 사람인가?’도 감안해야 한다.

세인들이 말하길 친구는 많을수록 좋고, 사람은 많이 만날수록 좋다고 한다. 선친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위의 형님들을 보시고 ‘저 놈들은 친구 만나다가 인생 다 허비하고, 계모임하다 살림 거덜 낼 것이다.’ 사실 결과가 그랬다. 친구도 친구 나름이고 만남도 만남 나름이다. 중요한 핵심은 본인이다. 본인의 중심이 확고하면 누구를 만나도 약이 되겠지만, 본인의 중심이 어정쩡하면 누구를 만나도 독이 된다.

세상 살다 보면 다툼과 배신으로 사람들에게 질릴 때가 있다. 이럴 경우 자연이나 애완동물로 위로위안을 받고 산다. 삶의 한 길일 수 있지만, 이는 넘어야할 산이다. 그렇다고 사람을 등지고 살 수는 없지 않는가?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고 수용하지 못하고서 사람다운 인생을 산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 자기기준의 욕망이 부르지 않았을까? 주의할 것은 만연된 학연, 지연, 혈연의 만남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거다. 끼리끼리 유유상종의 차별과 배제를 없애야 한다. 이는 바른 사회조성에 걸림돌이다. 하기야 권익에 눈먼 이들에게 공정과 정의, 양심과 이성은 없다.

만남은 중하고 중하다. 만남이 인생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만나는 상대가 누구든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되, 그에게 속박되지 말아야 한다. 그의 언행을 참고하고 교훈으로 삼되, 그를 모방하여 그와 같은 길을 가려말자. 꾸준히 자기다운 모습을 만들고 가꿔서 자기답게 살자. 삶은 자기가 산다.

 

262. 먹는 것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동식물을 불문하고 음식은 원초적 욕구다. 음식을 거부하면 죽는다. 생명 탄생과 지속 삶의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줄일 수는 있겠지만 없앨 수는 없다. 옛 어른들 말씀이 ‘먹는 것으로 재산 조지고, 먹는 것으로 집구석 망한다. 집안 망조는 먹는 것과 노름이다.’라고 하셨다. 또 ‘먹는 것으로 구분 말고 밥상에서 차별 마라. 제일 서럽다.’고도 하셨다. ‘먹는 것은 서민상놈을 따르고 언행은 양반귀족을 따르라.’고도 했다.

입에 맞는 음식만 찾다보면 우선 입맛을 버리고, 결국 몸도 정신도 망가진다. 보이는 몸 관리도 못한 자가 보이지 않는 맘과 정신관리를 어떻게 하겠는가? 음식섭취는 생명유지를 위함이지 놀이나 취미활동이 아니다. 먹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지 않는가? 음식으로 장난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생명을 갖고 노는 것이요, 살인이 될 수도 있다. 요즘 매체들은 음식으로 놀이삼고 장난친다. 다 상술이지만 먹는 것에 홀릭(holic)되게 하여 삶의 황폐화를 조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맛 기행은 본질을 벗어난다. 생명의 에너지원인 먹이를 그래야 쓰겠는가? 먹이 앞에서는 감사하고 경건해야 한다. 식사 전에 기도는 그런 뜻이리라. 살기 위해 먹는 음식이 오히려 몸을 해치고 환경을 오염시켜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잘 산다는 게 무엇인가? 풍족하게 사는 것인가? 고급주택에서 진수성찬에 고가명품으로 단장하는 삶인가? 몸과 맘에 맞게 사는 게 잘 사는 거다. 몸과 맘은 자연을 따름이 좋다. 억지와 강요함이 없이 배부르면 그만 먹고, 편하게 입고 편하게 잠자면 된다. 산처럼 정중하게 물처럼 유유히 사는 거다. 속된 말로 폼생폼사하지 말아야 한다. 고급고가음식과 보기 좋은 음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삶이 가볍고 자유로워진다. 혀가 달콤하면 내장과 정신은 썩는다. 풀과 물만 먹는 초식동물은 만물에게 온몸으로 유익함을 준다. 반면 신선하고 맛난 음식을 골라 먹는 인간은 어떤가? 그에 걸 맞는 언행이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유익은 새로 간에 오히려 나쁜 언행만 배출하여 자연환경을 해치고 타 생명도 위협한다.

먹는 것에 삶의 의미를 두지 말자.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고 연장하기 위함이다.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먹는 것에 두면 되겠는가? 일부분은 그럴 수 있으나 전적으로 그런다면 인생이 허망치 않겠는가? 최고최상의 인생은 선한 삶이라 했다. 고가의 부드럽고 달콤한 음식만을 찾는 행위는 결코 선하지 않다. 선한 삶이란 가난한 삶이다. 가난하지 않고 선과 도덕을 논하거나 공정과 정의를 말함은 위선이리라. 가난은 검약과 겸손, 정직과 청빈이다. 한 사람이 먹은 일생동안의 음식을 쌓으면 태산보다 높으리라. 참고 할만하다.

 

263. 성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성은 원초욕구이자 생명본원이다. 태동과 태생의 시발이다. 경건하고 자연스럽게 행해야 한다. 음식에 버금가지만 더 엄숙하고 성스러워야 한다. 음식을 끊으면 죽지만 성욕은 끊어도 죽지 않는다.

