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초에 아빠가 아프시더니 1년이 안되어 돌아가셨다. 2022년에는 엄마가 아프시더니 반년이 안되어 돌아가셨다. 6개월 차를 두고 두 분이 돌아가시니 실감도 나지 않고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슬픈 것인지 뭔지도 모르겠다. 가끔 너무 갑작스럽게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엉엉 눈물이 나올 때도 있고, 엄청난 분노가 일어 주위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미워질 때도 있지만 잠을 자고 일어나면 다시 변함없는 일상이 시작된다.

두 분 생전 나는 부모님과 매일 통화를 했다. 아빠는 언제나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다람쥐 도토리 모으듯 준비했다가 내가 전화할 때마다 하나씩 풀며 들려주셨다. 특히 엄마와는 소소한 매일매일을 공유했다. 2019년 여름 내가 미국에 오고 나서는 매일 밤 엄마에게 전화해 내 일상을 나누고 조언을 구했다. 거의 대부분은 인간관계나 육아에 대한 조언이었다.

(故)권영숙, (故)안상선
(故)권영숙, (故)안상선

물론 내가 언제나 엄마와 친하고 조언을 구했던 것은 아니다. 사춘기 이후 나는 부모보다 친구가 중요했다. 집에 있기보다 친구들과 나가 놀며 사고 치던 딸이었다. 클럽에서 열심히 놀다가 집에서 전화 오면 바깥으로 나가 소곤소곤 조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도서관이니 나중에 전화 걸게요. 어찌 보면 영악한 문제아에 가까웠다. 여행을 좋아해 대학 졸업 후 취직도 안 하고 두 달간의 중국 여행 끝에 티베트 라사에 도착해 엄마에게 전화한 적도 있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이제 그만 돌아와”라고 말했다. 어느 누구 못지않게 속을 많이 썩인 딸이다.

이랬던 내가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한 건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였던 것 같다. 영진이를 낳은 첫날 모유가 나오지 않자 아이는 이틀을 내리 울었다. 목소리가 쉴 때까지 가느다란 목소리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울어댔다. 간호 선생님은 이 아이 크면 보통이 아닐 거라고 말했다. 그렇게 태어난 날부터 범상치 않던 아이는 다행히 비디오게임을 좋아하는 평범한 남자아이로 컸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부모가 나를 대한 행동들을 되돌아보고 여쭈어볼 수 있었다. 어찌 그렇게 화내지도 않고 나를 키울 수 있었는지. 부모님은 믿고 기다렸다고 했다. 영진이는 잘 할 아이이니 너 또한 영진이를 믿고 기다려주라고 해주셨다.

어느 날은 인간관계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엄마, 나랑 맞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을 만나면 너무 힘들어.  그냥 나랑 안 맞는 거 같아. 그만 만나고 싶어."

엄마는 친구분들과의 관계를 들려주며 사이가 안 좋다가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해가 되고 더 친해지기도 한다며 너무 극단적으로 관계를 끊지 말라고 하셨다. 사실 이러한 조언들을 듣고도 내 맘대로 행동하는 때가 더 많았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엄마의 조언을 떠올리며 그 방법이 더 현명했을 것 같기도 하고, 언젠가는 엄마의 조언대로도 해보고 싶기도 하다.

엄마와 태국 여행에서

또 하루는 삶의 지혜를 구하기도 했다. 약속을 잘 까먹고,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살기 어려운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엄마는 나에게 언제나 가족들이 잠든 어둑한 밤 시간 테이블에 앉아 천천히 가계부를 쓰며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다 보면 시간과 돈을 효율적으로 쓰고 모으는 지혜를 갖게 될 것이라 하셨다. 아직까지 잘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엄마가 언제나 테이블에서 고심하며 가계부를 쓰고 하루를 정리하던 모습은 나의 뇌리에 깊이 남겨져 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나는 이 슬픔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에 대한 조언을 부모님께 구하고 싶었다. 사실 조모, 외조모께서 94세, 96세에 돌아가셨기에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고 언제나 음식도 건강히 드신 나의 부모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나리라고 단 한순간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물어볼 방도 없이 나의 조모 조부가 돌아가셨을 때 당신들이 그 슬픔을 어떻게 달랬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분들의 모습에서는 엄청난 슬픔이나 좌절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기억 속 두 분은 어떠한 어려움과 슬픔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변함없이 살아내고 계셨다. 남은 자들의 모습은 저리 담대해야 하는 것인지. 

오빠와 나는 장례가 끝나고 집에 와 아무 말 없이 부모님의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빠는 엄마의 꼼꼼한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아 파일을 여러 개 사더니 서류 정리를 시작했다. 급기야 오빠는 엄마가 쓰던 가계부와 똑같이 생긴 가계부를 사 오더니 테이블에 앉아 모든 기록을 시작했다. 밤에는 편의점에 나가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사와 나눠먹으며 소파에 앉아 같이 드라마를 봤다. 주말에는 오빠가 부모님과 자주 갔다는 카페에 가 커피를 마셨다. 슬픔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고 같이 울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안심이 됐다.

그렇게 우리는 담대하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하루를 살아냈다. 이제 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오빠는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꽃이 피고 졌다. 그렇지만 꽃이 진 자리에는 열매가 맺혔고 그 열매 속 씨앗이 자라나 다시 꽃을 맺을 준비를 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모든 것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자연의 원리를 떠올리며 나는 나를 위로하고 다시 변함없이 지루한 하루를 시작한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장

안지애 객원편집위원  phoenicy@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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