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모르면, 종친도 ‘길거리의 남’(路人)

우선, 숙종 임금 32년 병술년 <진주형씨족보> 서문 2의 원문과 번역문을 제시한다.

1706년 병술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철우(전남 구례군 구례읍)
1706년 병술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철우(전남 구례군 구례읍)
1706년 병술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철우(전남 구례군 구례읍)
1706년 병술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철우(전남 구례군 구례읍)

<번역문>

형씨족보 수정 서문 2

뭇 사람이 족보에 관심을 둔 지는 대체로 오래되었다. 족보란 돈종돈목(敦宗敦睦), 즉 종친끼리 서로 화목한 정의(情誼)를 나누자는 의의를 지닌다. 족보를 보고 조상을 알고, 조상을 보고 씨족을 알고, 씨족을 보고 그 파(派)를 알고, 파를 본 다음에 조상이 되고 선조가 됨을 알아보게 된다. 족보는 인륜에 크게 관련된다.

시조가 자손을 둠은 나뭇가지에 잎이 나고 물에 물갈래와 물길이 생김과 같다. 처음에는 하나의 큰 뿌리와 원천, 즉 샘에서 나온다. 나뭇가지의 갈림과 물길의 갈림에 이르러서는 세대가 까마득히 멀어지고 종친이 흩어진다. 아저씨가 아저씨이고, 형이 형인지를 알아보지 못한다. 월나라와 진나라가 서로 보듯이, 즉 서로 남의 어려운 일이나 근심 따위를 돌보지 않듯이, 서로 ‘길거리의 남’처럼 되어간다. 삼강오륜은 좀먹고 도타운 의의는 펴지지 못한다. 실로 조상에게는 죄인이 되고 종친들에게 부끄러움이 된다. 훌륭한 분을 존경하고, 마땅히 가깝게 지내야 할 사람을 친히 하는 뜻을 과연 어디에 두겠는가.

옛날 현인과 성인이 인륜을 밝히고 씨족에게 도타이하고 화목하게 한 연유를 쫓아 진실로 그런 도리를 다한 후에 미루어 판단하고 연역적으로 계통을 밝혀 족보를 완성하는 일은 정말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법이다.

실제로 우리 형씨는 진양(晉陽; 지금의 경남 진주)으로부터 비롯하였다. 높은 벼슬이 끊이지 않고 세대마다 그 업적이 빛나게 동방에 드러났었다. 최근 백여 년 동안 훌륭한 선조를 계승하지 못했도다. 문중의 지체는 낮아지고 종친은 미미하여 각 파가 활발하지 못했다. 개탄스러운 마음이 가득하도다. 영남과 호남의 두 지역에서 한결 같이 지극한 효행이 계속 나왔다. 사람들은 이를 공경하고 우러러보도다.

숫자가 많지 않은데도 종친은 각기 흩어져 살아왔다. 세월이 더욱 오래되고 세대가 더욱 멀어지면, 서로 친목하지 못한다. 근본을 궁구하면 원천은 하나이고 조상은 똑같다. 부자(父子)와 소목(昭穆)의 차례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마치 기러기와 집오리의 질서정연함처럼 형제간의 질서를 보여주는 항렬이 분명하지 못하고 어느 파가 어느 고을에 사는지 분간하지 못하면 효도하고 우애하는 마음과 도탑고 공경하는 뜻이 어디에서 일어나겠는가?

문사(文詞)와 생소한 주제에 대해서는 헛되이 말하지 않아야 하리. 문중의 여러 부형(父兄)이 수보(修譜), 즉 족보를 만들자고 두세 번 정중히 재촉하였다. 아직 부지런하게 탐색하지도 못했고 매우 거칠도다. 공손치 못하여 감당할 수도 없고 사양할 수도 없어서 책을 만치며 머뭇거리다가 붓에 먹을 묻혀 수정하였다. 당연히 각 도(道)의 여러 종친에게 일일이 통고하여야 하고 명단을 받아 족보를 완성해야 한다. 사업은 어마어마하나 힘은 모자라니 판을 짜서 인쇄하기가 쉽지 않도다. 단지 옛 족보에 근거하여 세상을 떠난 문중의 부형(父兄)에 관한 별록(別錄)을 이어 받들었다. 그 범례(凡例)와 격식을 교정할 때에는 서울 일원의 이름난 문중의 족보를 널리 참고했다. 그 다음에 그 법식을 취하고 모방하여 편집하였다. 일단 족보를 한권씩 펼쳐보니, 내외의 모든 종친이 모두 그 파(派)에 합당하게 분명하고 명백하게 딱 들어맞는도다. 도탑고 친히 하고자 하는 뜻이 구름이 피어나듯 생겨나리라. 친족 간에 화목한 바람이 크게 성하여 일어나니, 어찌 행운이 아니며 훌륭하지 아니한가.

한편 능주의 한림파(翰林派)와 밀양의 여러 종친이 나란히 족보에 들어오지 못했다. 후손으로서 사업에 민첩하게 부지런히 주간할 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노니, 그가 모든 종친을 합하여 다시 간행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숭정 기원후 두 번째 병술년(1706년) 여름 5월 을유일

후손 형사범(邢師範)은 삼가 기록하는 바이다.

주: <진주형씨대동보>, 권지수(卷之首), 2003, 201-205쪽에 기록된 번역을 다듬고 편집함

병술보 서문의 두 번째 필자인 형사범(1661.02.12.-1739.01.22.) 선생은 조선조 19대 임금 현종(재위: 1659.6.28.(음5.9.)~1674.9.17.(음8.18.)) 연간의 초기에 태어나 숙종(재위: 1674. 9.22.(음8.23.) ~ 1720.7.12.(음6.8.)) 임금, 경종(재위: 1720.7.17.(음 6.13.) ~ 1724.10.11.(음 8.25.)) 임금을 거쳐 영조(재위: 1724.10.16.(음 8.30.) ~ 1776.4.22.(음 3.5.)) 임금 연간의 전반기를 사신 인물로 보인다. 생존 기간에 네 분의 임금을 겪은 셈이다.

진주형씨(병사공파) 입향 500년 기념비(제막: 2019.4.12.). 위치: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마을회관.
진주형씨(병사공파) 입향 500년 기념비(제막: 2019.4.12.). 위치: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마을회관.

서문의 원문 제18열과 제19열(번역문, 끝에서 두 번째 문단)에 1‘능주의 한림파(翰林派)와 밀양의 여러 종친이 나란히 족보에 들어오지 못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당시에 진주형씨가 지금의 전남 화순군 능주 지역과 경남의 밀양 지역에 분포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정황을 족보의 간행을 추진한 분들이 인식하였으나 당시의 이동과 연락 수단이 원활하지 않았기에 각지의 종친을 연결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능주의 한림파’는 지금의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아내미길 37번지에 종갓집이 자리한 병사공파에 대한 지칭으로 보인다. 나는 병사공 18대손이다. 병사공파를 ‘한림파’라고 부른 연유를 짐작할 만한 언급이 서문에는 없다. 아직 그에 대한 다른 기록을 찾지 못했다. 장래에 계속 살펴봐야 할 대목이다.

대한민국 105년 1월 10일

편집 :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f61255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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