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28일 사단법인 경주정씨양경공파종약원(이사장, 정무준)에서는 연수차 1박 2일 일정으로 동해안 문화유적지를 탐방했다.

첫날엔, 동해 천곡 동굴, 삼척 이사부 공원, 추암조각공원을 이튿날엔 강릉 통일공원, 오죽헌, 선교장을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경포대를 찾았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다른 어느 곳보다 가장 관심을 둔 곳은 경포대였다. 그건 지난해 세홀회(三鰥會; 세 홀아비모임)에서 역사탐방으로 관동팔경을 찾았을 때 그곳을 코스에서 뺏기 때문이다.

경포대 옛 모습
경포대 옛 모습

경포대는 평해 월송정(越松亭), 울진 망양정(望洋亭), 양양 낙산사(落山寺), 삼척 죽서루(竹西樓), 고성 삼일포(三日浦), 청간정(淸澗亭), 그리고 통천 총석정(叢石亭)과 함께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헌데, 그때 그 중 총석정은 북한 땅에 있어서 볼 수 없었고, 경포대는 많이 찾은 곳이라 해서 코스에서 제외했다. 허나 내가 경포대를 찾은 것이 70년대이니 50년이 훨씬 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다섯 번이나 바뀌었으니 얼마나 변했을까!? 몹시 궁금했다.

경포대는 고려 충숙왕 13년 당시 강원도 안련사 박승이 현 방해정 뒷산에서 인월사 옛터에 세운 것을 그 뒤 지금의 현 위치로 옮겼다 한다.

오죽헌, 선교장을 둘러보고 경포대로 온 우리 일행은 차에서 내려 매표소를 지나 왼쪽으로 산을 끼고 능선을 따라 얼마쯤 올라가 다시 왼쪽으로 돌았다. 그때 정상에서 경포대가 우뚝 서서 "어서 와라!" 하는 듯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린 서둘러 올라갔다.

그때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이 해서체의 '鏡浦臺'현판이었다. 이 글씨는 조선 후기 문인이며 서예가인 유한지(兪漢芝, 1760~?)의 글씨라 한다.

경포대는 창건 이래 여러 차례 중수와 중건을 거쳤으며,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897년 부임하여 1899년까지 강릉 군수를 역임한 정현시에 의해서라 하며 이때 남쪽과 북쪽에 누마루를 설치하고 각각 득월헌(得月軒), 후선함(候仙檻)이라 하였다고 한다.(이상 강릉시 <경포대> 안내 팸플릿 참조)

경포대는 전면 5칸, 측면 5칸 규모의 단층 겹처마 팔각지붕으로 익공양식에 2고주 7량 가구이며, 연등 천정으로 구성되어있다.

예전엔 누각으로 올라가지 못했으나 지금은 관광객을 위해 올라가는 걸 허용했다. 신을 벗고 누대로 오르니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第一江山'현판이다. 이 글씨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1546 또는 1548 - 1624 또는 1626)이 썼다고 전하나, 뒤 '江山' 두 글자는 후대에 다시 써넣었다고 한다.

다시 누대 안 벽을 둘러보니 돌아가며 여기저기 크고 작은 현판이 걸려 있다.

헌데, 나이 탓으로 그 글씨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第一江山' 앞에 걸린 '肅宗大王 御製詩'만이 또렷하게 보인다.

고개를 치켜들고 눈을 비벼가며 간신히 겨우 그 시를 읽어냈다.

그럼, 여기서 다시 숙종대왕의 어제시 '鏡浦臺'를 읊어 보자!

汀蘭岸芷繞西東
十里煙霞映水中
朝曀夕陰千萬像
臨風把酒興無窮

냇가엔 난초 언덕엔 지초 동과 서로 가지런히 감아 돌고,
십 리 호수 물안개 물속에 비치네.
아침햇살 저녁노을 천만 가지 형상인데,
바람맞으며 술잔 드니 흥이 끝이 없구나!

이 시는 경포대 올라 호수를 바라보며 취흥에 읊은 시다.

난 이 시를 읽으며 문득 중국 북송 때 정치가인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岳陽樓記>(악양루기)를 떠올렸다.

그는 <악양루기>에서 "沙鷗翔集, 錦鱗游泳, 岸芷汀蘭, 郁郁靑靑..."이라 했다.

