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하늘, 힘, 사랑이다

개벽대장 제8호 밥묵차 대표 유희 인터뷰

-밥은 하늘, , 사랑이다-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개벽대장 인터뷰. 인터뷰를 계속할수록 보석 같은 이야기들이 나오니 분단의 역사를 빨리 끝내기 위해서라도 이런 기록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도 7호까지만 하고 막을 내리려고 했던 이유는 부족한 시간 때문이었다. 소중한 몇 분을 더 추천받았지만 행사일이 가까워지니 정말 죄송하게도 멀리까지 이동해서 인터뷰하는 건 내게 너무 벅찬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거절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떻게든 짬을 내어보기로 했다.

 

개벽대장 8. 유희(1959년 출생). 전국노점상연합회(전노련) 수석부회장을 지냈고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밥묵차)’ 를 운영하다가 지금은 잠시 중단하고 있다. 76일 오전, 청라에 있는 아파트로 그녀를 찾았다. 두 가구 단위로 인터폰이 있는 출입구를 통과해야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아파트였다. 예상 밖이었다.

 

<노점상을 하다가 투사가 되다>

 

그녀는 청계천에서 공구노점을 했다. 1983년 국제금융회의를 개최한다고 폭력을 수반한 무리한 단속으로 노점상을 죽음으로 몰고 가더니, 1986년 아시안게임을 이유로 다시 대대적인 단속이 시작되었다. 1988917일부터 16일간 열리는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시는 봄부터 또다시 대대적인 환경미화(?) 작업에 들어갔다. 노점을 치우고, 달동네를 없앤다는 것이다. 613노점상 생존권 수호 결의대회가 열렸지만 전투경찰은 강경 진압에 나섰다. 나흘간 투쟁이 이어졌다.

 

<돈암동에 가 봅시다>

 

1988년 당시 29살이었던 그녀는 지저분한' 공구노점을 짓밟히면서 가열찬 저항을 시작 했다. 어느 날 전국노점상연합의 양연수 회장이 그녀에게 돈암동의 달동네를 가보자고 했다. 나라 밖에서 잠깐 방문하는 외국인에게 아름다운 도시로 보이려고 정부는 나라 안에서 온 인생을 살고 있는 사회적 약자의 지저분한 삶의 터전을 무자비하게 떠밀고 밟고 허물고 있었다.

 

돈암동 달동네는 북악스카이웨이 아래쪽으로 3,00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서울에서 제일 큰 규모의 저소득층 집단거주지였다. 정보가 빠삭한 투기꾼과 건설사는 수천억을 벌기 위해 불량주택 개량(?)사업에 뛰어들었다. 용역회사는 22억이 넘는 철거용역비를 받고 주민들을 거칠게 몰아쳤다. 철거가 지연되면 지연비용을 토해내야 하니 용역사는 폭력전과자, 특수부대 출신, 조폭 가리지 않고 고용해 일당 50만 원, 주민의 저항이 심하면 시간당 50만 원을 주기도 했다. 쇠파이프, 각목으로 어린이 노인 할 것 없이 구타하며 끌어냈다. 경찰은 지켜보기만 했다. 다른 지역에서 주민이 성폭력을 당했지만, 경찰은 가해한 용역을 잡았다가 훈방하고 말았다니 알만한 시절이었다

 

지저분하다고?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  돕고 기쁨과 슬픔도 나누어 가졌다.  외국인의 눈에 들자고 자기 국민을 때리고, 짓밟은 정부. 그게  정치냐?
지저분하다고?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 돕고 기쁨과 슬픔도 나누어 가졌다. 외국인의 눈에 들자고 자기 국민을 때리고, 짓밟은 정부. 그게 정치냐?

 

<철거민촌에서 풍물을 배우던 아이들>

 

아수라장. 그 속에서 그녀는 보았다. 빈집에서 철거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풍물을 배우고 있는 아이들을. 순간 단전 아래에서 뜨거운 것이 턱 밑까지 치밀어 올랐다. 사당동, 상계동, 목동, 돈암동, 동소문동, 도원동, 전농동, 봉천동. 철거민들은 처절하게 저항하다가 죽고 다치고 감옥에 갔다. 이간질에, 갈라치기에 내부에서 싸움이 터지기도 했다. 빨래터 아래에서 물장구치며 함께 놀던 개구쟁이들, 아래 윗동네에 살며 함께 웃고 함께 울던 알뜰살뜰한 공동체는 무너져나갔다. (지난번 7호 개벽대장 김두루한 인터뷰에 등장했던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 같은 정치가가 있었다면 절대로 이런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밥을 지었다>

