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정복자의 시각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은 종종 콜럼버스를 ‘좌절하지 않는 탐험가’로 묘사한다. 심지어 ‘신대륙을 발견한 위대한 영웅’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콜럼버스가 없었다면 오늘의 아메리카도 없었고 역사의 진보도 불가능했다고 강조한다.

역사 속 콜럼버스는 자신의 제안을 불신했던 이탈리아, 포르투갈을 떠나 황금과 성경으로 스페인 국왕을 설득했다. 스페인제국 이사벨 여왕은 당시 포르투갈보다 먼저 인도항로를 발견함으로써 세계 제국을 욕망했다. 그리하여 콜럼버스를 지원했는데 콜럼버스는 4차례에 걸쳐 중남미 일대를 침탈하였다.

실제로 미국의 모든 역사 교과서에는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한 인물로 설명하고 매년 10월 12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2003년 홍윤서가 쓴 『전쟁과 학살, 부끄러운 미국』 (말, 2003년)에 따르면 미국 전역에선 10월 12일을 ‘콜럼버스의 날’로 기념해 성대한 행사를 치른다고 한다.

이 책에서 글쓴이는 멕시코 침략전쟁, 베트남전쟁을 비롯해 미국이 자행한 전쟁을 다루고 있다.(출처 : 하성환)
이 책에서 글쓴이는 멕시코 침략전쟁, 베트남전쟁을 비롯해 미국이 자행한 전쟁을 다루고 있다.(출처 : 하성환)

‘콜럼버스의 날’을 기념하는 미국 문화는 참혹하게 희생당한 아라와크(Arawak) 인디언 역사를 부정하는 관점이다. 나아가 서구 기독교 문명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시각이다. 실제로 인디언 원주민들은 서구의 관점과 달리 대단히 수준 높은 문명을 지니고 있었다. 멕시코 마야(Maya) 문명, 아즈테카(Azteca) 문명, 페루 잉카(Inca)문명은 주요 사례들이다.

15~16세기 스페인제국이 중남미 대륙을 침략하면서 인디언 원주민들이 구축한 경제 질서가 상당수 파괴당했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시설 중에는 잉카 시대에 구축한 관개시설이 아직까지도 페루 해안 사막지대 농사에 활용되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스페인제국이 침략하기 이전에 이미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는 토목공사와 도로망이 크게 발달하였고 방직 기술도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옥수수와 고구마, 그리고 감자와 담배도 당시엔 오직 신대륙에서만 재배되었다. 신대륙 침략 이후 유럽으로 전해졌고 곧이어 전 세계로 보급되었던 농작물이다.

미개한 사회제도라는 통념이나 상식과 달리, 인디언 원주민들은 이미 절대주의 왕정 체제 아래 잘 조직된 계급사회를 정치제도로서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당히 수준 높은 사회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콜럼버스가 기록한 항해일지를 보면 인디언들이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낯선 사람에 대해 친절함과 온화함 그리고 나눔의 정신을 기꺼이 실천하고 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반면에 콜럼버스를 비롯해 산타마리아호에 탔던 스페인 선원들은 오직 황금에 눈먼 교활한 약탈적 상인들로 묘사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다음은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쓴 『미국 민중저항사 1』(일월서각, 1986)에 나오는 콜럼부스 항해일지 일부분이다.

“아라와크족 인디언은 우리에게 먹을 식량과 물을 가져다주었으며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고 무기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에게 칼을 보여 주자 칼날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베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의 좋은 하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50명만 있다면 아라와크족 인디언 모두를 정복하여 마음껏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콜럼버스는 1495년 대규모 노예 약탈을 시작으로 모두 네 차례 인디언을 학살하고 약탈했다. 남자, 여자, 어린이 할 것 없이 1,500명 인디언을 스페인 선원들과 무서운 개가 지키고 있는 우리 속에 가두었다. 감금한 인디언 가운데 500명을 강제로 배에 태워 스페인으로 데려갔다.

스페인으로 오는 도중 선박 안에서 인디언 200명이 굶주린 채 병들어 죽었다. 나머지 300명은 스페인에 도착해 가톨릭 부주교에 의해 경매에 부쳐졌다. 그때 콜럼버스는 인디언들을 ‘사용 가치가 있는 노예’로 생각했다. 그는 ‘주 하느님 성령의 이름으로’ 계속 노예를 붙잡아 보낼 것을 다짐하곤 했다.

1498년에는 카리브 인디언 600명을 노예로 팔기 위해 스페인으로 강제 납치하려 했다. 그러자 인디언 원주민들은 콜럼버스 군대를 피해 집을 버리고 마을을 떠나 피신해야 했다. 그 결과 카리브해 아이티에서는 1492년에 700만~800만 명에 이르던 원주민들이 1510년에는 6만 5,800명으로 1540년에는 250명으로 급감했다.

새로운 질병의 유입도 있었지만 콜럼버스를 비롯해 백인 정복자 코르테스, 피자르가 저지른 학살과 납치, 약탈로 인해 뿌리 뽑히고 착취당한 결과였다. 유대인 이상으로 학살이 자행된 콜럼버스의 정복은 “2억 년 전 고생대 이후 가장 심각한 파괴였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다면 실제로 콜럼버스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상점 점원으로 일했던 시간제 직공이었다. 그러던 그가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황금과 향료를 가져오겠다는 약속을 받고서 배 3척과 90명이 넘는 선원을 지원받았다. 배 세 척은 니냐(Nina)호, 핀타(Pinta)호, 산타마리아(Santa Maria)호였다.

