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1863 - 1949) 박사(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제공)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1863 - 1949) 박사(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제공)

10월 9일, 오늘은 576돌을 맞는 한글날이다. 아침부터 비가 주적주적 내린다.

"세라야, 우리 오늘 합정동 외국인 묘원 갈래?" 나는 조반을 먹으며 손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그는 어리둥절해하며 의아하다는 듯 "이렇게 비가 오는데, 거긴 왜요?"하며 묻는다.

손녀, 세라는 4살 때 부모를 따라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 갔다. 그곳에서 초.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UBC;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뒤, 그곳에서 학원 강사로 일하다가 지난 4월 한국 할아버지 집으로 와서 현재는 일산 000 어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고 있다.

국적이 캐나다인인 손녀는 모국인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남다른 관심이 있다. 오늘 내가 그를 데리고 합정동엘 가려는 것은 그에게 개화기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려주고자 함이다.

묘원 입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안내판
묘원 입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안내판

합정동 양화진 옛터엔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조성돼 있다. 거기엔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1863 - 1949) 박사의 묘소를 비롯해 고종황제 이후 대한민국의 종교계, 언론계, 교육계 등에 공헌한 외국인 인사 500여 명의 묘소가 있다.

나는 손녀에게 헐버트 박사에 관한 영상을 보여 주고 다시 물었다.

"어때? 가보겠니?" "네, 가봐야죠! 대단하신 분이시네요!"하며 손녀는 흔쾌히 응낙했다. 얼마나 고맙고 대견한가!

호머 헐버트 박사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에서 태어났다. 1884년 다트머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교에서 2년간 신학을 공부했다.

1886년 조선에 입국해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수업을 위해 개인교수를 고용해 한글을 배우면서 3년 만에 상당한 한글 실력을 갖추었고, 1889년 한글로 쓴 최초의 지리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저술해 교재로 사용하였다.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에 매료돼 미국언론과 영문 잡지에 기고를 통해 홍보했으며, <사민필지> 서문에는 당시 지배층이 한글 대신 어려운 한자 사용을 고수하는 관행을 지적하였다.

또한, 구전으로 내려오던 '아리랑'을 서양식 음계로 처음 채보해 알렸다.

1896년 서재필, 주시경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당시 주시경과 함께 국문연구소를 설립하고 한글을 연구하며 띄어쓰기를 도입하였다. 또한, 조선말의 국권회복운동과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의 특사로서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밀서를 미국의 대통령 및 국무장관에게 전달하고자 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1906년 다시 입국해 영문 월간 잡지 <한국평론 The Korea Review>을 창간하고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해 폭로하였다.

또한, 고종에게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도록 건의하였다. 헐버트는 한국대표단보다 먼저 헤이그에 도착해 <회의시보>에 우리 대표단의 호소문을 싣게 하는 등 한국의 국권회복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08년 미국에 정착한 후에도 한국에 관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고, 1919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3.1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1949년 국빈으로 초대받아 한국을 방문하였으나 일주일 뒤 병사하였다. 그의 유해는 고국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했던 그의 평소 유언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었다.

195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추서하였고, 2014년에는 한글학자이자 역사연구가로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사 The History of Korea>, <사민필지 士民必知>, <대한제국멸망사 The Passing of Korea> 등이 있다. (이상은 두산백과 두피디아에서 참조)

조반을 마친 뒤 며느리 야죽당(野竹堂), 손녀 세라 이렇게 셋이서 집 앞 버스 정류장(한신더휴테라스)에서 G6000 번을 타고 합정동으로 갔다. 운양동 하늘빛 마을에서 합정동 까지는 버스로 약 30분이 소요되는 거리다.

나는 서울에 갈 때면 자주 이 버스를 이용한다. 햇살이 맑은 날 2층 버스에 올라 앞자리에 앉아 앞을 내다보면 멀리 북악산이 다가오고 왼쪽으로 강물이 맑은 햇살에 너울너울 춤을 춘다. 나는 이때면 늘 밴쿠버 아들 집에 갔을 때 리버사이드에서 버스를 타고 다운타운 쿼퀴틀람을 갔을 때를 연상한다.

헌데, 오늘은 비가 와서 그 경관을 맛볼 수 없다. 하지만 빗속의 또 다른 정경을 맛볼 수 있어 좋았다. 어느덧 버스가 목적지 합정동 역에 도착했다.

