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의병을 일으킨 제안재공(濟安齋公) 형련(邢璉)

우선, 무진보의 세 번째 서문의 원문과 번역문을 제시한다.

1808년 무진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광호(병사공 20대종손). 형철우(전남 구례군)
1808년 무진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광호(병사공 20대종손). 형철우(전남 구례군)
1808년 무진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광호(병사공 20대종손). 형철우(전남 구례군)
1808년 무진년 <진주형씨족보> 소장자: 형광호(병사공 20대종손). 형철우(전남 구례군)

<번역문>

대체로 사람은 줄기와 가지, 즉 종손과 자손을 둔다. 이는 나무에 뿌리와 줄기가 있고, 물이 그 흘러나오는 근원과 물갈래를 둠과 같다. 뿌리에서 줄기가 나오고, 물의 근원에서 물갈래가 생긴다고 한다. 우리 여러 종친은 서로 하나의 큰 근원과 하나의 큰 뿌리를 두었다. 세대가 멀리 흘러서도 자손이 번성하여 널리 퍼짐은 소중한 일이로다. 그래서 족보에는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을 밝혀서 갈래를 잘 나누어 기록한다.

대개 진양군(晉陽君·형공미)부터 그 이후로 이름난 벼슬이 대를 이어 내려오고 연달아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높은 벼슬이 연이어 왔다. 문벌(門閥)로서 현족(顯族)이라고 이를 만했다. 최근에 이르러 권세가 줄어드는 형편을 바꾸지 못하니, 개탄스러움을 억누르지 못하겠다. 슬프도다. 판서공(형규·邢珪)의 옛 터전과 묘를 쓴 산이 주포(현 전북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에 여전하나 산소를 전쟁 통에 잃었다. 그 후에 자손은 각처로 흩어져 산다.

비록 간략히 기록한 예전 족보가 있으나 아직 족보를 합하지 못했다. 세대와 파 나뉨이 관작과 묘지를 상세하게 살피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살펴보기가 어려워서 파 나뉨으로는 멀지 않은 사이인데도 친밀한 정의(情誼)가 점점 소원해져서 ‘길거리의 남’을 보듯 함이 많다. 이러함에도 어찌 족보 만들기에 정성을 다하지 못한다고 함이 맞겠는가?

이제 꾸밈없이 제안재 형련(邢璉)의 5세손으로써 나(형사인)는 조금 총명하지 못하여 지식이 없으나 제안재공이 의병을 일으킨 까닭을 외람스럽게도 족보에서 설명했다. 여러 종친이 마음과 힘을 다하고 청년들이 매우 부지런히 정성을 기울여서 마침내 족보 발간할 계획을 세웠다.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친하거나 덜 친함에 관계없이 합의동심(合義同心)하여 바로 잡고 잘 정돈하여 여러 활자를 붙이니 서로 잘 짜였도다. 구슬을 꿰듯이 하여 파 나뉨이 상세하고 간략함이 명약관화하다. 각처 여러 종친이 모여 한 집안을 이루고 정이 두텁고 화목함, 효도하고 우애하는 마음이 널리 왕성히 일어나도다. 이번 족보의 간행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겠는가. 이번에 여러 종친 중에서 못나고 어리석은 내가 극재 형종하(邢宗夏·1763년 계미보 서문의 필자)의 문하에서 배웠고, 그 가르침을 이어서 내가 선대의 업적에 차례를 만들었다. 나는 문장이 서툴러서 감히 선조가 남긴 업적을 말하고 삼가 서술할 수 없기에, 근본의 경위를 간략히 진설하였을 뿐이다.

생각건대, 종친들은 근원이 같다는 두터운 의리에 더욱 힘쓰고, 족보를 합해서 만드는 그 성대한 뜻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순조(재위 : 1800 -1834) 9년 무진년(1808년) 겨울 후손 형사인 삼가 쓰다.

원문 제14열과 제15열(번역문, 네 번째 문단)에서 보건대, 지은이 형사인(邢思仁·1740.06.03.-1815.02.06·향년 76세) 선생은 1763년 계미보 서문을 지은 극재 형종하(邢宗夏) 선생의 제자다.

원문 제9열(번역문, 네 번째 문단)에서 보면, 제안재 형련(邢璉) 선생은 의병을 일으키셨다. ‘임진왜란 의병과 진주형씨’(한겨레:온, 2021.04.15.)에서 밝힌 대로, 제안재공(濟安齋公) 형련(邢璉)은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남원성이 포위당하자 입고 있던 비단옷에 ‘죽어도 난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 된 직분’(死不避亂 臣子職分)이라는 여덟 글자와 이름을 혈서로 쓴 뒤 성으로 달려갔다. 남원부사 임현(任鉉)과 협력하여 왜적과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순절하였다.···사람들은 그 의리를 장하게 여겨 남원성 아래 산에 장사를 지내고 돌을 세워 ‘죽음으로 절의를 지킨 장사 형련의 묘’(死節壯士 邢璉之墓)라고 새겨넣었다. ”(디지털남원문화대전).

대한민국 105년 2월 15일

관련기사: [임진왜란 의병과 진주형씨]

http://cms.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424

편집 : 형광석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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