 

19953월 중증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당시 37)이 서초구청 앞에서 사망했다. 혼자 사는 중증 장애자였지만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혼자 힘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이었다. 일 년 전 단속반에 걸려 하나 있던 다리마저 부러졌으나 담당자의 달콤한 말에 속아 피해보상, 고소 모두 포기하고 자비로 힘겹게 치료를 받았는데 다음 해에도 서초구청의 단속은 계속되었다. 압수해간 배터리를 달라고 구청에 사정했지만 냉대를 받았던 최 씨는 실낱같은 희망도 없는 세상에 두 손을 들고 자기 몸에 불을 붙였다.

 

노점상들이 투쟁을 위해 모여들었다. 비대위가 꾸려졌다. 빈민장례를 치르기 위해 최 씨의 주검을 트럭에 싣고 출발하던 비대위는 병원을 출발하자마자 수백 명의 전경에게 시신을 탈취당했다. 비대위는 영결식과 노제를 포기한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주검을 찾을 수 있었다. 최 씨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항의집회를 열었다. 그녀는 집회현장에서 밥을 지었다. 그녀의 밥 짓기는 분노와 슬픔의 현장에서 한 줄기 따스한 빛이 되었다.

30년을 한결같이 필요한 곳을 찾아다니며 밥을 지었다. 나누니 행복했다.
30년을 한결같이 필요한 곳을 찾아다니며 밥을 지었다. 나누니 행복했다.

 

밥 짓기는 이후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계속되었다. 그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다가 김밥과 컵라면으로 허기를 때우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쌍용차 해고자복직투쟁현장, LG 트윈타워 투쟁현장, 청와대 앞, 법원 앞, 소성리. 없는 사람을 죽이고자 덤비는 정부와 사용자 측의 폭력 앞에 절망하는 사람들. 백 명, 천 명이 넘어도 따듯한 밥을 먹이고자 달려갔다. 그렇게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2016, 아파트도 생기고 밥묵차도 생기고>

 

엄마는 늘 시위현장에 있거나 수배 중이거나 밥 짓기를 하며 밖으로 돌았음에도 3형제는 어느결에 모두 알아서 잘 커 주었다. 20163형제는 모은 돈으로 엄마에게 아파트 열쇠를 선물했다. 낡은 집의 좁은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던 엄마에게 이렇게 기가 막힌 선물이 있을까. 돈 없으면 알바라도 해서 밥 짓기를 계속하겠다는 엄마를 말릴 수 없으니 밥 짓기에도 열심히 후원을 해주는 고마운 아들들이다. 청라의 아파트로 이사한 것도 기쁜 일이지만 승용차로 음식을 실어나르던 그녀에게 주변에서 돈을 모아 마련해 준 푸드트럭 십시일반음식연대밥묵차또한 엄청난 기쁨을 주었다.

 

<암이 문을 두드렸다>

 

언젠가부터 소화가 안 되며 복통과 두통이 가시지 않았다. 엑스레이를 찍고 MRI를 해도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자꾸 병원을 찾으니 의사가 짜증을 냈다. 다른 병원을 찾았다. 마찬가지로 이상이 없다며 혹시 모르니 뒤쪽을 검사해보자고 했다. 그리고는 무언가가 보인다며 큰 병원을 추천했다. 큰 병원을 찾았더니 췌장암이 1, 2기도 아니고 4기라고 했다. 작년 말의 일이다.

 

 밥을 나누면 기뻤지만 돌아서 집에 오면 한뎃잠을 잘 그들 걱정에 잠이 오지 않았다.  수면제를 10년 가까이 먹었다.작년 말, 암 선고를 받았다. 4기라고 했다.
 밥을 나누면 기뻤지만 돌아서 집에 오면 한뎃잠을 잘 그들 걱정에 잠이 오지 않았다.  수면제를 10년 가까이 먹었다.작년 말, 암 선고를 받았다. 4기라고 했다.

