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예정되지 않았고 예측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살만하고 땀을 흘릴 만하지 않을까? 고로 그날그날이 최고의 날이리라. 이런 세상에 살다보면 내일을 대비한다 해도 실수하기 마련이다. 사후대처에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남에게 조언을 구하고 도움도 청한다. 그러나 아무리 간절하게 부탁하고, 돈을 보따리로 싸들고 와서 청해도 훈수훈계는 삼감이 좋다고 한다. 거듭된 부탁으로 곤란할 경우엔 "나의 언행을 보고 난 후에 말씀하십시오. 그래도 늦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제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제가 남에게 무슨 조언이나 훈수훈계를 하겠습니까? 웃기는 일입니다. 소가 들으면 파안대소할 것입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훈수훈계를 위해서는 상황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고 같은 일을 해보지 않았는데 어찌 알겠는가? 섣불리 훈수훈계 하다가는 가볍게는 육두문자 욕을 먹을 것이요, 심할 경우엔 평생원수지간이 될 수도 있다.

 

어리석은 자일수록 지적질책과 훈수훈계를 쉽게 한다. 핵심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나서 말 폭탄을 쏟아낸다. 무료하던 차에 기회를 만난 자처럼 쉼 없이 지껄인다. 누구나 바른 언행의 기준은 잘 알고 있지만 현장에서 실천하기는 어렵다. 이런 자들은 결과에 대한 진단과 피드백은 거의 전문가 수준이다. 훈수훈계 대상 결과는 이미 다 나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면서 마치 만물박사나 성인성자인양, 신이 된 듯이 지적질책하면서 훈수훈계를 한다. 어처구니없다. 자기 말대로 하면 만사형통될 듯이 말이다. 문제 있는 곳에 해결방법도 있다지만 그것은 엄청난 고민과 고통을 거친 후이다. 나설 때와 나서지 말아야 할 때가 있느니 조심해야 한다.

 

바보멍청이도 남의 흠과 잘못은 쉽게 발견하고 지적한다. 그 분야의 현자처럼 명철하다. 지적과 훈수도 잘 한다. 지적과 훈수는 왜 바보멍청이도 잘 하는가? 그것은 대부분 나와 있는 결과에 대한 것이고, 혹간 미래에 대한 것도 있지만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으며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책임을 훈수훈계한 사람에게 묻겠는가? 그것은 또 다른 실패를 낳을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

 

길거리 얘기를 해보겠다.

바둑의 바자도 모르는 자가 기성인 9단이 바둑 두는 것을 보고 혀끝을 끌끌 차며 훈수한다. 골키퍼가 없는 골대에도 골을 넣지 못하는 자가 세계 최고의 골게터인 축구황제를 나무라며 훈수한다. 지적질책과 훈수훈계라는 게 이렇다. 범사의 경우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오죽하면 제 눈에 대들보는 못 보면서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본다고 했겠는가?

 

최고의 지적질책과 훈수훈계 자는 종교전문가와 법전문가다. 그들은 대부분 일정한 교육을 이수한 후 정해진 시험을 거쳐 그 직을 수행한다. 세상의 일을 직접 해보지 않았고, 땀을 흘려보지 않았으며 현장경험도 없으니 세인세태를 제대로 알 턱이 없다. 책이나 전해들은 이야기를 통해 간접 경험한다고 하지만 그게 어찌 직접 경험을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건방지고 한심한 지적질책과 훈수훈계를 거침없이 한다. 그럴 주재도 못되면서 말이다. 미흡하고 모자람에 대한 부끄러움도 없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으며,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신과 법의 대리자이기에, 신과 법이 그들에게 세상만사를 다 알려준다고 본다. 하지만 이들의 훈수훈계가 맞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도 그들은 괜찮다. 양심은 없고 신과 법만 있기 때문이다. 틀린 것까지도 신과 법이 다 방어해 준다고 믿는다.

 

참으로 종교전문가와 법전문가의 신과 법은 전지전능하고 무소불위하다.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으며, 보이는 것도 없고 안 보이는 것도 없다. 그런대도 믿고 따르는 자들이 많으니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안타깝고 속상한다. 내가 이상한 걸까? 추종자들은 그들에게서 조금의 이권을 챙길 수 있어서일까? 참 고약한 일이다. 이러함이 고대로부터 수천수만 년을 지속해 왔음에도 아직 그 짓이 계속되고 있으며, 따르는 자들도 많으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그러나 할 수 없지 않는가? 그리 살다 죽는 수밖에. 그때도 끝나지 않겠지만. 몸이 병들면 약이나 수술로 치료할 수 있으나, 정신이 병들면 본인이 깨우치고 빠져나오기 전엔 치료가 불가능하다. 개나 말은 때려서라도 고친다지만 사람은 때려도 그 때 뿐 소용이 없다.

 

훈수훈계와 대척점에 핑계변명이 있다. 남의 흠과 잘못을 잘 지적하고 질책하는 자, 남의 일에 간섭 잘 하는 자, 훈수훈계를 잘 하는 자들이 정작 자기 일에 대해서는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한다.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남에게 돌리기에 능숙하다. 너무 확실한 자기책임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하지만 잘한 것은 모두 자기가 기여했기 때문이라며 성과를 흡혈귀처럼 빨아먹는다. 작은 권익에도 양보와 포기란 없다. 남의 흥망성쇠와 생사까지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 안위와 권익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다. 그게 최우선이다. 남의 비판과 비난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예 무시하고 무감각하다. 후안무치하다. 이런 자들은 평화시국에는 간신배요 난국에는 매국노가 된다.

 

칭찬은 주로 과거나 현재의 사실에 기반을 두고 행해지지만 미래의 기대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전에 다소 아쉬웠던 것들을 칭찬형식을 빌어 미래에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라는 제시이고 은유와 암시다. 또한 과한 칭찬은 조롱의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칭찬도 잘 새겨들어야 한다. 그냥 좋다고 지나가면 나중에 낭패 볼 수 있다. 만사는 양면적이듯이 칭찬과 비난도 그렇다.

다만 공공의 직에  있는 자들에 대한 지적질책과 훈수훈계는 예외로 한다. 그들은 누구의 지적질책과 훈수훈계를 당연히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tpk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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