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협한 독선을 벗어 던지자~

나는 교회를 50년 넘게 다녔다. 11살 때 주일학교를 다니기 시작해서 65세까지 다녔으니 교회 장로가 되었어도 벌써 되었어야 하는 연륜인데, 평신도로서 2019년 가을에 전광훈 목사의 수구적인 행태에 개신교가 너무 부끄러워 교회를 절연하고 말았다. 젊은 한때는 개척교회의 회계 집사로 교회 살림을 도맡아 보기도 했고 십 년 넘게 성가대도 했지만, 직장의 잦은 전근으로 교회도 몇 년마다 옮기는 바람에 안수집사 피택을 받지 못했다.

50년 넘는 신앙경력으로 기독교 사상은 대체로 통섭하였지만 때로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유대교 구약의 교리에 함몰되어 상식과 이성이 흔들리기도 하였다. 특히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목사들의 집요한 설교에 젊은 시절에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전도의 열망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 외에는 어떤 신이나 성현도 하위 개념으로 치부하며 기독교인의 우월성에 도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끔 개신교에서 일어나는 비상식적인 행태를 보면서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어 가는 것을 느꼈고 그때마다 나의 이성과 합리적인 성찰을 통해 잘못된 개신교의 행태에 함몰되지 않고 올바른 지성인의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첫 번째 혼돈은 학교의 단군상 훼손 사건이었다.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상을 훼손하는 것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근본 없는 불효막심한 행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교회는 단군상이 우상숭배라고 변명하지만, 단군상에 제사를 지내는 것도 아니고 교육적 상징물을 훼손하는 것은 앞뒤가 꽉 막힌 불통 덩어리가 아니고 무엇이랴.

한때는 종교 간 상생과 화합을 위해 불교 천주교 개신교가 서로의 예배 예불 시간에 참석하는 등 종교 교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더니 이제는 그런 왕래마저 보이지 않는 듯하다. 종교간의 갈등과 질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종교의 시조들인 부처 공자 예수 마호메트가 천상에서 만나면 서로 갈등하며 질시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서로 상대를 높이고 존중하며 세상의 평화를 위해 함께 힘을 합할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가 달라도 종교인들은 서로 이해하며 존중하고 협력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왜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일까? 유독 유일신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배타적인 교리도 문제이지만 종교 창시자 이후 후계자, 직업적 종교인들의 '먹고사니즘'에서 기인하는 밥그릇 지키기가 큰 원인인 것 같다. 결국 종교도 상업주의에 매몰되었고 초기의 거룩한 이상은 흔적만 있을 뿐 아무런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착한 사회단체보다 못한 그들만의 밀폐된 공간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서서히 말라 죽어가고 있다. 고아와 과부 등 가난한 약자들을 돕기 위해 시작된 십일조가 변질되어 교회만을 위한 재물이 된 지 오래다. 목사 먹여 살리고 교회 크게 짓고 부동산 사들이고 교회 행사에 몽땅 쓰고 나면 고아와 과부를 위한 돈은 없다. 교회 건축업자, 부동산 업자 먹여 살리고 교회 잔치에 탕진하는 십일조를 꼭 내야 할까? 그 돈으로 직접 가난한 자를 도와주면 하나님이 훨씬 기뻐하실 것이다. 이처럼 주객이 전도된 현상이 만연하여 이제는 거지도 동냥하러 교회에 가지 않는다.

형체와 색깔이 없는 물은 대지의 낮은 곳에 머물지만 이렇게 하늘과 구름도 담는다/ 사진: 김양화
형체와 색깔이 없는 물은 대지의 낮은 곳에 머물지만 이렇게 하늘과 구름도 담는다/ 사진: 김양화

무엇보다도 한국의 개신교는 과학적 지식을 너무 무시한다. 진화론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 우주의 역사가 육천 년이라고 공공연히 설교하는 목사들을 보면 교인들을 대놓고 우민화하기로 작정한 듯하다. 이런 행태는 그들이 이단이라고 깍아내리는 사이비 종교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더욱 한심한 일은 이런 비과학적인 설교를 듣고도 반론이나 이의제기하지 않는 교인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목사에게 대들면 저주받으니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는 것인가? 그런 교회 안 다니면 되는데, 꾸역꾸역 다니는 저의는 무엇인가? 외로워서, 영업을 위해서 등등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눈을 감는 것일까?

특히 한국의 개신교는 공산주의에 지나친 알레르기 증상이 있다. 물론 공산주의가 종교를 부정하고 한국의 해방 정국에서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대거 남한으로 쫓겨나면서 생긴 원한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성찰하는 종교인이라면, 원수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기독교인이라면 왜 공산주의가 발생했으며 그 공산주의는 '왜 종교를 부정하게 되었는가'를 깊이 살펴보고 언행에 옮겨야 한다.

1800년대 산업혁명 당시 어린이들까지 노동에 혹사시키면서 얻은 이익을 과도하게 자본가들이 착취할 때 근엄한 가톨릭 신부들은 아무런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본가들의 대변인으로 전락하는 것을 공산주의자들이 보면서 이런 종교라면 필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히려 사회 발전에 암적인 아편이라고 단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생각이 있는 기독교인 이라면 이런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예수의 명령을 준행하지 못한 자기들의 죄과를 통절히 회개하며 공산주의와 화해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것이 올바른 종교인의 자세가 아닐까?

<자본론>을 저술한 칼 맑스가 유태인으로서 유대 공동체적 삶에 비추어 산업혁명의 질곡은 노동자 서민에게는 지옥이라는 것을 통찰하고 공산주의를 불러 온 것이다. 즉 공산주의는 기독교가 이상향으로 삼는 유대 공동체의 변질된 사상인 것이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지하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운영했는가? 모든 성도가 모든 재산을 내놓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공산사회를 이룩하였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런 한국 개신교의 반지성적인 행태의 끝판에 전광훈이 나타나 나를 완전히 뒤집히게 만들었다. 그는 극우 개신교가 아니면 모두 '빨갱이'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의 생각대로 라면 유럽 국가도 모두 빨갱이 나라며 반공을 외치는 한국과 미국의 극우를 뺀 전 세계 90%가 빨갱이로 제거의 대상인 듯하다. 이게 말이 되는가? 그렇지만 인류 평화를 위해 전광훈이 좋아하는 극우 10%가 자숙하는 것이 오히려 효율적 합리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90%는 조용하고 전광훈류 10%가 앙앙불락하고 있으니 꼬리가 몸통을 흔들고 있는 볼썽사나운 세상이다.

서로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공감하지 못하면 공존할 수 없다. 상대방만 죽이고 나만 살 수 없다.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을까? 인류는 서로 잘 살기 위해서라도 서로를 인정하고 공감해야 한다. 그러면 무지갯빛 처럼 아름다운 다양한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이치가 부정되고 심지어 종교간에도 불화하는 이상한 현상은 어느 시대에 종식될 것인가? 

붉은 작약꽃이 향을 사르는 듯하다/ 사진: 김동섭
붉은 작약꽃이 향을 사르는 듯하다/ 사진: 김동섭

 

편집 : 조형식 객원편집위원

조형식 객원편집위원  july2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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