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1989년 전교조 탄압이 ‘국가가 자행한 폭력’임을 선언했다. 지난 2022년 12월 8일 진실·화해위원회는 보도 자료를 통해 1989년 교사들이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국가폭력>이 존재했고 노골적으로 자행됐음을 천명했다. 다시 말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 결성 과정에서 노태우 군사정권이 저지른 탄압이 “국가폭력에 따른 인권침해”임을 분명히 밝혔다.

전교조는 교사들이 ‘자주성’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공권력의 탄압을 뚫고 건설한 교사 노동조합이다. 1961년 「4‧19교원노조」가 창립 1년도 안 돼 박정희 군사쿠데타에 의해 탄압받고 해체된 지 28년 만에 다시 교사노동조합을 건설했다.

자주적 교사노동조합! 전교조 결성 과정에서 무려 1,527명 교사들이 공권력에 의해 강제 해직 당했다. 노동조합 탈퇴각서를 쓰지 않았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상상할 수 없는 온갖 탄압과 상처를 받았다. 한 마디로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는 교육대학살이다.

이제 교육대학살이 자행된 지 33년 만에 국가 공식 기관에 의해 피해를 회복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다. 이미 전교조 해직교사들은 노무현 정부 당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공식 인정받았다. 그러나 국가기관으로부터 받은 「민주화운동관련자 증서」 이외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명예회복에 따른 피해 회복이나 국가 배상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 2기 진실·화해위 결정문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고무적이고 일보 진전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피해 교사들에게 국가는 사과하고 피해자들의 피해 회복을 위해 국가기관은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지만 윤석열 정권 교육부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그저 일개 국가기관의 권고 사항일 뿐, 자신들은 여전히 전교조를 ‘적대세력’으로 생각하는 태도다.

애초 전교조 교사들은 윤석열 정권 교육부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정부가 공식 사과하도록, 그리고 국가 폭력에 대해 배보상 피해 회복이 현실화하도록 우리 전교조 교사들이 직접 하나씩 이뤄나갈 것이다.

그러함에도 이 글을 남기는 이유는 당시 국가폭력이 얼마나 잔인하게 자행됐는지, 그리고 당대 지배언론인 조중동 수구 언론들이 어떻게 진실을 비틀고 여론을 호도했는지 그 일부분이라도 밝히고자 함에 있다.

1989년 7월 14일 구로고 학생들 800명이  양달섭 선생님 지키기와 전교조 참교육운동을 지지하며 거리시위에 나서자 교감 선생님이 학생들 시위를 저지하는 장면(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아카이브)
1989년 7월 14일 구로고 학생들 800명이 양달섭 선생님 지키기와 전교조 참교육운동을 지지하며 거리시위에 나서자 교감 선생님이 학생들 시위를 저지하는 장면(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아카이브)

글쓴이가 재직했던 구로고등학교에서는 8명이 해직됐다. 그 과정에서 교사, 학생 모두 상처가 너무 컸다. 특히 학생들이 받은 상처는 더 깊고 컸다. 89년 7월 14일 전경들이 구로고 학생들을 방패와 곤봉으로 내리쳐 얼굴과 팔이 찢어지고 머리가 깨지면서 박종필 군(18세)을 비롯해 스무 명 넘는 학생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1989년 7월 14일 전교조 선생님 지키기와 참교육운동을 지지하며 구로고 학생들 800명이 거리로 진출하자 전경들이 곤봉으로 구타하는 장면(출처 : 한겨레자료, 전교조 학생사업국 학생인권침해 사례집)
1989년 7월 14일 전교조 선생님 지키기와 참교육운동을 지지하며 구로고 학생들 800명이 거리로 진출하자 전경들이 곤봉으로 구타하는 장면(출처 : 한겨레자료, 전교조 학생사업국 학생인권침해 사례집)

학생들 투쟁은 촌지거부를 비롯해 <참교육>을 부르짖다 파면된 양달섭 선생님을 지키기 위해 고3 학생 두 명이 서로 껴안고 투신하는 비극으로 치닫기도 했다. 당시 한국 사회 지배언론들은 그 사건을 잔인하게 비틀어 왜곡 보도하는 데 혈안이 됐다. 국면을 반전시킬 수 있는 호재이자 전교조를 공격하는 좋은 먹잇감으로 삼았다.