당시 스페인 국왕이 제시한 조건은 새로 발견한 땅에서 콜럼버스가 총독 지위를 얻는 것과 획득한 이익의 10%를 소유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1492년 최초의 항해에서 콜럼버스는 카리브해 바하마제도에 도착하였고 거기서 아라와크족 인디언들에게 큰 환영과 함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 스스로 아라와크족 인디언들을 “믿지 못할 정도로 순진하고 욕심이 없으며 함께 나누어 가지려는 사람들”로 묘사하였다.

<노예 사냥꾼> 콜럼버스는 자신에게 투자한 스페인 상류 지배층, 바로 왕족과 상업부루주아들을 위해 스스로 약탈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원주민들을 잡는 대로 잔인하게 살해하거나 불에 태워 죽였으며 황금 대신 노예사냥으로 끌고 갔다. 콜럼버스와 그 부하들은 14세 이상 원주민들에게 3달에 한 번씩 황금을 가져오게 지시했다. 지시에 따라 황금을 갖다 바친 인디언들에겐 목에다 구리증표를 걸어 주었다. 그런데 구리증표를 목에 걸지 못한 인디언들은 발견 즉시 손목이 잘리어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아라와크족 인디언들은 스페인 약탈자들에게 저항했지만 콜럼버스가 다녀간 2년 동안 25만 명에 가까운 인디언들이 대량 학살과 수족 절단으로 참혹하게 죽어갔다. 이는 당시 아이티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자신의 칼날이 어느 정도 날카로운가를 시험해 보기 위한 단순한 이유에서 인디언들을 10명씩, 20명씩 칼로 베어 죽였다. 심지어 장난삼아 길거리 어린 소년의 목을 자르는 만행도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실제로 인디언들은 황금을 캐기 위해 광산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갔으며 동물처럼 사육되고 학살당했다.

놀라운 사실은 콜럼버스 스스로 자신의 잔악한 행위를 ‘영원한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였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오리엔탈리즘이 지배하는 서구 기독교 관점에선 콜럼버스가 자행한 학살 만행을 정당한 행위로 미화하고 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콜럼버스 이후 스페인 정복자들은 코르테스(Cortes)가 멕시코 아즈텍문명을 일군 인디언들을 무참히 파괴, 학살했다. 코르테스는 스페인 출신으로 16세기 아즈텍문명을 파괴하고 멕시코를 정복해 스페인 영토로 복속시킨 인물이다. 잔인할 뿐만 아니라 방탕한 인물이었다.

이어서 약탈자 피자르(Pizarro)는 페루 잉카족 인디언들을 대량 학살하였고 신대륙 청교도들은 버지니아와 매사추세츠에서 포하탄족과 피코트족 인디언들을 잔혹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오늘날 서구 문명의 화려함과 물질적 풍요로움 이면에는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망각 속에 잊힌 인디언들의 고통스러운 역사가 참혹하게 깔려 있다. 콜럼버스 역시 탐험가로서 기억하기보다 황금에 눈먼 ‘노예사냥꾼’으로 기억하고 가르치는 것이 역사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태도이다.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H. Zinn)은 정치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소외된 민중들의 삶이 역사에서 다루질 못하고 지나쳤다며 그들의 관점에서 미국 민중의 찬란한 역사를 진솔하게 서술하였다.(출처 : 하성환)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H. Zinn)은 정치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소외된 민중들의 삶이 역사에서 다루질 못하고 지나쳤다며 그들의 관점에서 미국 민중의 찬란한 역사를 진솔하게 서술하였다.(출처 : 하성환)

선량한 인디언 원주민들을 사냥하고 노예로 끌고 갔으며 인디언 재산을 약탈하고 무고한 생명을 학살한 제국주의 침략자 콜럼버스는 결코 ‘신대륙 발견의 영웅’이거나 성자聖者일 순 없다. 그것은 ‘침략’을 ‘신대륙의 발견’으로 기록한 유럽의 세계관이자 백인 정복자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유럽 제국이 침략하기 이전에 2,000만 명에 달했던 인디언들이 1/10로 인구가 급감한 것은 유럽에서 들어온 전염병이 그 원인이다. 그렇지만 콜럼버스를 이은 코르테스(Cortes), 피자르(Pizarro)를 비롯해 백인 정복자들이 저지른 학살과 파괴도 그 주요한 원인이다. 실제로 이들은 마야문명을 깡그리 짓밟고 마야인을 짐승처럼 도륙한 백인 전범들로서 잔인하고 교활한 침략자들이었다.

2차 약탈을 떠나기 전 콜럼버스가 드린 기도는 역설적이게도 이러했다.

“영원하신 하느님, 우리의 주님이시여, 불가능함을 극복하면서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저희들에게 승리를 주소서!”

 

* 이 글은 2006년 글쓴이가 <우리역사 바로읽기>에 쓴 내용을 다시 수정하고 다듬은 글임을 밝힙니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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