남녀의 조화는 음양, 즉 성의 조화다. 서로의 성을 존중하고 무엇보다 귀하게 여겨야 한다. 성은 본성의 근원이다. 성이 오도되거나 퇴폐하면 본성이 퇴락하므로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조화로운 근간이 무너진다. 물질세계가 범람할수록 성이 상품화되고 성을 충족하기 위한 놀이가 난무한다. 역사를 통해 보더라도 외형외부가 웅장하고 풍성할수록 마음과 정신은 빈약해지고 성은 문란해졌다. 이는 가난하고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보다 부유하고 높은 계층에서 심했다. 한 번 망가진 성의 폐해는 되돌리기 어렵다. 가정과 공동체가 무너지고 국가도 쇄락의 길로 들어선다.

사실 성은 가르치지 않아도 본연의 것이기에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지나치면 아름답고 사랑스런 성이 아니라 추하고 음습해진다. 성에 기술기능이 더해지면 몸을 갖고 노는 성도착에 빠지기 쉽다. 결국 심신을 망가뜨린다. 현대는 성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고 노출시킨다. 심지어 권장까지 한다. 성은 상품이 아니라 거룩한 생명탄생의 전조다. 성에 대한 그릇된 관념과 지식이 허망하고 실패한 인생을 만든다. 성은 절제대상이지 개방하고 권장할 대상이 아니다. 극히 유의하고 삼가야 한다.

은근한 남녀의 사랑은 온전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지만, 불꽃사랑은 한순간 달콤할지 모르지만 결국 타서 재가 되거나, 때로는 폭탄지뢰가 되고 심신상처로 남아 평생장애가 된다. 사랑이라는 미명아래 이뤄지는 섣부른 성은 자칫 인생의 재앙이 될 수 있다.

 

264. 잠자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나그네요 방랑자이며 노숙자다. 원래 인류의 삶이 그랬다. 특히 남자는 더 그렇다. 오늘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잠잘지 정해지지 않았다. 삶의 환경과 상황에 따라야 했다. 땅을 침상삼고 하늘을 이불삼아 자기도 했다. 언 땅을 조금 판 후 나뭇가지로 가리고 낙엽을 긁어모아 덮고 자기도 했다. 풍찬노숙(風餐露宿)도 마다하지 않아야 자유인이 될 수 있음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찬밥과 더운밥, 냉방과 온방, 비단금침과 홑이불, 누비옷과 무명옷을 가릴 수 있는가? 비바람막이 하나 없는 길가에서 찬밥 덩어리와 찬물로 배를 채우고 이슬을 맞아가면서도 꿀잠을 잘 수 있어야 한다. 그나마도 감사하면서. 사막에서도 황야에서도 산꼭대기에서도 한밤을 잘 보내고, 아침에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다면 자유인의 자질이 있다.

한참 젊고 기상이 충천할 때 어느 인사가 내게 말했다. ‘그대는 사하라사막 한가운데 홀로 두어도, 히말라야 중턱에 버려놔도 홀연히 살아 올 거다.’ 당시엔 칭찬인지 힐난인지 아리송해 쓴웃음을 지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청소년시절 환경요인으로 인해 잦은 학력중단 등 비선형(非線型) 극기생활이 그렇게 만들고 성장시키지 않았나 생각한다. 현 시점에서는 다소 시대에 뒤진 소린지 모르겠다. 하지만 몸과 마음과 정신이 일체가 되었을 때,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만사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리라. 아무튼 잠자리에 구애 받지 않아야 자유로운 삶을 구가할 수 있다. 잠자리는 몸도 편해야 하지만, 마음이 안정되고 정신이 맑아야 숙면할 수 있다. 마음과 정신이 바르면 다소 가혹한 환경이라도 몸은 견디고 따라준다.

 

265. 입는 것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옷은 외부위험으로부터 신체의 보호가 우선이고 멋은 다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옷을 선택해야 한다. 옷이 날개란 말도 있다. 일정 의미에서는 옳다. 그럴 필요도 있다. 하지만 일시적이고 과시욕의 충족일 뿐이다. 옷이 상대에 대한 예의 표시라고도 하지만 깔끔하고 단정하면 된다. 과한 사치는 오히려 예에 벗어나고 혐오감까지 줄 수 있다. 옷으로 자신의 품격을 높이려 하지만 꾸밈과 가식임이 드러나면 오히려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옷은 깨끗하고 단정함이 좋다. 소박한 옷을 입은 사람은 단아하고 인격이 고결해 보인다. 옷이 멋있다고 내성도 멋지지는 않겠지만, 고가명품 아닌 평범한 옷일 경우는 대개 일치한다. 허름한 옷을 입었다고 그가 허름하지 않고, 금빛은빛 휘장으로 단장했다고 고상하지 않다. 값비싼 옷으로 품격이 높아지지 않는다. 옷, 집, 음식, 장식품이 그를 돋보이게 할 수 있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분수에 맞는 옷단장에서 그의 인격과 품격을 볼 수 있다.

옷에서도 자유로워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인품이 높은 사람은 값싼 옷을 입어도 고결해 보이고, 인품이 낮은 사람은 값비싼 옷을 입어도 초라해 보인다. 옷과 액세서리에 따라 사람이 돋보이는 게 아니라 사람의 인품에 따라 옷이 돋보인다. 사람은 본질이지 부대 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외형으로 자신을 돋보이려는 사람이 많다. 인품부족을 외형단장으로 보완하려는 의도다. 그러나 그게 어찌 감춰지겠는가? 옷이나 외형단장보다 그의 얼굴과 풍채에서 세월이 수놓은 그의 삶과 인품을 볼 수 있다. 의복으로 자신의 본체를 감추지 말자. 몸은 의복에서 자유롭기를 원한다.

 

편집 : 김태평 객원 편집위원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tpk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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