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에 몇 개의 화분이 있습니다. 커피, 올리브, 로즈메리, 애플민트, 그리고 대파. 한동안 뜯어먹은 대파 끝에 둥근 씨앗이 맺혔습니다. 이젠 생명을 다했다는 거지요. 그 파를 뽑아서 씽크대로 옮기고, 다시 베란다에 갔더니 바닥에 길고 거무스름한 물체가 보입니다. 아, 지렁이입니다. 

대파를 뿌리째 뽑을 때 딸려나온 것 같습니다. 쭈그리고 앉아서 ‘얘를 어떻게 할까?’생각하다가 예닐곱 살 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작은 골목길을 따라서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였습니다. 골목에서 동무들과 뛰어노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불렀지요. “얘야, 너희 집이 어디냐?” 그렇게 해서 단칸방에 세들어 살던 집으로 스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어머니를 본 스님이 호통을 쳤습니다.  

“자네는 저 애를 죽일 셈인가?” 죽여? 엄마가 나를?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해 하는데 어머니는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시키는대로 상을 펴고 밥그릇에 생쌀을 가득 담고, 향을 꽂았습니다. 스님은 그 앞에서 주문을 외우듯이 중얼중얼.

이튿날 아침. 어머니는 내 손을 잡아끌고 관악산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더운 날에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느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싫지만은 않았습니다. 어머니랑 둘이 놀러가는 기분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절에 도착해서는 달뜬 기분이 와장창 무너졌습니다.  

주름투성이에 수염이 하얀 스님이랑 얘기하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스님은 구십이 넘었는데 하루에 생쌀 한 웅큼만으로 살아가는 고승이라고. ‘와! 신기하다. 난 밥을 배불리 먹어도 또 금방 배고파지는데’ 생각하는데 어머니가 말을 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이 스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해. 알았니?”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는 저기에 계시는데. 산 아래를 바라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왜 엄마는 할아버지 스님한테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걸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아버지란 소리가 쉬이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어머니도 옆의 젊은 스님도 그렇게 하라고 해서 어렵게 한 번 하고는 그만이었지요. 기분과는 달리 절밥이 무척 맛있었습니다. 절밥이 맛있는 건지, 산 중턱까지 씨근덕대고 올라가서 밥맛이 좋은 건지…... 처음 먹었던 다시마 부각은 확실히 맛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오솔길로 어머니랑 산을 내려올 때였습니다. 작은 풀숲사이로 무언가가 휙하고 지나갔고, 엉겁결에 그걸 밟고 말았습니다. 덜컥 겁이 나서 풀을 헤쳐보니 작은 도마뱀이 내장을 드러낸 채 죽어있었습니다. ‘절에서는 생명을 해치지 말라고 한다는데 난 도마뱀을 죽였구나! 이젠 난 벌을 받을 거야.’ 그 이후로 꽤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그 생각이 나서 지렁이를 화분 안 흙에 넣어주었습니다. 

 

오성근 객원편집위원  babsangman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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