학생회장과 총무부장이 투신하는 참극이 빚어지자 『동아일보』는 전교조 교사가 학생 투신을 사주한 것처럼 단정해서 보도했다. 『중앙일보』 또한 89년 6월 28일자 2면 「분수대」에서 “세상 풍상 모르는 철부지나 다름없는” 어린 학생을 투신하도록 전교조 교사가 사주한 것으로 몰아갔다. 그러면서 “누가 선생인지 누가 철부지인지 헤아릴 길 없다”고 왜곡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알고 있었다. 전교조 교사들이 학교에서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리고 학생들을 어떻게 인격과 인격으로 만나고 얼마나 사랑했는지 마음으로 잘 알고 있었다. 89년 당시 누가 철부지 언론이고 누가 왜곡⬝거짓보도를 일삼던 기레기 신문인지 학생들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6월과 7월 서울 중고교 곳곳에서 학생들은 빼앗긴 선생님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다양한 형태로 표출하였다. 무지막지한 <국가폭력>에 맞서 학생들은 정의감에 기초해 결연히 항거하고 분노했다.

선생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학생들 집단 분노로 표출되면서, 그리고 학생들 반발 움직임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이를 차단하기 위해 교육당국은 꼼수를 부렸다. 조기방학이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노태우 공안당국과 교육당국은 불순하게도 조기방학을 강제하고 방학 기간 동안,  100명이 넘는 구로고 학생들을 향해 징계 위협을 하고 각서 제출을 강요했다. 일부 학생들은 구로경찰서로 소환돼 조사를 받았고 형사들은 학생들 동태를 감시하기도 했다.

<참교육>운동을 열망하며 전교조 교사들을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 학생부실로 끌려가 손을 뒤로하고 무릎 꿇린 채,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박게 했다. 그리고 구둣발로 짓밟았다. 그런 사실을 전해준 학생은 눈물을 흘리며 증언했는데 그 상처가 너무도 컸다.

학생주임을 비롯해 반(反)전교조 일부 교사들은 “학생회실을 폐쇄해버리겠다”, “내 손으로 학생회장과 부학생회장을 잘라버리겠다”, 또는 학생회 간부의 뺨을 때리거나 교실 문을 확 열어젖힌 채 학생들을 향해 “죽여버리겠다”고 폭언과 협박을 일삼았다. 학생들은 전교조에 적대감을 지닌 일부 교사들로부터 형언할 수 없는 모욕감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 상처 속에서도 구로고 학생들은 의연했다. 어느 구로고 학생이 절규한 목소리를 여기에 소개한다.

“ 저희는 선생님들이 하시는 전교조 결성이 저희에게 참다운 교육을 시키고자 하는 것을 알고 또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문교부의 만행을 알기에 전교조 선생님들을 지지하고 문교부를 각성시키기 위해서 가두시위를 한 것입니다. 아무리 탄압이 심할지라도 선생님들을 위해서, 참교육을 위해서 전교조가 결성되고 이 땅에 참교육이 실현될 때까지 열심히 싸울 것을 결의했습니다. 선생님! 아무리 모진 고난이 있다 하더라도 선생님의 뜻을 절대로 굽히지 마시고 저희들을 위해, 이 땅의 참교육을 위해 끝까지 투쟁해 주십시오.”

- 전교조 학생사업국, 『학생권리침해사례집』, 19쪽 인용

해직된 역사교사 이인곤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구로고 3학년 곽경태 군이 쓴 손편지(출처 : 하성환) 학생들을 통해서 선생님의 인품이 묻어나오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편지글이다.
해직된 역사교사 이인곤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구로고 3학년 곽경태 군이 쓴 손편지(출처 : 하성환) 학생들을 통해서 선생님의 인품이 묻어나오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편지글이다.

