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시장 뒷골목 팥죽

아마 십대 초중반쯤이었으리라

십대중반에 난 이미 178cm로 건장

요령은 없었지만 힘은 상머슴 급이니

짐꾼으로는 꽤 써 먹을 만했을 것

그러니 쌀 짐 지워 장에 데리고 갔지

 

새벽 동트기 전 눈도 뜨기 전

사방은 어둠에 쌓였지만 부스럭부스럭

호롱불은 호사 별빛달빛의 안내 삼아

오랜만에 오일장 가기위해 준비하느라

온 집안 식구들이 분주히 오락가락

어제 이미 챙겨놓은 쌀가마니 꺼내

돈 살만한 좋은 쌀인지 적당한 양인지

쌀부대를 이리 저리 돌려가며 점검

 

십리 넘는 먼 길 어깨 등에 메고 가야하니

튼튼한 새끼줄 고리 낸 멜빵 쌀부대에 걸고

으랏차! 영차~ 거뜬하게 짊어지고 일어났지만

묵직한 쌀 무게로 어깨는 출 늘어지고

다리는 후들후들 등짝은 휘어졌지

버스 타는 곳까지 시골 먼 길 갈 걸 생각하니

쌀 짐보다 오히려 생각 짐이 더 무거웠지

 

돌담 좁은 동네골목길 빠져나와 냇물 건너고

논두렁밭두렁 미끄러운 비탈길 지나 재 넘고

읍내 버스정류장에 이르니 한숨이 절로 휴~

잠시 내려놓고 아이고~ 어깨야 아이고~ 다리야

여수로 가는 버스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어

아마 최소 삼십분 이상은 기다린 듯 지루하지

 

드디어 도착한 버스에 오르니 그래도 한시름 놨어

하지만 시골완행버스는 요동이 소달구지보다 더 심해

비포장 길 울퉁불퉁 경제속도 시속 25km

엉덩인 좌석에서 이탈 두 팔다리는 공중에서 춤춰

한 시간여 후에 여수 웃장 쌀가게 근처정류장 도착

이제 다 왔나 했더니 쌀 짐 지고 또 가야해

천신만고 끝에 쌀가게 도착하니 문을 닫았지 뭐야

 

아이고~ 어찌하나 했더니 아랫장까지 가야 한다고

얼마를 더 가야할지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리는 띵~

머리 목 어깨 팔 다리 전신 뻐근하지 않는 곳 없어

하지만 어찌 하겠는가 쌀팔아 돈 사야하니 또 가야지

택시 탈일 만무하고 시내버스 타기도 어중간한 거리

 

한참 걸어 도착한 아랫장 쌀가게 다행히 문 열렸네

아버지 평소 보기 힘든 흥정 자세로 주인과 협상

결정된 값으로 쌀로 돈을 사니 이제 끝인가 했지

그런데 아니었어 주목적인 오일장에 장보러 가야지

걷고 걸어 어물전에 당도하니 온 천지에 생선들로 가득

 

이 많은 생선들은 어디서 잡아 왔나 의구심 솟구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조기새끼와 잡어 한 묶음 샀지

굵고 좋은 생선 사기에는 녹녹치 않은 집안형편 잘 알아

이도 감사하지 벌써 외양간 황소 여물 쑤는 솥 장작불에

생선 구어 먹을 생각하니 때 이른 침샘이 작동하여 꿀꺽

장에서 산 생선 짐 꾸려 자루에 넣고 이제 집에 가나 했더니

늙으신 아버지 시장 뒷골목으로 휘적휘적 가신다

힘 빠져 축 처진 몸 끌고 뒤 따르니 팥죽집이 아닌가

 

이미 뱃가죽은 등짝에 붙었지만 쌀파느라 잊고 있었지

몸도 맘도 파죽음이 되어 축 늘어질 대로 늘어진 처지

그래도 팥죽 냄새 맡고 보니 작은 눈이 휘둥그레

팥죽 쑤는 조리장 앞에 앉으니 만감이 교차했어

주인아주머니 손놀림만 쳐다보며 언제 나오나 학수고대

나오자마자 더 생각할 것 없이 주린 배 채우기 급급했지

 

새벽 동트기 전부터 아침도 거른 채 점심때가 되기까지

물 한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고된 시간을 보냈으니

팥죽이 앞에 나오자마자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있었단 말인가

지금도 생각나면 웃음이 절로 나는 잊지 못할 시장뒷골목 팥죽

그때는 힘들었고 속으론 불평불만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내 생애 이런 귀한 경험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는데 모습이 떠올라

두고두고 삶의 교훈이 되었고 아름답고 값진 추억이 되었어

 

반세기 훌쩍 지난 얼마 전에 추억어린 그곳을 찾았지

장군도와 돌산도를 오가는 유람선을 바라보며 우수에 젖다

어슬렁어슬렁 시장골목을 배회하며 그 시절을 회상하는데

어! 아니~ 아직도 그 팥죽골목이 살아 있지 않는가

여전히 시장 뒤편 좁고 구석진 다소 허름한 골목에 말이야

그 때보다야 깨끗하고 정돈되었지만 풍기는 정취는 여전

 

반가움에 주인아주머니께 다가가 넉살 좀 부리니

가끔 비슷한 분들이 전국각지에서 찾아온다면서

맞장구쳐주는 정겨운 얼굴 다정함이 고맙고 감사해

어찌 그냥 지나 칠 수 있나 그 맛난 팥죽을 먹어야지

시장거리 오가는 사람들 보이는 작은 창가에 앉아

곱빼기 팥죽 주문 나오자마자 후후 불며 뚝딱 먹어치웠어

넓고 푸른 바다 뱃고동 들으며 선창 길 걷고 또 걸었지

아~ 세월은 가고 세상은 변했어도 몸과 맘은 이곳에 그대로

고스란히 남은 추억을 되새기며 비린내 나는 이 거리를 배회했어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tpk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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