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黃喜) 정승과 의암(義庵) 주논개(朱論介)의 고장을 찾아서

지난 11월 12일과 13일,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자연휴양림을 긴급 수배하여 다녀온 곳 장수는 지역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금강과 섬진강의 긴물(長水)이 시작되는 뜬봉샘이 있는 곳이다. 뜬봉샘은 전북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산 109번지인데, 수분리(水分里)는 이곳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금강과 섬진강으로 나뉘어 흐르는 곳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전라북도는 동부 산악, 서부 평야의 지형을 가진 곳으로 동부의 무주군,장수군,진안군에 걸쳐있는 진안고원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아늑한 분지로 이루어져 요즘은 여가나 휴식을 위한 별장이 많이 들어서고 있는 곳이다.

이번 여정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남도 진주에서 순국한 주논개(1574-1593)의 사당과 생가지를 찾아보는 길이었다.

  주논개 생가 기념관에 있는 지도
  주논개 생가 기념관에 있는 지도

먼저 장수읍 두산리 산 3-1에 위치한 논개사당(의암사)을 찾았다. 올라가는 길은 가을이 깊어진 만큼이나 쓸쓸한 외로움이 고즈넉한 세월의 넓이만큼 다가선다.

의암사(義巖寺)는 장수현감 정주석이 주논개의 충절을 선양하고 장수 태생임을 기리기 위해 1846년 논개생장향수명비를 세운 후 1954년 호남절의록, 호남삼강록, 의암주논개사적비 등 사실에 근거하여 1955년 군민들의 성금으로 장수 남산에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1974년 현 위치로 옮겼다 한다.

의암사와 논개생가지 기념관에 있는 영정은 이모님을 닮으신 듯 아닌 듯 어쩌랴. 모습이야 어찌하든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것은 그 행위일진대...

 (영정사진에 투영된 인물은 본인입니다)
 (영정사진에 투영된 인물은 본인입니다)
주논개 생가지 기념관의 영정
주논개 생가지 기념관의 영정

의암사 입구에는 변영로 시인의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을 기리는 시비가 우리를 맞는다. 이어 숭앙문(崇仰門)을 우측으로 들어서면 왼편에 기념관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논개생장향수명비가 위치해 있다.

논개생장향수명비
논개생장향수명비

이 비는 현종12년(1846) 논개의 출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장수현에서 세운 비석으로, 일제강점기에 파괴될 위기가 있었으나 밭에 묻은 후 곡식을 심어 눈치 채지 못하게 하였다가 광복 후 파내어 비각을 건립하고 비를 세웠는데 1974년 의암사 이전시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비문에는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 라고 새겨져있는데 1800년대에는 ‘기(妓)’로 인식했다는 점이 한계인 듯하다.

의암사에서 내려다 보는 전경
의암사에서 내려다 보는 전경

가을색이 완연한 경내를 내려와서 논개 생가지로 향한다. 위키백과에 실려 있는 주논개는 조선 선조시대의 열녀이다. 조선 전라도 장수현 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 출생으로 1574년 선비 주달문(朱達文)과 부인 밀양 박씨 사이에서 반가(班家)의 딸로 태어났다고 한다.

아무렴 어떠랴. 지금도 그렇지만 450년 전 신분차별이 이슬람권 히잡만큼 엄격한 시대에 여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름도 모르는 별들과 같은 것이리라.

논개생가지는 장계면 대곡리 933번지 일대에 조성되어 있다. 주촌마을의 원래 생가는 1986년 대곡저수지 축조로 수몰되었으며, 저수지 근처에 생가만 복원해 두었다가 1996년부터 2000년에 걸쳐 현재의 위치에 새로 복원하여 자리하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생가지 오른편에 부모 묘가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논개 생가지
 주논개 생가지
 생가지 오른편에 조성되어 있는 부모 묘
 생가지 오른편에 조성되어 있는 부모 묘

 

    생가지 기념관에 기술되어 있는 논개 연보는 다음과 같다.

- 1574년(1세)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에서 탄생

- 1576년(3세) 부친 주달문의 사망으로 어머니와 둘만 남게 됨

- 1578년(5세) 숙부 주달무의 권유로 두 집 살림을 합침. 주달무가 어린 조카를 김풍헌의 민며느리로 보낸다는 비밀 계약을 체결하고 금품을 받음.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도망했다가 논개와 함께 체포되어 수감됨. 장수 현감 최경회의 심리로 재판이 열려 무죄선고를 받았으나 돌아갈 곳이 마땅하지 않아 관비를 자청한 어머니와 함께 장수현 관아에서 살게 됨.

- 1579년(6세) 어머니와 함께 최경회를 따라 무장현 관비(내아의 침방관비)로 따라감

- 1582년(9세) 최경회가 영암 군수로 전직되자 다시 영암군 관비로 따라감

- 1587년(14세) 최경회가 사도시정으로 갈 때 수행함

- 1590년(17세) 최경회의 부실이 되다. 최경회가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고향 화순으로 돌아갈 때, 논개는 고향 장수로 돌아와 기다리게 됨.

- 1592년(19세) 최경회가 전라우도 의병장으로 장수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훈련시킬 때, 다시 만나 의병 훈련을 뒷바라지함

- 1593년(20세)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서 제2차 진주성전투를 할 때, 성 안의 다른 여성들과 함께 전투에 참가함.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가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한 뒤,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의암으로 유인,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함.

    그림 연보에 추가되어 있는 내용

- 1574년 9월 3일 술시(오후 7-9시)에 태어났다 해서 술(戌)이 개띠에 해당함으로 이름을 ‘논개’로 지었다.

- 집에서 최경회의 아내인 나주 김씨의 가르침을 받아 올바른 부덕을 갖추며 성장하였다.

- 최경회(1532-1593)는 장수현 월강평야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 진주성이 함락되자 최경회는 자결을 하게 되고, 이 사실을 안 논개는 나라와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거사의 결심을 하게 된다.

- 진주성 싸움에 승리한 왜군들은 촉석루 연회를 벌이는데 이때 논개는 기녀로 변장하여 적장인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하여 남강에 투신 순국한다. 이로 인해 조선의 군·관·민의 사기를 진작시켜 호남지역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번 역사기행은 동부인하여 1박으로 다른 일정에 쫓겨서 주촌민속마을과 논개묘는 다녀오지 못했다. 또한 누이들이 살고 있는 진주의 촉석루와 의암, 의기사는 다음번 과제로 남겨두었다.

역사는 승리자의 관점으로 재편집된다. 진실이 어떻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430년 전 한 여인의 순국이다. 그것이 비록 계란으로 바위치기든,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아야 하는 역사적 과실에서 비롯된 헛된 죽음이든 간에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와 무관하지 않다.

지금 우리는 남북 분단, 동서 분열, 상하계층 분리가 심화되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 미국의 패권주의 세계에서 민족 분단, 지역 분열, 이념 대립의 현실에 KF94 마스크 속에서 헐떡이며 겨우 숨붙이고 있는 초라한 군상들이다. 나날이 대립 격화되어가는 정치현실은 참으로 암담하다.

이번 여행에서 다시 한 번 역사를 되새겨본다. 임진왜란은 왜 발생했던가.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장 

박종운 주주  tsm1234@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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