구로고 3-7반 곽경태 학생은 해직된 역사교사 이인곤 선생님을 그리며 손 편지를 이렇게 남기기도 했다.

“ - 이인곤 선생님께

가슴에 쌓인 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의 빈자리에 어떤 낯선 이가 오셨습니다. 언제나 기다리던 국사 시간은 이제 자습 시간과 취침 시간으로 변했습니다. 오늘도 40여 명은 완전히 자고, 깨어 있는 아이들조차 각자 자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피곤하신 듯한 선생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어립니다. 저는 이제까지 배워왔던 잘못된 역사의식을 선생님께 비로소 공정하게 저의 판단에 맡길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진지하시고 절규하시는 듯한 선생님의 모습은 언제나 저의 가슴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꿋꿋하시고 옳은 것은 언제나 옳다는 선생님의 그런 모습은 저희에게 정말 교육이 되었다고 확신하고 선생님의 그런 모습을 다시 뵙게 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여러 아이들도 선생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영원히 저희의 스승이십니다.”

실제로 절대 다수 학생들은 전교조 교사들을 좋아했고 사랑했다. 그 학생들 중 일부는 글쓴이가 야학활동을 하던 서초동 꽃동네 철거민 지역(현재 서초동 법원, 검찰청사)으로 가서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부방을 운영하기도 했다. 도시빈민 가정의 경우 맞벌이 부부가 많은 탓에 어린 초등학생들에게 숙제도 가르쳐 주고 같이 놀기도 하면서 부모님이 올 때까지 어린 학생들을 돌보고 보살폈다. 언젠가 그 학생들이 글쓴이에게 다짐하듯이 말을 건넸다.

“ 선생님, 불의와 싸우는 것을 두려워 마세요! 우리가 선생님을 지켜줄 거예요!”

당시 학생들은 지극히 순수했고 정의감으로 충만했다. 공권력이 자행하는 무자비한 폭력 앞에 솔직히 주저하며 겁을 먹었던 글쓴이도 참교육을 열망했던 당시 순수한 학생들의 지지와 격려, 그 선한 눈망울에 큰 힘을 얻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전남대 교정에 있는 참교육 기념비석(정희곤 선생님, 장권호 선생님 제공) 1989년 광주광역시 서강고 3학년 졸업생들이 졸업식날 해직된 전교조 선생님들을 기리며 교정에 세운 참교육비석으로 졸업생들이 십시일반 모금하여 교정에 세웠다. 고난 끝에 지금은 전남대 교정에 있다.
전남대 교정에 있는 참교육 기념비석(정희곤 선생님, 장권호 선생님 제공) 1989년 광주광역시 서강고 3학년 졸업생들이 졸업식날 해직된 전교조 선생님들을 기리며 교정에 세운 참교육비석으로 졸업생들이 십시일반 모금하여 교정에 세웠다. 고난 끝에 지금은 전남대 교정에 있다.

이런 현상은 당시 전국적으로 발견되는 사례다. 광주 금호고등학교와 중앙여고, 그리고 송원고등학교와 대구 학산고등학교에선 학생들이 <참교육>을 지지하며 전교조 교사들을 지키기 위해 혈서를 썼다. 광주 서석고등학교에선 ‘선생님 한 분 징계할 때마다 학생 한 명씩 투신하겠다.’고 결의했는데 학생들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만큼 초창기 “선생님을 사랑해요!”, “선생님을 때리지 마세요!”로 시작한 ‘전교조 교사 지키기 고등학생운동’은 ‘<참교육> 지키기 고등학생운동’으로 한 단계 높이 승화돼 나아갔다. 고등학생들 스스로 <참교육> 운동 대열에서 또 다른 교육주체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광주 서석고등학교 강위원 군과 임희용 군, 그리고 대동고등학교 김일수 군은 구속된 후 재판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법정 최후 진술을 하기도 했다.