외국인선교사묘원은 합정역 인근, 절두산 천주교 성지의 바로 옆에 있는 옛 양화진 나루터에 조성되어 있다. 지하철 2호선이 합정동 역에서 당산철교를 빠져나가는 오르막길 바로 옆에 바짝 붙어 있다.

비는 여전히 내린다. 우린 버스에서 내려 우산을 받쳐 쓰고 절두산 천주교 성지를 향해 얼마쯤 가다 왼쪽으로 돌아 언덕으로 올라, 다시 왼쪽으로 감리교회 건물을 지나 묘원으로 들어갔다.

바로 입구에 헐버트 박사의 묘소가 있다. "저기 '헐버트 박사의 묘'란 묘비명 보이지?" "아! 그러네요!" 며느리가 대답했다.

<정면에서 본 헐버트 박사의 묘비>위에 영문이 있고, 가운데 김대중 대통령의 휘호 '헐버트 박사의 묘' 좌우로 1949년 설립 당시의 묘비 글이 있다.
<정면에서 본 헐버트 박사의 묘비>위에 영문이 있고, 가운데 김대중 대통령의 휘호 '헐버트 박사의 묘' 좌우로 1949년 설립 당시의 묘비 글이 있다.

하지만, 그 옆 좌우의 글씨는 빗물에 얼룩져 잘 읽을 수 없다. 난 앞으로 바짝 다가가 더듬더듬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묘비 머리엔 영문으로 아래와 같이 쓰여 있다.

"HOMER B. HULBERT
JANUARY 1863 - AUGUST 1949
MAN OF VISION AND FRIEND OF KOREA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그리고 묘비 중앙 '헐버트 박사의 묘' 묘비명 오른쪽엔
"일천팔백육십삼년 일월 이십육일 미국에서 탄생
일천구백사십구년 팔월 오일 서울에서 별세
선각자요 한국의 친우인"이라 쓰여 있고,

오른쪽엔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단기 사천이백팔십이년 팔월 십일일 헐법박사 장의위원회"라 쓰여 있다.

빗속에 묘비 글을 읽는 필자
빗속에 묘비 글을 읽는 필자

이로써 이 비가 1949년 8월 11일 헐버트박사 장의위원회에서 세웠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 '헐법'은 '訖法'으로 '헐버트'의 한국 이름이다.

또 묘비 측면에는 "이 묘비는 본디 1949년 8월 11일의 영결식에 제막된 것으로서 이승만 대통령께서 묘비명을 쓰기로 예정되었으나 건국 초기의 어려움으로 새겨 넣지 못한 채 50년 동안 공백으로 남아 있던 자리에 그분의 50주기를 맞이하여 김대중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 묘비명을 새겨 넣다. 1999년 8월 5일 독립유공자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라 쓰여있다.

이로써 '헐버트 박사의 묘'란 묘비명이 그의 서거 50년 뒤 김대중 대통령이 쓴 휘호임을 알 수 있다.

다시 기념석으로 가보니 거기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빅토리아풍의 신사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 이곳에 잠들다"라고 쓰여있다.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다"는 대목에서 난 가슴이 뭉클하면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이러한 헌신적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정류장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생각하니 숙연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우리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잠시 고개 숙여 묵념했다.

그 옆에 대한매일신보 발행인 어니스트 베덜(배설, 裵說), 장로회 선교사이자 연세대학교 설립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배재학당의 설립자인 헨리 아펜젤러, 이화학당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턴,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의 설립자 더글러스 B. 에비슨, 대한제국 국가를 작곡한 음악가 프란츠 에게르트 등의 묘소도 있었으나 비에 바람까지 불어 다음에 다시 찾기로 하고 아쉽게 발걸음을 옆 절두산 천주교 성지로 옮겼다.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 박사!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서문에서 한글의 창제 이유를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쓰기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하였다.

헌데, 오늘날 생활 속의 언어나 어문교육(문법)을 보면 어느 땐 우리말인지 외국어(영어)인지 헷갈릴 때가 있고, 한글이 외국어보다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만의 생각일까?

만일 헐버트 박사가 지금 살아 계신다면 오늘의 현실을 보고 또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왜, 누구든지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우리말과 글이 있는데 어려운 '영어'를 쓰냐?"라고 하셨을까? 또 손녀는 오늘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절두산 아래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2022. 10. 15

응답 없는 카카오... '먹통'이 된 주말에
김포 여안당에서 한송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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