 

지난날을 생각해보았다. 잠이 오지 않아 수면제를 10년 가까이 복용했지만, 틈틈이 여행 다니며 노는 것도 실컷 해보았다. 자식들도 훌륭히 잘 커 주었고 시위도 가열차게 해보았다. 암 선고를 받았지만 마음은 고요했다. 내일 죽는다고 해도 여한은 없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가족 하나 하나에게 이별의 글을 적었다. 치료 않고 그대로 여생을 맞겠다고 했더니 남편과 자식들이 울며불며 난리 치며 치료를 시작하자고 사정했다. 그들의 요구대로 수면제를 끊고 담배를 전자담배로 바꾸었다.

 

<한량 아버지, 대장부 어머니>

 

아버지는 딸의 기운을 출생 후부터 알아차렸을까. 딸 넷 중 그녀에게만 외자 이름 를 지어주셨다. ‘딴따라기질이 충만하신 아버지는 역전 무대, 노인요양원 등에서 공연을 하고 다니던 길 위의 가수였다. 물론 돈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대장부기질을 가진 어머니(박순자)는 생활과 육아를 홀로 책임지셨다. 그런 중에도 나누는 것을 좋아하셨다. 어머니는 쌀 포대, 김치를 싸 들고 이웃을 찾으셨다. ‘이 집 아저씨는 운전하다가 감방에 갔다니.’, ‘이 집은 자식이 넷이나 되니.’ 

 

유희 씨가 노래를 좋아하고 잘 부르는 건 아버지를 닮았고, 여기저기 먹이지 못해 애가 닳는 건 어머니를 닮았다. 흉보면서 닮는다더니 아들들도 남에게 퍼주는 것을 좋아한다. 엄마가 밖으로 돌아쳐도 자식들이 비뚤지 않은 것은 엄마의 오지랖이 이 삭막한 분단 정글자본주의 사회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것이기 때문일 터이다. 유희씨의 페이스북에는 타인을 위한 기도가 넘쳐난다. 타인을 돕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안다는 유토피아 세상을 유희씨는 스스로 만들어 제대로 살고 있었다.

 

<줄어들었다>

 

암 중에 어려운 게 췌장암이라더니, 유희 씨의 암 덩이는 치료를 시작한 지 몇 달만에 그 지름이 1/4로 줄어들었다. 병원에서는 남편과 세 아들이 진료실로 검사실로 따라다니고 당번을 정해 환자에게 붙어있는 것을 보고 이런 환자 가족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런 사랑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 이제 죽음을 바라보지 말고 사는 길로 다시 들어서자!

 

<7.27평택인간띠잇기에 당연히 참석합니다>

 

평택인간띠잇기 행사에는 당연히 가지요. 내게 우리 유희라고 불러주시는 소성리 어르신들도 다 오신다는데 내가 평택에 못 가겠어요?”

돌이켜 보면 참 쉽지 않은 일인데 쉽게 했어요. 갔다 오면 너무 좋은 거예요. 숙제를 풀은 듯, 마음이 홀가분하고, 재미있고, 벅찬 기쁨이 몰려들고……. 그러면 된 거지 뭘 더 바랄까요.”

봉사하러 못 가면 몸살이 나니 앞으로도 다니게 될 겁니다.”

 

누군가를 돕지 않으면 몸살이 난다는 유희. 개벽세상을 앞장서서 만들어 왔다.
누군가를 돕지 않으면 몸살이 난다는 유희. 개벽세상을 앞장서서 만들어 왔다. "평택? 당연히 가야지요!"

 

 

뱀발) 참으로 귀하고 귀한 사람들을 7.27 개벽대장들을 인터뷰하며 만나고 있다. 혼자만 잘살려고 동료를 배신하고 곤경에 빠뜨리고도 태연한 최은순 같은 부류들이 법망을 피해가며 잘살고 있는 세상에, 제 권력을 위해 제 나라 주권자에게 눈을 부릅뜨고 거짓말을 떡 먹듯 하는 정치가들이 판치는 세상에, 어려운 사정에 있는 사람을 그냥 내치지 않고 밥으로 생명을 반짝이게 하는 사람. 그가 건강하게 웃는 모습을 계속 보게 되기를... 그는 틀림없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제 권력 연장을 위해 혈안이 된 한국의 정치가들.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보다 덮어버리기에 급급하다. 팔메같은 정치가는 이 땅 어디에 있을까?
제 권력 연장을 위해 혈안이 된 한국의 정치가들.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보다 덮어버리기에 급급하다. 팔메같은 정치가는 이 땅 어디에 있을까?

편집 : 고은광순 객원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고은광순 객원편집위원  koeunks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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