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 두텁고 화목한 마음이 구름이 피어나듯 생겨나리라

1763년 영조 임금 39년 음력 5월, 조선의 경제 사정은 어떠했을까? <조선왕조실록>에서 경제 관련 기사를 찾아봤다.

관서(關西)에 가뭄이 들었는데, 도신(道臣)에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라 명하였다. 함경도에 우박이 내려서 보리와 조를 손상시켰다. 우역(牛疫)이 크게 번졌다. 비가 오지 않는 것에 대해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칙유(飭諭·칙서로 타이르고 깨우침)를 내렸다. 기근이 든 제주에 호남의 곡식을 운반해 진휼하라고 명하다.

임금이 기우제를 명하고, 칙서를 내리고, 진휼을 명할 정도였으니, 당시는 가뭄이나 우박으로 인하여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그런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도 진주형씨 문중은 1763년에 <진주형씨족보>(이하, 계미보)를 간행하였다. 여러 조상님께 감사할 뿐이다.

우선, 계미보 서문의 원문과 번역문을 제시한다.

<번역문>

진주형씨족보 서문

무릇 족보에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 즉 세계(世系)를 기재하고 파의 나뉨을 기록한다. 비록 백 대까지 멀어져도 세계와 파의 나뉨을 상세히 하고자 함이 이번 족보를 만드는 까닭이다. 더구나 우리 형씨는 고려시대에 드러난 문벌이었는데도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 빛을 보지 못하니 한탄스럽도다.

대체로 진주를 본으로 삼은 까닭은 우리의 선조가 진양군(晉陽君)으로 봉해져서이다. 선조가 이후에 연속 독자로 대를 이어오다 서윤공 4형제(형군자, 형군정, 형군소, 형군철)에 이르렀다. 서윤공(형군소)은 오직 판서공(형규·邢珪; 조선 태종 때 호조판서)만을 두었다. 판서공의 아들 참의공(형인기·邢仁奇)은 아들 넷을 두었다. 맏이(형수·邢琇; 참의, 사간공, 2003년 계미대동보 상 수원분파의 파조)는 사위만을 두었다. 그 사위는 어사(御史)에 이르렀고 이름은 방구성(房九成)이다. 둘째 아들은 현감공(형근·邢瑾)인데 남원에 거주하는 이들이 그 후손이다. 셋째 아들 진사공(형박·邢玉尃; 1808년 무진보에는 생원공으로 나옴)인데 거창에 거주하는 이들이 그 후손이다. 넷째는 생원공(형균·邢玉勻; 1808년 무진보에는 진사공으로 나옴)인데 전주에 거주하는 이들이 그 후손이다.

오로지 우리의 부위공 형계선(邢繼善)은 비로소 매안(梅岸)으로 오셨다. 슬프고 슬프도다. 판서공 형규(邢珪)는 남원 고을 주포(전북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에 거주하였다. 그 터를 사람들은 아직도 형판서(邢判書)의 옛터라고 지칭한다. 산소는 주포에 있다고 하는데 전쟁의 여파로 잃어버려 상세하지 않다. 자손이 각처에 흩어져 그 수가 수없이 많다고 이를 만하니, 각파와 계통과 세대를 구별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게 바로 노소(老蘇·송나라 소순(蘇洵)의 별칭, 1009~1066)가 “계속 나뉘다 보면 길거리의 남에 이른다.”라고 탄식하는 이유다. 모든 선비의 가문에는 간행한 족보가 있지 않음이 없다. 우리 가문에는 단지 세대와 파를 간략히 기록한 것이 하나만 있을 뿐이다. 이번 족보를 보면 친하고 덜 친하고, 가깝고 먼 사이인지를 또한 알 수 있다. 정이 두텁고 화목한 마음이 널리 구름이 피어나듯 생겨나리라.

이번에 족보를 온전히 갖추기에 이르기까지 이미 70여 년이나 오랜 시간이 지나갔으니, 종이는 이미 닳아서 떨어지고 글자 획까지도 벗겨졌도다. 개탄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다. 우매함도 잊고 감히 수정할 계획이 생겨서 종친 형사인(邢司仁)에게 책을 꾸미도록 하고, 쓰기는 종친 형사억(邢司億)에게 필사하도록 하였다. 다만 자손이 갈라져 외지에 있는 자는 다듬어 수록하지 못하고 단지 근처 종친들의 자손만을 각 그 세대 밑에 덧붙여 써넣었다. 정말 아쉽다. 훗날 문중에서 혹 있을지도 모르는 뜻밖의 경우(境遇)에 오늘날 아직 이루지 못한 뜻을 따라서 훌륭한 족보의 간행을 이뤄낸다면, 우리 문중의 큰 행운이기에 어찌 뜻이나 품격이 높은 고결한 사람이 가려서 뽑히고 오래도록 스승이 되기를 고대하지 않겠는가?

숭정기원(1628년) 후 세 번째 계미년(1763년) 음력 5월 상순 일

<진주형씨연방옭(곤)>, 1852. 소장자: 형광호, 병사공 20대종손.
<진주형씨연방록(곤)>, 1852. 소장자: 형광호, 병사공 20대종손.

원문 제17열(번역문, 다섯 번째 문단)에 ‘이번에 족보를 온전히 갖추기에 이르기까지 이미 70여 년이나 오랜 시간이 지나갔으니’라고 나온다. 이는 <진주형씨족보>가 두 세대(한 세대는 30년) 전인 1690년대 전후에 간행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1763년 계미보 이전에 나온 족보는 1706년 병술보다. 두 족보 간의 시차는 57년이다. 약 두 세대의 간격이다.

2023년 1월 현재, 나는 1763년에 간행된 <진주형씨족보>의 실물을 아직 보지 못했다. 번역의 원본으로 삼은 위 서문은 <진주형씨연방록(곤)>(1852년)에 등재되어 있다. 서문의 필자가 표시되지 않은 점은 특기할 만하다.

2023년 1월 현재 파악된 1763년 계미보의 서문은 두 개인데, 여기에 제시하지 않은 서문의 필자는 형종하(邢宗夏) 선생이다. 그분이 지은 서문은 2003년 <진주형씨대동보>에 번역되어 실렸다. 그분의 서문은 많은 내용이 위에 제시한 서문과 대동소이하다.

형종하 선생의 제자와 후손은 계미보 간행 후 45년이 지난 1808년 <진주형씨족보>(이하, 무진보)의 간행을 주도하면서 서문이나 발문을 지었다. 그분의 아들 형효동(邢孝東) 선생은 서문을, 그분과 4촌인 형종백(邢宗伯)의 손자 형국필(邢國弼) 선생은 발문을 각각 지었다. 또한 제자인 형사인(邢思仁l; 1740~1815) 선생도 무진보의 서문을 지었는데, 그 서문에서 ‘나는 극재공(克齋公) 선생의 문하에서 배웠다.’라고 밝혔다.

대한민국 105년 1월 24일

편집 :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f61255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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