“전교조 선생님들이 진실을 가르쳐주시고 사랑으로 대해 주시며 정의를 몸으로 실천하실 때 우리는 희망에 넘쳤습니다. 그러한 선생님들을 문교부와 학교 당국이 우리에게서 떼어 놓을 때 우리는 선생님들을 지키기 위해 일어설 수밖에 없었으며 ··· (중략) 선생님을 사랑한 것이 죄인가요? 전경의 곤봉과 군홧발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시며 ‘너희들은 데모하지 말고 공부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이 어떻게 우리의 배후조종자란 말인가요! 우리의 참모습을 깨닫게 해주신 선생님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선생님들을 좌경용공으로 매도하지 마세요! 비교육자라 매도하지 마세요!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오직 웃음이 넘치는 교실에서 사랑하는 선생님과 함께 진실을 진실이라 말하는 참교육,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이제 눈물을 거두어주십시오.” - 1990년 2월 15일 법정 최후 진술문 중에서

글쓴이는 윤석열 정권에서 피해 회복을 위한 정부 입법을 기대하지 않는다. 다수 의석을 보유한 더불어민주당이 적극 앞장서서 진실·화해위 권고 사항을 이행하길 촉구한다. 이미 의원입법 발의된 ‘해직교사 원상회복 특별법’이 국회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즉각 심의하고 통과시켜 본회의에 회부할 것을 촉구한다. 전교조에 대해 왜곡된 국민여론을 의식해 머뭇거려선 안 된다. 89년 노태우 군부정권이 저지른 전교조 탄압이 <인권탄압>이었음을 국가기관인 <진실 화해위>가 선언했다. <진실 화해위> 결정문 대로 국회는 계류 중인 특별법을 통과시켜야 한다. 그것이 역사정의를 바로 세우고 교육계 정의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지만 <촌지거부운동>으로 전국적 지지를 획득했고 <교육민주화운동>으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한 89년 전교조 <참교육>운동을 마냥 부정하기엔 권력자들 스스로 정치적 부담이 적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 공식 기관이 권고한 피해 회복과 국가 배⬝보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앞장설 것을 촉구한다.

그 길만이 1994년 전교조 탈퇴를 조건으로 해직교사 복직을 허용했던 김영삼 문민정부의 잘못을 바로 잡는 길이다. 당시 1,500명 넘는 해직교사들이 처한 곤궁한 처지를 악용해 국가 권력은 또다시 전교조 해직교사들을 능멸하며 모욕하는 방식으로 복직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원직복직이 아니라 특별 신규채용 형식으로 해직교사 문제를 적당히 마무리 지었다.

복직과정 면접 심사에서 교육부 관료들은 국가 권력을 등에 업고 해직교사들에게 전교조 탈퇴를 노골적으로 주문하며 지장을 찍게 했다. 그 과정은 참으로 굴욕스러웠다. 당시 어떤 선생님은 교육 관료들이 강요하는 모욕적 주문에 분노하며 이렇게 되받아쳤다. 탈퇴각서에 “엄지손가락으로 찍을까요? 아니면 새끼손가락으로 찍을까요?” 물론 그 용기 있는 선생님은 그 일로 복직하지 못했다.

실제로 복직과정은 굴욕스러웠고 전교조 해직교사들에게 모욕감을 안겨 주는 방식이었다. 그런 이유로 서울 신양중학교에서 해직된 국어 교사, 길옥화 선생님은 크게 상심했다. 해직교사들을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복직을 추진하는 김영삼 문민정부와 교육부 관료들의 권위주의적 태도를 견딜 수 없었다.

길옥화 선생님은 이렇게 항변했다. “우리가 죄인인가요? 저는 아이들 앞에 떳떳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도저히 굴욕감을 참을 수 없습니다.” 길옥화 선생님은 교육부가 신규 임용 특별채용 방식 신청 마감일을 4일 앞두고 울분 끝에 죽음으로써 치욕에 맞섰다. 새벽 2시 13층 아파트에서 투신했다. 한 세대가 지난 일이지만 길옥화 선생님 외침을 오늘도 가만가만 가슴에 새겨본다. 국가폭력은 오늘도 여전하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