모래 위에 갈매기들은 날아와 모여들고, 반짝이는 물고기들은 헤엄치며, 언덕 위의 지초와 물가의 난초가 향기롭고 푸르다는 뜻이다.

헌데, 숙종은 여기 '岸芷汀蘭'을 '汀蘭岸芷'라 했고, 또 '朝暉夕陰'(아침 햇살과 저녁 그늘)을 '朝曀夕陰'(여기 '曀'의 음은 '예'이고, 뜻은 '음산하다'는 말로 '朝曀夕陰'이라 하면 좀 어색하다)이라 했다.

이로써 숙종의 이 시는 악양루에 올라 동정호(洞庭湖)를 바라보며 지은 범중양의 <악양루기>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옆을 보니 율곡 선생이 12살에 지었다는 '경포대부'(鏡浦臺賦), 그리고 당시 유명한 문장가로 알려진 강릉 부사 조하망(曹夏望)의 상량문(1745, 영조 21) 등 여러 명사의 글이 걸려 있었다.

다시 눈길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니 주위엔 오래된 소나무 숲과 벚나무가 어우러져 있고, 앞엔 경포호가 마치 거울처럼 가을 햇살을 반사하고 있으며, 경포호를 동해로부터 분리하고 있는 해안사주는 경포해수욕장을 이루고 있다. 숙종이 "냇가와 언덕을 따라 동서로 난초와 지초가 가지런히 둘러있다"(汀蘭岸芷繞西東)라 한 것은 바로 이런 경광을 읊은 것이다.

나는 혼자 율곡의 '경포대부' 중의 한 구절인 "天悠悠而益遠, 月皎皎而增輝"(하늘은 아득하여 더욱 멀고, 달은 밝고 밝아 빛을 더하다)를 웅얼대며 누각을 내려왔다.

녹두일출(綠荳日出) : 한송정 터에서 보는 해맞이
증봉낙조(甑峯落照) : 시루봉 일몰의 낙조 풍경
죽도명월(竹島明月) : 죽도에서의 달맞이 광경
강문어화(江門漁火) : 바다와 호수에 비친 고깃배의 불빛
초당취연(草堂炊煙) : 초당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홍장야우(紅粧夜雨) : 홍장암에 내리는 밤비
환선취적(喚仙吹笛) : 환선정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
한송모종(寒松暮鐘) : 한송정에서 치는 저녁 종소리

경포대 팔경이다. 언제 시간을 내어 다시 와서 찬찬히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차에 올랐다. 저녁 7시, 어느덧 차가 출발지 용산역에 도착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岳陽樓記>를 쓴 범중엄과 <鏡浦臺>를 읊은 박수량(朴守良, 1491-1554)을 생각했다.

범중엄은 북송 때 정치가이자 학자로 인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간관이 되었으나 곽 황후의 폐립문제를 놓고 찬성파인 재상과 대립해 지방으로 쫓겨난 사람이다.

<악양루기>는 바로 그가 지방인 파릉(巴陵)으로 쫓겨 가 있을 때 지은 것이다. 그는 <악양루기>에서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라 했다.

세상 사람들의 근심을 누구보다도 먼저 근심하고, 세상 사람들의 즐거움을 누구보다 맨 나중에 즐기겠다는 뜻이다.

先憂後樂! 먼저 민생을 챙긴다는 것, 이것이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덕목이다. 오늘의 우리 정치 현실을 보면서 자꾸만 이 구절이 머리에 맴돈다.

또 박수량은 전남 장수 사람으로 조선 전기 가선대부, 호조참판, 한성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30여 년의 관리 생활을 하면서도 집 한 칸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결백한 청백리이다.

그의 묘소가 장수에 있으며 묘소 앞에는 백비(白碑)가 세워져 있다.

그는 그의 시 <鏡浦臺>에서 이렇게 읊었다.

鏡面磨平水府深
只鑑形影未鑑心
若敎肝膽俱明照
臺上應知客罕臨

거울 같은 경포호수 맑고도 깊어,
형상은 비추어도 속마음이야,
호수가 마음까지 비춘다면,
경포대에 오를 사람 몇이나 될까?

그렇다! 만일 속마음까지 훤히 비춘다면 경포대에 오를 사람 과연 몇이나 될까?

先憂後樂! 肝膽明照!

2022. 10. 2

김포 여안당에서
한송 늙은이가 눈을 비벼가며 이 글을 쓰다

(글을 쓰는 도중 실수로 카톡방으로 전송됐음을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한송)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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